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탤런트 친구의 연기철학
이제는 원로 탈랜트가 된 친구가 갑자기 내가 묵고 있는 실버타운으로 찾아왔다. 동해의 두타산 계곡에서 밤새 사극 촬영을 하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한잠도 못 잤어. 그래도 동해까지 왔는데 너를 안보고 가면 혼날 것 같아서 왔어.”
그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다. 그는 냉기서린 계곡에서 밤을 새서 그런지 파 김치 같이 피곤해 보였다. 그런 데도 와 준 게 고마웠다. 그의 연기 인생도 칠십고개를 넘어섰다. 노인이 된 그는 아직도 연기에 정열을 불태우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점심때였다. 나는 그를 실버타운 식당으로 안내했다. 식판을 들고 밥과 국 그리고 나물과 김치를 담아 구석의 빈식탁에 마주 앉았다.
“사극의 첫 장면이 무덤 속에 묻혀 있던 머슴 출신인 내가 발굴되는 장면이야. 이 추운데 어떻게 땅속에 누워있나 하고 걱정했는데 다행히 실리콘으로 내 얼굴을 떠서 땅에 묻으면 된다고 하더라구.”
실감 나는 연기를 하려면 진짜 땅속에 묻혀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놀랐다. 연기자들이 목숨을 걸고 한 장면 한 장면 찍은 걸 우리 들은 본다.
“전에 미녀 탈랜트 최명길씨의 상대역이 되어 드라마를 찍었는데 내가 연기하는 장면을 본 한 친구가 내 눈빛이 틀려먹었다고 지적을 하더라구. 사랑이 흘러나오지 않더래.
그 친구 말대로 촬영을 할 때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의무 비슷하게 찍었지. 그 지적을 받고는 다음부터 사랑하는 배역을 맡으면 그 순간부터 상대 여배우를 사랑하려고 몰입했어. 감정에 빠져 들어야하거든 . 그렇지만 촬영이 끝나면 엄한 절제가 필요해. 극 중의 사랑이 계속 뻗어나가면 스캔들이 생기고 골치 아픈 거지. 여배우들도 마찬가지고.
나하고 같은 대학을 나온 배우 문성근은 프로야. 자기는 배역인 여배우를 진짜 사랑하지 않으면 연기를 할 수 없다고 그래.”
대학 졸업 무렵이었다. 대학에서 연극반에 있던 그는 방송국의 탈랜트 공채에 합격했다. 그는 탈랜트가 되자마자 원미경, 금보라, 장미희씨등과 연인이나 부부 역할을 맡으면서 바로 주연배우가 됐다. 그는 운이 좋았다고 했다. 그 이전에는 미남미녀배우가 사랑하는 드라마가 많았다. 그러다 그 무렵 두꺼비 같은 인상의 평범한 청년과 미녀가 사랑하는 드라마를 찍자는 기획이 있었는데 그가 대상으로 스카웃 된 거라고 했다. 그시절 친구인 그에게 재미있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밤새 대사를 외우고 촬영장으로 갔는데 연인역의 상대인 장미희씨가 얼마나 예쁜지 넋이 나갔다고 했다. 그런 미녀가 갑자기 자신을 끌어앉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를 왜 버리느냐고 하면서 연기를 하는데 하도 놀라서 머리속이 하얘지더라고 했다. 대사를 잊어버려 엔지가 나고 감독한테 혼이 났다고 했었다.
탈랜트로 얼굴이 알려지면서 그는 내게 그만이 겪는 고통을 더러 털어놓았다. 그가 시골로 촬영을 갔었는데 동네 꼬마들이 그가 묵는 여관방 창으로 돌을 집어서 던지더라고 했다. 화도 나고 이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었다. 모처럼 나이트 클럽에 놀러 가도 얼굴이 알려져서 플로어에 춤을 추러 나가지도 못한다고 했다. 구석의 룸에 들어가 문을 반쯤 열고 멀리 무대에서 연주하는 걸 엿보면서 혼자 춤을 췄다고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었다. 세월이 흐르고 그는 이제 누구나 아는 원로배우가 됐다. 그리고 철학을 가진 중후한 노신사가 됐다.
“연기가 뭐야?”
내가 그에게 물었다. 이제 그는 결론을 낼 때도 됐다.
“누구나 연기를 하고 살아. 아이들 봐. 네 다섯살만 되도 소꼽놀이를 하잖아? 아버지 엄마 딸 배역을 자기네끼리 나누어 맡고 알아서 즉흥적인 대사를 하고 밥 짓는 흉네 아기 보는 흉내를 내면서 연기를 하지. 어떤 아이들은 거기에 몰입해서 진짜 엄마가 되고 그러잖아? 연기란 자기가 맡은 배역에 빙의되듯 몰입해서 그 캐릭터가 되어야 하는 거지.”
“어떻게 연기를 배웠어?”
“간단해. 세상이 텍스트야. 만나는 여러 분야의 사람마다 그 표정이나 눈빛 행동이 배우에게는 모두 교과서가 되는 거야.”
좋은 친구와 즐거운 점심시간을 보냈다. 그는 피곤하다면서 밥을 먹고 조금 있다가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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