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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의인이 고난받는 이유

Joyfule 2023. 11. 14. 00:28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의인이 고난받는 이유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던 이천육년 십이월 삼일 아침이었다. 수은주가 영하 십도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나는 어둠침침한 지하실에서 시대의 현자를 직접 보았다. 얼굴이 하얗고 몸집이 자그마한 그는 여든일곱살의 노인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서른다섯살에 시간이 끊어지는 신비체험을 했다고 했다. 그는 불교를 포함해서 동양사상을 모두 품에 안은 ‘기독교 도인’이라고도 했다. 나와 친한 판사가 그가 살아있을 때 직접 그를 보면 귀한 체험으로 남을 것이라고 소개해서 갔었다. 도인은 느린 어조로 띄엄띄엄 여러가지 말을 했다. 식견이 좁은 나는 그 깊은 의미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중 내 귀에 들어오는 게 드문드문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었다.

“흙덩어리를 도기로 만들기 위해서는 천도가 넘는 고열의 가마 속에 넣어. 그렇게 하면 천년만년 가는 거지. 의인을 고난이란 가마 속에 넣는 게 성경의 욥기 사상이야. 사탄이 가마 역할을 하고 말이야. 고난을 겪고 나서 욥이 눈을 뜨고 한 단계 올라가잖아? 눈을 떴다는 건 뭔가 하면 하나님을 만났다는 거야. 절대자와의 만남이지. 그 고행이 십자가야. 욥이 왜 고난을 받나? 의인이니까. 만 가지 고난 속에 넣어 순금이 나오게 해야 하는 거야. 그게 의인의 고난사상이지. 예수도 팔자를 타고났어. 십자가를 질래서 진 게 아니지. 내가 팔자라고 말했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거야. 고난은 사탄이 만드는 거야. 하나님이 사탄을 만든 이유는 고난을 만들게 해서 순금 같은 의인이 되게 하는 거야. 불교에서는 그걸 각(覺)이라고 하고 부처라고도 하지. 석가도 육년 고행 끝에 견성성불이 되는 거지. 플라톤은 십년 내지 십오년 정도 의인을 전쟁에 내보내거나 광산의 동굴 아니면 바다로 보내서 훈련 시켜야 철인왕이 된다고 했어. 결국 중국 인도 희랍사상이 통하는 거지. 욥기의 현대판이 괴테의 파우스트야.”

도인은 동서양철학에 문학도 꿰뚫은 경지 같았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그가 이번에는 불경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금강경의 핵심이 뭐냐. 한없는 고통속에 들어가 있어야 마음이 깨어나온다는 거야. 육조 혜능이 그걸 깨달았어. 나무가 눌리고 눌려야 석탄이 되고 그게 눌리고 눌려야 금강석이 되고 그래야 자기 속에서 빛이 되어 나온다는 거야. 금강경이 그거야. 실존철학의 실존이지.”

도인의 말을 들으면서 어렴풋이 고난의 의미를 이해할 것 같았다. 나는 악인들의 부귀와 의인의 고난을 보면서 혼란스러웠다. 도인은 점토가 눌려서 청보석 홍보석이 된다는 뜻 같았다. 위로가 되기도 하는 말이었다. 그 현자를 소개해 나를 그 자리로 나오게 한 판사가 이렇게 속삭였다.

“여기 가르침을 받으러 나온 사람들도 심상치 않은 것 같아. 저기 여자분은 대형약국을 두 개 가지고 있는 부자라고 하던데 옷 입고 나오는 수준을 보면 거의 거지 차림새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래. 그리고 현자인 저 노인은 이렇게 가르치기 위해 새벽에 평택에서 올라오시는 거야. 대단한 분이지.”

작은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의 모습은 금방 옆으로 쓰러질 풀처럼 쇠약해 보였다. 노인이 이렇게 말했다.

“오늘 새벽 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지난 밤 눈이 와서 온 세상이 은세계가 된 거야. 하나님의 물질적인 표현인 이 세상이 참 아름답고 황홀했어. 아인슈타인은 진정한 과학자라면 우주 속에 성령이 다니는 걸 확신할 거라고 했어. 스피노자는 과학 속에 신학이 있다고 했어.”

오십대 초반에 내가 직접 보았던 현자인 노인의 모습이었다. 그는 이미 저세상으로 떠난 지 십여년이 됐다. 내가 만난 시대의 현자가 김흥호박사였다. 그는 해방 후 사상가 다석 류영모 선생을 만나 육년 만에 깨달음을 얻고 평생 수행을 계속했다. 그는 사람은 누구나 사명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거듭나는 체험을 해야 그 사명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거듭나는 체험을 한 후 자신의 사명이 가르치는 일인 것임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리고 오십오년 간 하루에 한 끼를 먹으면서 강연했다고 한다.

인생의 문제는 해답이 있어서 풀리는 게 아니라 인간이 성숙해져서 문제가 문제가 아닐때 비로서 풀린다는 걸 알았다. 그에게서 배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