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 - 조순영
지방에 살고 있는 큰 아들네가 서울로 이사를 왔다. 아이들을 자연 속에서 키우고 싶다는 아들내외는 신혼살림을 그쪽에 차렸었다. 맏손자 밑으로 세쌍둥이까지 낳아서 아들만 넷인 가장이 되어 대식구가 된 지 일 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맏손자를 낳고 한동안 소리 없이 살던 중, 하루는 세쌍둥이를 임신했다고 기별이 왔다.
내가 가난한 집 종부로 30년 동안 맞벌이 주부로 살다보니 아들네는 나처럼 사는 걸 원하지 않았다. 저희들끼리 행복하게 사는 게 나의 바람이었다. 젊은 날 고생이 버거워 나는 남들이 원하지 않는 나이 먹기를 원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IMF때 명예퇴직을 했다. 자유의 몸이 되어 동주민센터 등에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행복이 무언지 알 무렵, 아들네가 행복하게 사는 가 했더니 세쌍둥이를 가졌다니 황당했다.
양가에서 별로 도움을 줄 수 없는 형편이기도 했지만, 지인 중에 세쌍둥이를 힘겹게 키우던 집 할아버지가 병까지 얻어 요양원 생활을 하는 것을 본 지라 말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들내외는 다음에 낳았으면 좋겠다는 우리 부부의 어려운 청을 꺾고 사내아이 셋을 보태서 아들만 넷을 둔 부모가 되었다.
갖은 고생하며 버티던 아들내외가 1년이 지나자 더는 버틸 수 없었던지 우리 집 2층으로 이사를 오고 싶다고 했다. 아무리 내 집이라 해도 마음 놓고 살고 있는 사람들을 내 맘대로 내보낼 수 없는 일이고, 연세가 90이 된 친정어머니까지 모시고 있는 나로선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게다가 내가 관절염까지 앓고 있는 걸 알면서 얼마나 견디기 어려웠으면 그럴까 싶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아무리 좋은 사이도 너무 가까이 살다 보면 기대가 원망으로 변하기 쉬운 일이 아닌가. 무엇보다도 이제까지 잘 지내고 있는 우리 고부관계가 나빠지는 것이 가장 큰 염려가 되었다.
그래서 집으로는 어렵고 인근 서민 아파트로 이사를 하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어머니는 낙상을 당하셔서 고관절 수술을 받고 한 달이상 병원에 계시다 퇴원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았는데 아이들까지 이사를 했으니 내 몸은 몇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빠졌다. 그런 나를 보며 친구들이 누군가의 보호를 받아야할 나이에 보호는 고사하고, 위아래로 치받고 눌려서 얼마나 힘드냐고 위로해줬다.
휠체어에 탄 어머니 모시고 병원으로 공원으로 다니는 것만으로도 힘이 부치는데 나라의 도움은커녕 도우미도 마음 놓고 못 쓰는 며느리를 도와 손자들을 돌보느라고 등줄기에 땀이 가실 사이 없다. 그러면서도 부모사랑을 독차지 하던 맏손자가 갑자기 불어난 동생들로 인해 소외감을 느낄까봐 아들내외는 보통 신경 쓰는 게 아니다.
게다가 나에겐 60이 가깝도록 결혼을 안 한 남동생까지 있다. 어머니는 아플 때는 아프다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살면서, 잠시 아픔이 가실 때는 남동생과 출가한 여동생걱정까지 떠날 사이 없다. 아들의 도움으로 사실 연세에 큰딸에게 얹혀살면서 따로 사는 자식들 걱정만 하시는 어머니가 때론 야속해서 원망도 하지만, 동생에게 반찬이라도 챙겨다 주면 어머니는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다. 결국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일은 어머니 자신은 물론, 혼자 사는 남동생 까지 돌보아 주는 일이다.
언젠가 아들은 자신을 길러 준 외할머니와, 처의 조부님은 물론 처 외할머니까지 챙겨야하는 처지를 나에게 하소연한 적이 있었다. 그럴 때 나는 그 애에게 “모든 역할은 수행할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니, 아무래도 네가 그 만한 능력이 있는 모양이니 기꺼이 수행하라.”고 충고한 적이 있었다. 그런 아들이 지금은 저 하나 꿈을 접고 가족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자신의 행복으로 삼겠다고 한다. 나는 가슴이 저미면서도 그런 아들이 든든하고 대견하다.
어렸을 때 직장에 다니는 나를 대신해서 외할머니 손에 자랐어도 건강한 정신으로 자란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남편 또한 공직에서 정년퇴직 한 후 한 중학교에서 배움터 지킴이로 성실하게 봉사를 하고 있다. 지금 나는 아들에게 했던 말을 나 자신에게로 돌리면서 위로로 삼고 있다.
늙어서는 고독이 제일 무서운 병이라는데 그럴 사이 없이 살고 있으니 이 아니 행복한가. 지금이야말로 가장 절실하게 나의 힘이 필요한 때 힘을 보태면서 노후를 보내고 있으니, 내가 어머니와 자식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할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공것은 없다지 않은가.
몸은 비록 고달프지만 마음이 편하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마음을 바꾸니 천국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가만히 있다가도 세쌍둥이 생각만 하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가까이 있으니 아이들이 보고 싶을 때는 언제라도 달려 갈 수 있으니 이것이 복중의 복이 아닐까싶다.
나는 오늘도 행복을 만나러 아들네 집으로 달려갈 것이다. 우리 가문을 빛낼, 우리 고장을 빛낼, 그리고 장차 우리나라를 빛낼 꿈나무들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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