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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도 아름다운 무지개 - 김윤희

Joyfule 2013. 8. 26. 09:36

 

슬프고도 아름다운 무지개 -  김윤희

풀도 나무도 활활 제 몸을 사뤄 가던 어느 가을날입니다.
‘화랑의 힘찬 기상, 진천에서 세계로’란 슬로건을 내걸고 2003년 세계 태권도 화랑문화 축제가 열기를 뿜으며 그 속으로 어우러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뜨거운 열기 속에 불똥 튀기듯 사고가 생겼습니다. 태권도 플라이급에 출전해 겨루기 시합을 하던 크롬웰 에르난데스라는 필리핀 선수가 상대방의 돌려차기를 맞고 쓰러져 일어나질 못하는 것입니다. 급히 병원으로 실려 간 그에게 내려진 것은 뇌사 판정이었습니다.

 

쾌청하던 날에 느닷없이 여우비가 내리는 날이 있습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는 날도 더러 있습니다.
어둠이 꽃망울 터질 듯 벙글어진 스물일곱 젊은이를 덮쳐왔습니다. 내 나라도 아닌 멀리 타국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한 피붙이의 소식은 마른하늘에 내려친 날벼락 바로 그것입니다. 놀라서 단숨에 날아온 그의 가족들에게 한국의 11월 날씨는 살을 에듯 너무도 가혹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창창하던 가을 하늘도 벌겋게 물이 들어 서녘으로 슬픔을 길게 늘어뜨리고 단풍도 하나 둘 잎을 떨구며 ‘우우우’ 낮은 곡성을 냅니다.

밝고 싱그러운 미소에 기압소리도 우렁찼던 한 젊은이를 되살려 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살려낼 방법을 찾아보았습니다. 주민들도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 완쾌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그러나 붉게 물들어 가던 노을은 점점 잉크 빛이 되더니 끝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합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면서 아들의 병상을 지키고 있던 아버지와 가족들은 그가 영원히 한국에 머무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들리지 않는 그의 숨결에서 아직은 살아 있는 장기만이라도 한국에 남겨 놓고 싶어 하는 것을 가까스로 짚어냈던 모양입니다.
‘좋아하면 닮는다 했던가요?’
태권도를 사랑하며 종주국인 한국을 그의 모국 필리핀만큼이나 좋아했다던 한 젊은이와 그를 사랑한 가족들, 그 마음속에는 시나브로 한국인의 정서가 이미 녹아들어 있었던가 봅니다. 그의 장기로 인해 꺼져가던 또 다른 한 생명이 새 삶을 찾았고, 그는 한국인의 몸을 빌려 비로소 영원히 한국인으로서의 삶을 다시 잇게 된 것입니다.
11일 간의 뇌사상태에 있던 아들의 몸을 거두어 떠나가는 한 아버지의 머리 위로 차가운 가을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시린 가슴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을 밟으며 트랩을 향하는 아버지의 등 뒤로 뽀얗게 김이 서립니다.
비행기 떠나간 하늘 언저리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무지개가 오래도록 전설처럼 떠 있을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