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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반민특위 방해했다? (지만원)

Joyfule 2020. 6. 10. 08:25

이승만이 반민특위 방해했다? (지만원)


좌익들은 역사를 분석적 시각으로 배울 기회가 없었던 대부분의 국민에게 “해방전후사의인식”이라는 좌익서적 내용을 선전하고 있다. 좌익들은 이승만이 나쁜 사람, 김구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선전한다. 요사이 TV에는 시시각각 검은 테를 쓴 음흉해 보이는 김구의 얼굴을 억지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승만이 왜 나쁘냐” 이렇게 물으면 거의 자동적으로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해 설립된 빈민특위(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을 방해하여 친일파 청산을 못하게 했지 않느냐”, 이렇게 대답한다.

이에 대해 필자는 아래와 같이 시정해 준다.


아 래

해방직전부터 한국사회는 빨갱이들의 세상이 되었다. 1945년 일본 천황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포하자 그 다음날인 8.16일에 공산당 여운형이 '건준'(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어 일본총독부로부터 치안과 행정권을 이양받으려 했고, 이어서 9.6일에는 또 다른 공산당 박헌영이 ‘인공’(“조선인민공화국)을 급조했고, 무법천지에 있던 조선 땅은 인민위원회 세상이 되었다.

1945.9.8일 소련보다 뒤늦게 들어온 군정이 들어오자 총독부(중앙청)에 걸렸던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올라갔고, 한국사정을 모르는 미군정은 많은 자문관과 통역관을 필요로 하였다. 미군과 말이 통하는 사람들은 자연 외국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들이며 이들은 대부분 일본인들과도 친분이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해방공간은 그야말로 빨치산 전성시대요 피비린내나는 폭력의 계절이었다. 1946.10.1. 대구 폭동사건, 4.3사건, 여수-순천반란사건 등. . 공산당들은 그야말로 무지비한 폭동을 일으켰으며, 이를 수색하고 토벌하는 군경은 농사꾼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일본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일본 군경에서 훈련을 쌓은 사람들이어야 했다.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조선 백성에 악행을 했던 친일파에 대한 국민의 원성은 대단했고, 이에 부응하기 위해 1949년1월8일 반민특위가 형성되었으나, 반민특위에는 활동력이 뛰어난 공산당들이 대거 먼저 들어가 본래의 목적을 이탈해 이승만이 하는 일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같은 민족을 괴롭혔던 사람들은 청산돼야 하지만, 반민특위 내의 공산당들은 36년간 일본국 시민으로 살아오면서 일본에 동화하여 살아온 사람들까지 친일파로 매도하는 등 이승만 정권의 핵심 인사들을 물고 늘어졌다.

드디어 1949년 3월, 남로당국회프락치사건이 발생했다. 제헌국회 내의 빨갱이들이 민족자결주의의 이름 아래 외국군대철수안(김구안) ·남북통일협상안 등 공산당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주장을 한 것이다. 당시 국회부의장 김약수 등 13명이 1949년 4월 말∼8월 중순까지 3차에 걸쳐 검거됐다. 수사결과 관련 의원들은 남로당 특수공작원인 이삼혁 ·이재남 ·김사필 ·정재한, 남로당 중앙간부 박시현 등과 접선을 하고 있었다. 검찰이 제시한 증거로는 정재한이 월북한 박헌영에게 보내는 보고서인 국회 내 남로당 의원의 프락치 비밀공작보고가 담긴 암호문서였다.

같은 해 6월 19일부터는 헌병사령부에 국회프락치사건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되었고, 1950년 2월 10일, 13명 전원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최고 징역 12년형에서 최하 2년형까지 선고하였다. 1949.6·6. 경찰은 빨갱이 조직으로 되어 버린 반민특위를 습격하였고, 동년 9.22일, 반민특위의 폐기법안으로 완전폐지 되었다.

9개월 동안 반민특위는 조사할만큼 했다. 총 조사 건수 682건, 특별검찰부 기소 280건, 영장발부 408건, 검거 305건, 특별검찰재판부 송치 570건, 재판종결 40건, 실형언도 12건이었다. 이로써 일단 좌익들이 주도했던 반민특위는 9개월간의 활동을 통해 일단 친일파를 청산한 셈이다.

지금은 정통역사가 좌익역사로 바뀌는 시점이다. 예전의 대법원이 선고한 것을 지금의 법원이 뒤집는 선고를 한다. 헌법에는 일사부재리 원칙이 명시돼 있다. 예전의 충신이 지금은 역적이 된다. 이 두 개의 현상은 국가가 적에게 찬탈됐을 때에만 있을 수 있는 현상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빼앗긴 상태다.

이와 유사하게 당시의 시대 상황은 공산당-빨치산들이 쉴 새 없이 폭동을 일으키고, 김일성과 연대하여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다급한 시대였다. 빈민특위는 친일파 청산을 위해 결성되었지만 그 안에는 공산당들이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이들 공산당들은 친일파 청산이라는 좋은 명분을 이승만의 다리를 잡는데 악용해 왔다. 반민특위는 지금의 과거사위처럼 빨갱이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물과 사건은 시대의 산물이다. 당시의 역사를 시스템 시각에서 보면 이승만이 친일파 청산을 방해한 것이 아니라 빨갱이들이 친일파 청산을 내걸고 이승만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당시의 사회는 빨갱이를 잡는 것이 급선무였지 친일파 청산이 급했던 시대가 아니었다.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바로 빨갱이들이 너무나 극성을 부리며 폭동과 반란을 연속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악랄했기에 대통령인 이승만과 경무국장인 조병옥까지도 공포를 느꼈을까? 그래 놓고 지금의 빨갱이들은 자기들의 조상이 지은 죄를 이승만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공간의 약사 

1945.9.8: 미군정 인천항 입성
1945.10.16 :이승만 귀국
1946년10.1 : 대구폭동(공산당 배후 조종 경찰 학살),
1948.4.3: 제주4.3사건 발생(공산당 주동, 군경 및 양민 학살)
1948.10.17: 여수.순천 공산당 반란사건
948.8.15: 유인총회에서 대한민국만 한반도내 합법적 정부 승인
1948.9.9: 북한 공산정권수립
1949. 1.8: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 발족.
1949.5 20: 남로당 국회프락치사건 적발.
1949.6.25: 북한, 남북의 ‘민족전선’을 통합,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
1949.6.29, 김구 피살
1949.9.22: 반민특위 해산
1950.6.25: 6.25전쟁발발(북한선제공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