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김요한목사

이스라엘이 구원받지 못한 원인이 무엇인가?

Joyfule 2024. 5. 9. 18:57

 

이스라엘이 구원받지 못한 원인이 무엇인가?(롬11:6-8)

 

 세상의 종교와 기독교가 서로 다른 점은 성취와 받음(receiving)의 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루신 그 사실을 듣고

믿고 수용하므로 성령의 보증에 의해 내 것이 되는 신기한 매커니즘입니다.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신 사실을 그 은혜로 말미암아 듣고 믿으므로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2:5-8)

그렇지만 세상의 모든 종교와 교육은 스스로 성취(achieving)하라고 가르칩니다.

선악과의 독성을 가진 인간은 선악만 보이기 때문에 비록 그리스도 안에

부름을 받아 믿음으로 의를 얻었다고는 고백하지만 이 관습이 오랫동안 남아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지 않으므로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가 거슬리게 되어 원수가 되고 맙니다(빌3:18)

십자가를 지라는 가르침으로 그 십자가를 수용하는 믿음에서 빗나가고 마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미 이룩하신 그 사실을 믿음으로 수용하고 따르는 겁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행위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수용한 다음의 일입니다.

 

Q. 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지 못했나요?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롬11:6-7)

 

A.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남은 자들이란 행위에 의해 생성되고 소멸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행위에 의해 그의 사명이 취소되는 일도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비록 혼이 나는 고난은 겪을지언정 결코 하나님의 버림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얻고자 하는 구원을 이스라엘은 끝내 얻지 못했습니다.

다만 소수의 선택된 남은 자들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을 뿐입니다.

그 외엔 다 우둔한 영적인 멍청이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헛 똑똑이들입니다.

 

이런 역사는 이 시대의 기독교의 거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찌 그리 우둔한 주의 종들이 많은지 하나님의 청함을 받긴 했지만

택함을 받지 못해 예복을 입지 않고 천국잔치에 입장하려 드는 무리가 많습니다.

지금도 바깥 어두운데 내어 쫓겨 슬피 울며 이를 갈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마22:13)

과거 달나라에 착륙할 때에 우주인들이 입은 우주복은 21겹으로 만들어져

진공상태에서도 활동하고 대 소변까지 해결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는데

그 가격이 자그마치 100억이나 되었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랐습니다.

달나라에 잠깐 머물면서 돌아다니다가 지구로 돌아오는 우주복이 100억이라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입은 이 옷은(갈3:27)

도대체 값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자 그만 두 눈에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말았습니다.

이 예복으로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 그 영광을 보는데 우주복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거기다가 그리스도의 보혈과 십자가의 말씀으로 이 예복을 빨아 입고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거룩한 성의 문을 통해 당당히 들어갈 수 있는 있습니다(계22:14)

이 예복은 우리의 스스로의 의로운 행위로 껴입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수용하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입혀지는 의의 옷입니다. 나의 행위의 옷이 아닙니다.

 

Q. 이스라엘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원인이 뭔가요?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롬11:9)

 

A. 이방인을 구원하여 온 이스라엘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주님도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자랑하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하나님께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하신다고도 말씀하십니다(마13:14-15)
그래서 그들에게 지금도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귀를 주신 겁니다.

혼미한 영이란 한 밤중에 잠자는 영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푹 자고 있습니다.

보지 못할 눈, 듣지 못할 귀는 설교만 시작하면 자고 설교가 끝나면 깨는 것과 같죠.

행위나 축복의 어휘만 뇌 속에 가득해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수용이 안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 영혼의 고통과 주림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택한 백성들 곧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거나 들리지 않으면 안절부절 하게 됩니다. 어쩔 줄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소식이 없거나 음성은 희미하게 들리기는 하는데

그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음에도 잠자코 가만히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현대교회가 이렇게 되어가는 것도 성경말씀이 성취되어 가는 겁니다.

이성적인 말은 잘 알아들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만 나오면 졸리는 현상입니다.

우스운 말로 영적인 팔자입니다. 겉으로 볼 땐 하나님의 은혜가 복불복인 것 같습니다.

사실 혼미한 심령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감각한 사람도 그 쪽으로는 선택이 된

사람들이죠.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에 맹인이나 귀머거리 역도 있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이 오늘 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육신의 유대인이며

자칭 유대인(계3:9) 곧 자칭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는 모임들이 많은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