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란 무엇인가?
"은혜로 죄사함 받는다"(엡 1:7)는 말씀과 "죄가 있는 곳에 은혜도 있다"(롬 5:20)는 말씀이 곡해되고 있다. 혹이 "큰 죄를 지으면 더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죄를 아무리 지어도 죽기 전에 회개만 하면 천국에 간다"고 한다. "다윗은 살인하고 간음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그를 내 마음에 합한자라 하셨다"고 가르친다."은혜로 구원 받는다"(행 15:11, 딛 2:11)는 말씀과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롬 11:6)는 말씀이 오용되고 있다. 혹이 "예수 믿고 교회만 나오면 천국에 간다"고 한다. "구원 받기 위하여 은혜만 받으면 되지 율법을 따라 살 필요는 없다"고 한다. 그들은 믿는 자를 교인, 신자, 제자로 구분한다.나도 죄인이고 너도 죄인인데 누구를 탓하느냐고 한다. 모두가 똑 같이 되자는 말이다. 두 사람이 서로 욕을 하고 치고받고 싸움을 하여도 교회는 서로 사랑하고 은혜스러워야 한다고만 말한다. 이것을 보고만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냉담이다. 교회 안에 죄가 있으면 결코 은혜스러울 수가 없다."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은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John MacAthur 목사님의 What Is Grace?란 글을 소개한다.
몇 십년 전에 Dietrich Bonhoeffer는 그 당시의 기독교 신앙을 "값싼 은혜(cheap grace)"란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이 은혜는 실제로 자기본위의 은혜요, 가짜의 은혜요, 그리고 그 댓가가 엄청나게 비싼 것입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God's grace)와 전혀 관련이 없는 하나의 하찮은 짝퉁입니다. 그것은 가격이 아니라 값어치가 없는 값싼 은혜입니다. 그것은 싸구려의 손상된 상품이며, 물이 든, 좀이 먹은, 고물의 은혜입니다. 그것은 Martin Luther의 시대에 로만 가톨릭의 면죄부를 생각나게하는 인간이 만든 은혜입니다. 그 가격은 실제로 그것을 사는 사람이 상상도 할 수 없이 비싸지만, 그 "은혜(grace)"는 전혀 무가치합니다.Bonhoeffer는 독일의 루터란 교회의 목사였으며 나치에 대한 저항자였습니다. 그는 그가 남긴 글들이 알려지기도 전에 1945년 나치 SS guard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Bonhoeffer는 교회의 세속화에 저항하는 강력한 발언을 하였습니다. 그는 은혜에 대한 교회의 경솔한 태도의 위험성을 정확하게 분석하였습니다. 우리는 Bonhoeffer의 값싼 은혜에 대한 통렬한 비난에 유의하여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값싼 은혜는 하나의 교리요, 원리요, 제도로서의 은혜입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용서를 보편적인 진리로서 선언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에 대한 크리스찬의 "개념(conception)"로서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착상에 대한 지적인 동의를 하는 것이 죄에 대한 면제의 보장으로 충분하다고 합니다. 마땅히 은혜에 대한 명확한 교리를 유지하여야 할 교회가 사실상 이 은혜로 부터 이탈하였습니다.
이러한 교회안에서 세상은 죄에 대한, 통회가 필요하지 않고 죄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이 없는, 값싼 덮개를 찾았습니다.
그러므로 값싼 은혜는 결국 하나님 말씀의 강생(the incarnation of the Word of God)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값싼 은혜는 죄인이 의롭다고 인정됨이 없이 죄를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은혜가 스스로 모든 일을 하므로, 모든 것이 전에 있었던 것처럼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속죄할 수 없다(All for sin could not atone)." 세상은 옛날과 같이 돌아가고 있으며, Luther가 말한 것처럼 "최상의 삶을 살아도" 우리는 여전히 죄인들입니다. 과연 은혜가 이런 것이라면 크리스찬들도 세상 사람들처럼 살게 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 세상의 표준으로 자신의 모범이 되게하며, 그리고 죄에 얽매인 옛 삶으로 부터 벗어나 은혜 안의 새로운 삶을 살기를 주제넘게 갈망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The Cost of Discipleship)Bonhoeffer가 값싼 은혜에 대한 글을 쓴 후에도 이 은혜에 대한 전 세계의 호응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값싼 은혜는 복음적인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격찬할 뿐만 아니라, 아예 짝퉁을 진품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런 먹이를 바꿔치기하는 술책으로 많은 진실한 크리스찬들이 혼동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전문적인 교역자들이 은혜로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딛 2:12)라고 하신 복음적인 진리를 철저히 무시한다. 그 대신에 그들은 은혜를 마치 아무런 제약이 없는 "구속으로 부터의 자유(get out of jail Free)"를 보장하는 초자연적인 힘, 열려진 특별 사면, 인정, 관대, 참음, 자비, 너그러움, 면제, 승인, 아량, 그리고 어떤 도덕적인 요구사항과도 결별한 자기보상의 특혜인 것처럼 그렇게 살고 있다. 마음 아프게도 어떤 교역자들이 은혜에 대한 비 성경적인 견해를 더욱 고정시켰다.
어떤 신학자들이 은혜에 대한 오류를 마치 은혜에 대한 바른 이해인 것처럼 정당화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은혜 신학(grace theology)"으로, 그리고 그들의 운동을 "은혜 운동(The Grace Movement)"이라고 한다.그들은 "은혜"를 믿는 자의 상태에는 영향을 주지 않고 그의 신분을 바꾸는 것이라고 선전한다. 이 은혜는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부르기만하지 죄인이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surrender)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실 그들은(no-lordship theologians) 죄인이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은 행위이지 은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더 많이 자신을 내어 주면 줄수록 그만큼 은혜는 은혜가 아니라고 한다. 이것은 분명히 딛 2:11-12 말씀의 은혜가 아니다.그리스도인들이 혼동하는 것이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교회들이 세상의 거울이 되었으며, 교회의 지도자들이 세상 문화를 따르고, 신학자들이 세상을 공인하고 있다. 바닥까지 내려 간 통탄할 수 밖에 없는 지경이다.은혜가 무엇입니까란 단순한 질문으로 시작하여 은혜에 대한 성경적인 진리를 찾아야 한다.은혜라는 단어를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은혜를 간명하게 말하기도 어렵다. 어떤 이가 Grace에 대한 약성어를 만들었다. GRACE is God's Riches At Christ's Expense(은혜는 그리스도가 지불한 하나님의 부요함이다). 그렇게 나쁜 표현은 아니지만 은혜에 대한 신학적인 정의로는 충분하지 못하다.은혜에 대한 다른 잘 알려진 정의는 "하나님의 과분한 호의이다(God's unmerited favor)."라는 표현이다. A.W. Tozer는, "은혜는 아무 것도 받을 만한 것이 없는 죄인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호의이다"라고 하였다. Berkhof는 더 나아가서 은혜는 "인간의 마음 속에 성령님을 통하여 작용하는 하나님의 과분한 효력이다."고 하였다. 은혜는 단순한 과분한 호의가 아니라, 저주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에게 주어지는 호의이다.
낯선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은 "과분한 호의"이다, 그리고 원수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성령의 은혜이다(눅 6:27-36).은혜는 잠자거나 추상적인 그런 속성이 아니라, 힘이 있고 활동적이며 실용적인 원리이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딛 2:11-12). 은혜는 우리가 체험할 때까지는 알 수 없는 어떤 영묘한 축복이 아니다. 은혜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창의(sovereign initiative)다(엡 1:1-6).은혜는 그리스도인이 단지 한번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은혜 안에 서 있다(롬 5:2). 그리스도인의 전적인 삶이 은혜에 의하여 움직이고 힘을 얻게 된다.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히 13:9). 사도 베드로는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 3:18)고 하였다.그러므로 은혜는 아무 것도 받을 만한 것이 없는 죄인의 삶에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편견이 없으시고 자비로우신 감화이다(Thus we could properly define grace as the free and benevolent influence of a holy God operating sovereignly in the lives of undeserving sinners).
사도 바울은 자주 은혜를 율법과 대조하였다(롬 4:16; 5:20; 6:14-15; 갈 2:21; 5:4). 그러나 바울은 은혜가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도덕적인 윤리를 폐하는 것이 아님을 조심스럽게 진술하였다. 오히려 은혜는 율법의 의를 완성하는 것이다(롬 6:14-15). 은혜는 율법의 의를 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다(롬 3:31)은혜는 그 자체의 법이며 , 더 높은 수준의 자유로운 법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참조 약 1:25). 이 새로운 법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자유롭게 한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명시하였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은혜는 의로 통치하는 것이다(롬 5:21).이것이 복음의 기쁜 소식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로 부터 자유롭게 하셨다. 단지 죄값만 갚으신 것이 아니라 죄와 그 권세로 부터 자유롭게 하신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가 유혹을 알지 못할 것이고, 방황하지 않고, 말에 실수가 없으며, 거짓된 동기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죄책과 그 부끄러움이 사라지고, 그리고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그 동안에도, 우리는 죄의 잔인한 힘과 모욕적인 권세로 부터 해방되었음을 즐길 수 있다. 하나님이 은혜를 통하여서 우리들이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 수"(딛 2:12) 있도록 하셨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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