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할아버지의 뼈
나는 오래된 할아버지의 묘를 인부를 시켜 열고 있었다. 오십년 전 할아버지를 그곳에 묻었었다. 이제는 정리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다. 나이를 먹으니까 산에 오르기도 힘들어지고 내가 죽은 후에 음침한 골짜기에 버려질 할아버지의 묘를 그냥 놔두기도 싫었다. 산에 들에 버려진 봉분과 뼈들은 세상에 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인부의 손에 들린 삽은 마른 땅으로 부드럽게 박혀 흙을 떠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부가 삽 대신 준비했던 호미를 손에 쥐더니 무릎을 꿇고 마치 고고학자 처럼 조금씩 흙을 뒤지기 시작했다.
“뼈조각들이 나오네요. 이건 정강이뼈네”
인부는 누런색의 뼈를 내게 건네주었다. 길다란 그 뼈는 할아버지를 평생 받쳐주던 지지대였다. 어린 시절 추억 한 조각이 떠올랐다. 함경도 출신의 할아버지는 손자인 나를 보고 발씨름을 하자고 했다. 서로 마주 앉아 정강이를 엇갈리게 걸고 팔씨름 하듯이 발로 상대방을 옆으로 넘기는 것이었다. 이기려고 끙끙거리다가 웃고 있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았었다. 손자를 예뻐하는 활짝 핀 할아버지의 따뜻한 미소였다.
“여기 갈비뼈 나왔습니다.”
인부가 둥그런 뼈들을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그걸 받아 한지를 깐 박스에 담았다. 그 뼈는 머나먼 세월 저쪽의 한 장면이 내게 흘러 들어오게 했다. 할아버지는 칠십대 중반쯤 동대문 밖에 있던 낡은 일본식 목조가옥 이층 다다미 방에서 앓고 있었다. 그날 나는 할아버지 옆에 누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이불을 내게 덮어주고는 나를 꾹 껴안아 주었다. 할아버지의 품이 따뜻했다. 나를 안아 주던 가슴을 형성하던 갈비뼈였다.
“두개골입니다. 받으세요”
인부가 둥그런 머리뼈를 내게 건네주었다. 반듯한 할아버지의 이마를 형성했던 뼈였다. 그 안에 할아버지의 어떤 기억들이 담겨 있었을까.
머리를 항상 빡빡깍은 할아버지는 광목으로 지은 한복에 하얀 보따리를 옆에 끼고 깊은 산골 마을을 돌아다니는 독특한 장사꾼이었다. 사향노루의 배꼽이나 심마니가 캔 산삼을 서울 종로 오가의 한약방에 팔았다. 할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다루는 물품들을 가르쳤다. 지네 말린 걸 ‘오공’이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내게 녹용에 상대와 중대 하대가 있고 그 부위마다 약효가 다르다는 걸 가르쳤다. 할아버지는 내게 구입한 사향들을 종류별로 냄새를 기억하게 했다. 그리고 사향을 구하면 냄새를 맡게 하면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아니면 물에 불려 무게를 속였는지 감정하게 했다. 그때 받은 훈련으로 톡 쏘는 사향 냄새의 질감들이 평생 나의 뇌리에 박혀 있다. 나는 할아버지의 사향 무게를 다는 손저울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어렸던 나를 데리고 다니기를 좋아했다. 그 시절 한번은 내가 시골 장터에서 할아버지와 싸운 일이 있었다. 점심때였다. 할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간 좌판 위에는 삶은 밀가루 국수를 수북이 담은 찌그러진 냄비가 있었다. 국수위에는 파를 조금 썰어넣은 양념간장이 전부였다. 나는 길거리에서 먹는다는게 왠지 부끄러웠다. 중국집에 들어가 짜장면을 사달라고 졸랐다. 할아버지는 손자의 요구를 거절하고 좌판 앞에서 악식(惡食)을 먹게 했다. 나는 심통이 나서 볼이 부어 있었다. 잠시 후 할아버지는 장터를 지나가는 남자 두명을 가리키면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저 양복쟁이들 봐라. 넥타이를 매고 멋을 내도 주머니는 텅 비었을 거다. 너 이걸 한번 만져 봐라”
할아버지는 내 작은 손을 잡고 허리에 차고 있는 전대를 만지게 했다. 온통 두툼한 돈다발이 가득 차 있었다.
“돈이 없어서 안 사주는 게 아니다. 앞으로 너는 어떤 나쁜 음식이든 먹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어디서든 잘 수 있어야 한다. 할아버지 돈이 있어도 여관에서 안자고 합숙소에서 잔다. 사람은 겉이 아니라 속이 꽉 차야 한단다.”
함경도 노인의 손자교육법이었다. 나는 그 할아버지의 뼈를 화장한 후 유골함을 차에 싣고 오십년 동안 엄청나게 변한 서울의 모습을 구경시켜 드렸다. 그리고는 아파트로 모셔 왔다. 할아버지의 유골이 햇볕 잘 드는 따뜻한 창가에서 강남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내가 할아버지의 유골을 보며 말한다.
“가난에 처할 줄도 알고 부에 처할 줄도 알아요. 할아버지.
이제는 껍데기와 알맹이의 차이도 어느 만큼 이해하는 나이가 됐어요. 오십년 만에 땅속에서 나와 손자 집에 있으니까 좋죠?”
나는 할아버지를 동해 바닷가의 내가 심은 나무 아래 모실 예정이다. 그리고 나도 죽으면 그 옆으로 가고 싶다. 인간은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고 했던가. 할아버지 묘를 정리하면서 죽음공부를 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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