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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젊어지기 싫은 노인들

Joyfule 2024. 7. 11. 02:34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젊어지기 싫은 노인들  

 

실버타운 식당에서 칠십대 후반부의 혼자 사는 노인들과 같은 상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

“하루를 어떻게 보내세요?”​

내가 중견공무원을 지낸 점잖은 노인에게 물었다. ​

“조금은 무료하죠. 영어책을 사 놨는데 공부가 안돼요.”​

“다시 젊은 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가시겠어요?”​

내가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는 다시 돌아가고 싶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절대 안 가죠.”​

젊어서 지위가 있거나 없거나 부자였거나에 상관없이 노인들은 다시 젊음으로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다고들 했다. ​

늙어서 몸이 아프고 무료해도 지금이 가장 조용하고 편안하다고 했다. 나도 그런 것 같다.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고 상상해 보면 섬뜩하게 떠오르는 몇 몇의 장면이 있다. 냉기가 도는 어둡고 추운 독서실의 칸막이한 책상과 딱딱한 의자가 보인다. 거기서 양철 찬합 속에서 딱딱하게 굳어진 찬밥을 점심과 저녁으로 나누어 먹으며 대학입시준비를 했다. 낮은 성적에 앞이 안보이는 절망의 순간이기도 했다. 다시 그걸 하라면 절대 안 하고 싶다. 고시 준비를 할 때 도 그랬다. 눈 덮인 해인사의 한 암자가 떠오른다. 수은주가 영하 이십도이하로 내려가는 데 창호지 한 장이 방과 외부를 나누는 벽이었다. 거기서 떨며 공부를 하다가 아예 일차 시험에 떨어졌었다.

 

하숙비가 포함된 장학금도 끊기고 갈 곳이 없었다. 막막했다. 그런 과정을 다시 반복하는 삶이라면 절대 사양이다. 실버타운의 노인 들마다 다들 나름대로 아팠던 삶의 과정이 있는 것 같다. 한 노인은 사십년 동안 잠수부로 수십 미터 아래의 심해에서 일했다고 한다. 바닷속에서 혼자 유영하면서 외롭고 힘들었던 것 같다.

 

또 다른 노인은 삼십년이 넘는 세월을 여객기의 기장을 했다고 한다. 철상자 속에 들어앉아 밤하늘의 지구를 뱅뱅 돌았다고 했다. 여러 인생길을 흘러온 노인들이 실버타운이라는 저수지에 흘러들어 출렁거리고 있는 것 같다. 모두들 늙고 병들고 죽음이 가까워 왔는 데도 모두 과거로 돌아가는 건 싫어하는 것 같다. 갑자기 불교의 윤회라는 관념이 떠올랐다. 노인들이 죽으면 다시 어디선가 환생을 해서 또 다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 아닐까. 그리고 죽고 또 다시 태어나고.​

나는 양평의 강가에 사는 친구에게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소아마비로 평생을 제대로 걷지 못했다. 몸이 불편해도 마음에 그늘이 없고 천사같이 착하다. 그는 가난과 장애를 극복하고 고시에 합격해 나이 칠십까지 변호사를 해왔다. 그는 효자였다. 땅을 사고 주택을 지어서 아버지를 모시고 돌아가실 때까지 생활비를 댔다. 그는 철저한 불교 신자였다. 자신의 장애가 전생의 업 때문이라고 했다. 이생에서 선을 쌓아나가면 다음 생에서는 건강한 몸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내게 말하곤 했다. 그는 예수를 믿는 나와 종교 문제를 놓고 서로 얘기를 많이하는 편이다. 그에게서 나는 불경을 많이 배웠고 그는 내 말을 듣고 성경을 구입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을 하고 필사도 했다. 어제 오후 실버타운의 노인들한테서 절대 과거로 돌아가기 싫다는 얘기를 들은 후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라 저녁 무렵 그에게 전화를 해서 물었다.​

“강변호사 너는 젊은 시절로 인생을 되돌릴 수 있다면 가고 싶냐?”​

“그런 소리 하지마. 칠십이 넘은 지금도 꿈에 내가 고시 일차 시험에 떨어져 있어. 끔찍하지.”​

젊은 시절 그는 고시 일차시험에서 일곱번째 떨어졌을 때 진짜 세상이 노랗게 보인다고 했다. 그렇다고 장애가 있는 그에게 일자리는 없었다. 그의 고통을 남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다시 물었다.​

“나도 부처님을 좋아하지. 그 말씀이 인생 최고의 철학이니까 말이야. 그런데 윤회 때문에 찜찜해.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 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가게 하고 그걸 반복해야잖아? 누군들 그렇고 싶겠어?”​

“그러니까 이승에서 선한 일을 많이 해서 다음 생에서는 잘 태어나야지. 그리고 선업을 많이 쌓아 아예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하지.”​

“성경을 보면 선을 쌓으려는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바로 천국으로 갈 수 있어. 예수를 잘 믿으면 바로 갈 수 있는 거야. 내가 선을 쌓지 못했어도 예수가 대신 값을 치뤄 준거지. 그게 십자가래.”​

“난 그게 이해가 안 가. 왜 자기가 노력을 하지 않고 죄진 상태에서 공짜로 구원을 받아? 난 도저히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어. 말이 안 돼.”​

“넌 니 어린애가 진창에 넘어져 무릎이 깨지고 옷이 더러워졌을 때 옷을 갈아 입고 상처를 알아서 치료하고 오라고 하겠냐? 아니면 더럽고 상처난 상태대로 그대로 오게해서 안아주겠냐? 하나님은 아버지 같은 분인데 애가 무슨 체면이 필요하겠어? 난 그런 생각이야.”​

“하여튼 다시 태어나 고생하는 윤회가 겁이 나서 너는 예수님을 선택했다는 건 생각해 볼만 해.”​

친구는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솔직히 나도 죽어보지 않아서 아무것도 모른다. 윤회가 있는지 천국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깊은 바닷속 같은 영원한 무의 세계로 갈 것 같은 두려움도 있다. 그래도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천국을 날아다니는 영혼이 되고 싶어 예수보험에 가입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