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정원 - 헤르만 헤세
어느 날 아침 나는 집을 나와 마음 닿는 대로 가 보았다. 주머니엔 책 한권과 빵 한 조각을 넣어 두었다. 나는 어릴 적에 그랬듯이 먼저 뒤뜰로 달려갔다. 정원엔 아직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아버지가 심은 어리고 가는 전나무는 어느새 키도 자라고 둥치도 굵어져 있었다. 전나무 아래로는 연갈색의 침엽수가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그 나무들은 몇 년 전부터는 더이상 자라지 않으면서 늘푸른 자태를 뽐내었다.
그 곁의 좁고 긴 꽃밭에는 어머니가 심은 꽃나무가 늘어선 채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어머니는 매주 일요일이면 그 꽃밭에서 꽃을 한 아름씩 꺾었다. 화단에는 주홍색 꽃이 다발을 이루며 피어 있었는데, 그 꽃의 이름은 '타오르는 사랑'이었다. 어린 꽃나무 줄기에 하트 모양의 붉고 하얀 꽃이 주렁주렁 달린것은 '여자의 마음'이라고 불렀다. 또 어떤 꽃나무는 이름이 '구린내 나는 허영'이었다. 그 근처에는 키 큰 과꽃이 심어져 있었는데, 아직 꽃을 피우지 않았다. 그 사이로 연한 가시가 난 통통한 미나리아재비가 땅바닥을 기어가듯 피어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모양을 한 쇠비름도 있었다. 이 길고 좁다란 꽃밭은 우리가 무척 아끼는 꿈의 정원이었다. 여러 흔치 않는 꽃들이 바투 서서 피어나는 모습이 두 개의 둥근 꽃밭에 피어 있는 장미보다 더 독특하고 사랑스러웠던 것이다.
화단에 햇살이 들고 담쟁이 덩굴 위로 햇빛이 반짝일 때면, 꽃나무들은 제각기 아름다움을 드러내곤 했다. 글라디올러스는 눈부신 색채를 맘껏 뽐냈고, 푸른 헬리오토로프는 마법에 걸린 양 자신의 고통스러운 향기 안에 갇혔다. 줄맨드라미는 체념한 모양으로 축 늘어졌고 매발톱꽃은 까치발로 서서는 종 모양의 네 겹 여름 꽃을 피워 올렸다.
미역취와 파란 협죽초 둘레엔 벌 떼들이 모여들어 시끄럽게 붕붕거렸다. 뚜꺼운 담쟁이덩굴 위에선 작은 갈색 거미들이 이리저리 격렬하게 움직여 댔으며 자라난화 위의 공중에선 잽싸고 변덕스런 나비들이 뚱뚱한 몸통과 유리처럼 반짝이는 날개를 윙윙대며 날고 있었다. 박각시나방이라고 불리는 나비들이었다.
한가로운 휴일이면 나는 꽃 사이를 거닐며 여기저기 피어있는 산형화의 향기를 맡거나 조심스레 꽃받침을 열어 보기도 했다. 그러면 비밀스런 납빛을 띤 꽃의 밑바닥과 엽맥, 암술, 고운 머리카락 같은 선, 투명한 골의 가지런한 질서가 들여다 보였다. 그러다 이따금 구름 낀 아침 하늘을 올려다보노라면 허공에는 사선으로 그어진 선과 솜털같은 구름 조각이 서로 뒤엉킨 채 이상야릇한 분위기를 빚어내곤 했다. 놀라움과 조용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나는 유년의 내게 기쁨을 주었던 낯익은 주변을 둘러보앗다.
작은 정원과 꽃으로 장식된 발코니, 눅눅하고 해가 들지않아 푸른 이끼로 뒤덮인 마당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꽃들은 끊임없이 샘솟던 매력을 잃어 버렸다. 수수하고 밋밋한 정원 한 구석에는 낡은 물통이 수도관을 매단 채 놓여 있었다. 예전에 나는 그곳에 나무로 만든 물레방아를 매놓고 반나절이나 물을 틀어 놓아 아버지를 화나게 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 위에다 둑을 쌓고 수로를 내어 대홍수가 나도록 조장한 것이었다. 이제는 낡아버린 그 물통은 내가 정말로 아끼던 것이었다. 나느 그걸 갖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곤 했다. 지금와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어릴적의 희열이 내 안에서 다시 울려 퍼지는 듯 했다. 그것만이 왠지 서글픈 맛을 느끼게 했다. 그 물통은 이제 더는 샘물도 강물도 나이아가라 폭포도 아니었다.
생각에 잠긴 채 나는 낮은 담장 위로 기어올랐다. 파란 메꽃잎이 바람에 날리면서 얼굴을 간질였다. 나는 꽃잎을 따서 입 속에 넣었다. 이제 산책을 하면서 산발치에 있는 우리가 사는 도시를 내려다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산책을 하는 것도 얼마간 기쁜 일이다. 어릴 때 같았으면 산책 같은 걸 할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내아이는 산책이란걸 하지 않는다. 사내아이가 산속으로 들어갈 때는 도둑이나 기사, 혹은 인디언이 되어 들어간다. 강으로 갈 때면 뗏목꾼이나 어부 혹은 방앗간 짓는 목수가 되어 가는 것이며 초원을 누빌땐 영락없이 나비나 도마뱀을 잡기 위해서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산책이란 것이 어른들이 하는 품위는 있지만 어딘가 지루한 일로 여겨졌다.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지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나 하는 일 같았던 것이다.
손에 들려 있던 파란 메꽃은 금새 시들어 버렸다. 나는 그걸 던져 버리고는 회양목가지를 꺾어 갉아 먹어보았다. 쓴 양념 같은 맛이 났다. 키 큰 금작화가 심어진 철둑 근처에서 초록색 도마뱀 한 마리가 내 발 앞을 날랜 동작으로 미끄러져 지나갔다. 그때 유년 시절 장난기가 내 안에서 다시 눈을 떴다. 나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소리나지 않게 달려가 망을 보다가 마침내 두려움에 떠는 동물을 잡아 따스하게 손에 쥐었다. 나는 도마뱀의 작고 반짝이는 보석같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어릴 적 맛본 사냥의 즐거움이 되살아나는 가운데 도마뱀의 유연하고 힘찬 몸통과 단단한 다리가 내 손가락 사이에서 저항하며 완강히 버티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이내 흥미를 잃어버렸다. 내가 잡은 이 동물을 갖고 뭘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어떤 느낌도 행복감도 없었다. 나는 몸을 굽히고 손을 벌렸다. 도마뱀은 어리둥절한 듯 팔딱이던 숨을 잠시 멈추더니 황급히 풀숲으로 사라져 버렸다. 반짝이는 철로 위로 기차 한 대가 달려와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뒷모습을 눈으로 쫓다가 순간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이곳에는 더이상 내게 참된 기쁨을 주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도 간절히 저 기차를 타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19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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