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想(1) 어느 시골 학교 校長 선생 이야기
1945년 8월 해방 직후 어느 시골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지난 식민지 시대 아무리 시골 농촌이라 하더라고 초등학교 校長선생과 駐在所(오늘의 派出所) 所長만은 주로 일본인이 맡았다. 시골 面長이나 우체국장 같은 자리 - 심지어 郡守나 道知事까지도 - 는 조선인이 맡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學校 校長과 駐在所 所長만은 조선인에게 맡기지 않고 日本人이 직접 맡았다고 하는 사실은 당시 植民地 당국(총독부)이 敎育과 治安 문제를 얼마나 중요시하였는가를 여실히 말해주는 단적인 사례이리라.
解放이 되고 일본인이 철수하던 그 해 9월 쯤 歸國을 며칠 남겨 놓고 있던 일본인 校長선생은 학교 뒤 텃밭에서 무. 배추 등 가을 채소를 심고 있었다. 日政 시대 시골 학교에는 대체로 학교 건물 뒤 켠에 校長 선생의 舍宅이 있고, 그 옆에 채소류 등을 심어 먹을 수 있는 약간의 텃밭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또 농촌 학생들의 農事 실험용으로 학교가 일정한 면적의 부속 田畓도 가지고 있었다(필자가 다닌 西部 慶南 Y국민학교는 약 360평의 실험沓이 있었음). 학생들이 5-6학년 上級生이 되면 누구나 이 실험용 논에서 직접 농사일을 체험하게 하는 교육과정이 있었다. 이 얼마나 농촌에서 요구되는 실용적인 교육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튼 校長선생의 이 채소 심는 광경을 엿보게 된 학교 小使(오늘의 廳夫) 아저씨가 이해가 안 간다는 식으로 물었다. 校長 선생께서는 며칠 후면 곧 고향(일본)으로 돌아가실 텐데 누구 먹으라고 애써 그걸 심고 계시냐고…. 이에 대한 교장 선생의 대답은 이러했다.
채소란 심을 때가 되면 누구라도 심어야지, 꼭 자기가 먹을 수 있어야만 심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나야 떠나지만 일단 심어놓으면 나중에 그 누군가가 이 채소를 먹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더란다. 진정으로 교육자다운 말이다. 멀리 식민지 朝鮮에까지 와서, 그 시골 僻村(벽촌)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학교를 잘 만들어 보겠다고 애쓰다가 國家가 전쟁에 지는 바람에 졸지에 정든 학교를 떠나야만 하는 교장선생의 심정이 어떠했을까는 짐작할만한 일이지만, 그런 가슴 아픔을 堪耐(감내)하면서 그래도 씨 뿌릴 때가 되었다고 하여 학교 텃밭에 가을 채소를 심어 놓고 가겠다는 그 심정, 비록 일본인 校長이라 하더라도 이 얼마나 존경스럽지 않는가?
아마도 그의 심정은 자기가 몸담았던 이 시골 學校가 앞으로 잘 되기를 바라고, 또 자기가 심은 이 채소가 잘 자라서 나중에 자기와 苦樂을 함께 한 朝鮮人 교직원들이 그걸 즐거이 먹을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지 않았을까? 民族이다 植民地다 하는 복잡한 정치적 문제를 떠나, 교육자로서 해야 할 진정한 道理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한 가지 본보기가 아닐까. 敎育이란 민족이다 국가다 하는 울타리(國境)를 넘어 萬人에 대한 참된 人類愛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敎育이란 그 무엇이든 선생이 학생에 대해 模範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 日本 식‘師範敎育’의 참 뜻이 바로 저런 것이로구나 싶었다.
일본 식 師範敎育 문제가 나왔으니 한 가지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다. 1960년대 후반 韓-日 國交가 수립되고 양국 간의 交流가 활발해지면서 한국 國民學校 校長선생의 일본교육 시찰단이 겪은 한 토막 경험담이다. 어느 시골 학교 교장실을 방문했을 때의 얘기인데, 한 겨울임에도 교장실은 난로가 없는 冷房이었다고 한다. 校長선생은 방이 춥다면서 방문객에 대해 매우 겸연쩍어하더란다. 그래 一行 중 한 분이 들어오면서 보니까 敎務室은 난로를 피워 방이 뜨뜻하던데 어떻게 교장실은 이렇게 冷房이냐고 물었단다. 그 때 일본 교장선생의 대답은 이러했단다.
지금 日本 교육 여건이 겨울에 학생들 교실에 난로를 피워 줄 형편이 못 된다는 것, 그래서 학생들이 난로 없이 추위에 떨면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敎務室은 敎師가 계속 사무를 봐야하니까 손이 곱지 않게끔 난로를 피워 줄 수 밖에 없지만, 학생들의 추위에 다소나마 同參한다는 의미에서 교장실이라도 난로 없이 냉방으로 지내기로 했다는 것,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고 한다.
한국에도 이런 일본 校長 같은 분이 줄잡아 백 명 정도만 있었더라도 한국교육이 오늘처럼 이렇게 墮落(타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더욱이 全敎組인가 하는 곳에서 남의 집 귀한 자식을 볼모로 자신의 政治(理念)투쟁을 일삼고 있는 등의 비교육적 현상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오늘의 한국교육이 政權이 바뀔 때마다 敎育改革 한답시고 무슨 委員會를 만들고 法을 고치고 거기다가 大學 入試制度를 뜯어고치는 등 온갖 부산을 떨어도 매양 도로아미타불인 것은 그 이유가 어디 있을까. 아마도 初/中等 각급 학교의 校長선생이 주어진 자기 所任을 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옛날 어느 시골 학교 일본인 校長선생의 한 토막 에피소드를 여기 꺼내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데 있다. (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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