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관 자료 ━━/추천도서

7.경제개발계획 수립되다

Joyfule 2020. 6. 10. 08:21

7.경제개발계획 수립되다

 

경제문제를 논할 때 흔히 빠지는 함정이 박정희 시절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여 우리나라가 산업화, 근대화가 시작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다. 박정희 시절 산업화, 근대화의 싹은 그 전 시대인 이승만, 장면 정부 시절에 이미 그 씨앗이 심어져 있었기에 가능했다. 건국 지도자 이승만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너무 부족한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경제 리더십, 1950년대의 우리 경제, 산업현황 등을 조명하는 특집을 연재한다. 이 글은 '전경련 40년사' 도입부에 소개된 것이다.

월간조선

 

위대한 지도자 이승만의 경제 리더십(7)

 

경제개발계획 수립

 

지금까지의 상식에 의하면 경제개발계획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쿠데타 직후 수립하여 성공을 거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상은 이승만 시절에 이미 경제개발계획이 수립되어 있던 것을 박정희 정권이 이어받아 꽃을 피운 것이다. 따라서 이승만 시대의 경제적 조망에 있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그 어려운 시절에 ‘대한민국의 상징’이랄 수 있는 경제개발계획의 기초가 짜여졌다는 점을 관찰하는 일이다.

 

우리 나라에서 본격적인 경제개발계획은 6․25와 더불어 처음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 시초는 흔히 ‘네이산 보고서’로 알려진 한국경제재건 5개년 계획이었다. 한국의 경제발전을 농업발전으로부터 시동을 건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이 계획은 우리 나라의 많은 정부 관료들로부터 이의 제기가 있어 시행되지 못했다.

 

다음으로 등장한 안이 1953년 7월의 ‘타스카 3개년 대한(對韓) 원조계획’이다. 타스카 프로젝트는 미국의 대한(對韓) 경제원조 사용지침으로 한국 정부에 건의된 것으로서 미국 원조당국이 원조자금을 가지고 한국 경제의 재건과 부흥방 침을 세워 원조자금을 배분하고 집행하기 위한 성격이 짙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1954년부터 3년 동안 8억8300만 달러의 원조를 투입, 한국 경제를 전쟁 전 수준으로 복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정부는 1957년, 부흥부 산하에 산업개발위원회(Economic Development Committee)를 설치하고 이곳에 국내 유수의 관료와 학자, 언론인, 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신진기예를 총동원하여 경제개발계획을 입안하도록 했다.

 

산업개발위원회가 태동된 계기는 우리 나 관료들이 세계은행 부속기관인 경제개발연구원(EDI:Economic Development Institute)에 연수를 가서 국가적 차원의 경제개발계획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당시 EDI는 아더 루이스의 ‘경제성장론’, 틴버겐의 ‘개발설계론’과 같은 전문서적을 텍스트로 하여 개발도상에 있는 국가들이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어떤 정책적 수단이 필요한가를 강의했다.

 

한국인으로서 가장 먼저 EDI 연수를 다녀온 사람이 송인상 효성 고문이었다. 1956년 EDI 연수를 받은 송인상 고문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EDI 연수에서는 인도와 같이 중앙 정부와 주 정부가 중심이 되어 엄격하게 짜여진 5개년 계획에 따라 장기개발계획을 추진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브라질처럼 일정한 계획 없이 예산에 맞춰 그때그때 경제개발을 추진하는 것이 좋은지를 주제로 삼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송인상 고문은 우리 나라와 같은 후진 개발도상국에서는 정부 주도하의 강력한 경제개발계획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1)

 

경제개발 입안 부서인 산업개발위원회의 태동은 1958년에 시작됐다. 그 해 9월, 당시 부흥부장관이었던 송인상씨는 부흥부의 김태동(金泰東) 조정국장, 재무부의 이한빈(李漢彬) 예산국장을 대동하고 미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덜레스 장관은 마침 중국과 대만간에 대만해협의 금문도(金門島), 마조도(馬租島) 사건으로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고조되어 대만에 체류중이이어서 한국 방문단은 크리스천 허터 차관을 예방했다.

 

허터 차관은 2차대전 종전 직후 미국이 유럽에 소나기식 원조를 퍼부어 독일,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의 전후 복구와 경제부흥을 성공시킨 마샬 플랜의 입안자였다. 그 자리에서 한국 대표단은 허터 차관에게 한국적 상황에서는 장기 경제개발계획 수립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한국은 부존(賦存)자원은 물론, 기술과 자본 등 모든 것이 부족한 전형적인 후진국이다. 대신 우리는 높은 교육수준을 자랑하는 인력자원이 있으니 이를 적당히 활용하면 경제발전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또 제한된 자원의 배분과, 정책수단의 결정, 계획의 효율성과 실천력을 높이기 위해 한국경제의 현황이 정확히 분석․파악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기 경제개발계획이 필요하다.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은 사회주의 국가인 인도식 계획이 아니라 인디커티브 플랜(Indicative Plan)을 지향할 것이다. 즉 민간기업을 최대한 참여시켜 그들의 역량을 활용하는 데 우선 순위를 두되, 기술적으로나 자금력에서 민간이 할 수 없는 분야나 민간이 투자를 꺼리는 부문은 정부가 담당하겠다.

 

이런 분야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민간에 불하하는 방식의 개발계획 을 수립, 실천하고자 한다. 아울러 후진국일수록 국민들에게 경제계획을 완수했을 때의 비전을 제시하고,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어 국민을 고무(鼓舞)하고, 참여를 유도하는 계획이 필요하다.“

 

이러한 논리로 설득을 거듭한 끝에 허터 차관으로부터 한국이 미국 원조자금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우리 나라가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는 데 이처럼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했던 이유는 당시 미국 관리들이 제3세계 국가들이 추진하는 경제개발계획에 대해 좋지 않은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2차대전 終戰(중전) 후에 인도, 파키스탄, 터키 등 여러 나라에 대규모 원조를 제공했지만, 결국 미국의 손에서 벗어났다. 미국이 대외원조에서 성공한 유일무이한 나라가 한국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때문에 우리 정부 관리들이 경제개발의 필요성을 제기할 때마다 미국은 “한국도 사회주의식 경제개발을 하여 다른 길로 나가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졌다. 때문에 정부 관리들은 허터 차관을 비롯해 미국 관계자들에게 “우리는 인도식의 사회주의 경제계획은 절대 안 한다”는 약속을 해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1958년에 부흥부 산하에 산업개발 위원회가 설치됐다. 그런데 위원회 명칭 선정 과정에서 다른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는 ‘Economic Development Committee'를 번역해 「경제개발위원회」라고 했는데, 김현철(金顯哲) 재무장관이 “경제개발위원회라고 하면 모든 경제분야를 망라하는 것이 된다”고 이의를 제기하여 ’산업개발위원회‘라 고치는 대신 영문은 ’Economic Development Committee‘를 그냥 쓰기로 했다.

 

산업개발위원회의 설치 목적은 ‘1958년도의 미국의 대외원조정책의 변경에 의해 그 전의 공여식 원조가 차관원조로 전환됨에 따라 피원조국의 경제자립을 위한 시책으로 후진적인 경제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긴요하므로 한국의 특수한 경제여건에 입각하여 경제정책을 총체적으로 심의하고 그 중추적인 건의기관으로 이 위원회를 설치한다’고 되어 있다.

 

또 위원회의 기능은 ‘▲한국의 현재적(顯在的), 잠재적인 인적․물적 자본적 자원의 평가와 사정 ▲한국의 제반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 가장 적당한 경제구조를 수립하기 위해 긴급하고 유망한 경제개발방법 심의 ▲한국의 제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이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중점적인 시책과 경제정책을 심의․결정하는 한편 이에 대한 연차계획의 수립에 있어 주도적인 건의를 한다’고 되어 있었다.

 

부흥부장관 자문기관으로 설치된 산업개발위원회는 원화 예산으로 7600만원, ICA 자금에서 12만5000 달러의 재원을 마련했고 대통령령으로 산업개발위원회 규정이 공포되었다. 그리하여 산업개발위원회 위원으로 박동묘(朴東昴ㆍ후에 농림부장관), 주원(朱源ㆍ후에 건살부장관), 아면석(李冕錫ㆍ후에 조흥은행장), 황병준(黃炳晙ㆍ후에 국회의원), 안림(安霖ㆍ후에 성균관대 교수)씨 등 22명이 임명됐다.

 

이러한 위원 외에 보좌요원, 촉탁, 고문 등 각계 각층에서 젊고 유능한 인재와 외국 유학에서 돌아온 신진기예가 총동원됐다. 젊고 유능한 학자와 전문가들이 외국에서 배운 선진 학문과 전문적 이론을 동원하여 가장 빠른 시기에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또 미국 오리건 대학의 교수 5명이 계획 수립에 참여하여 도움을 주기도 했다.

 

장기 개발계획 모델을 작성하려면 산업연관분석표(IOT:Input Output Table) 작성이 가장 중요하다. 예를 들어 철강공장을 짓는 데 예산이 얼마가 들고, 전후방 연관산업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분석해야 한다. 이 산업연관분석표를 가지고 한국경제 전반을 들여다 본 후 어느 분야에 우선 순위를 둘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한국의 경제 상황에서 이런 분야에 대한 지식이나 통계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 나라의 전반적 수준이 그 정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산업연관분석표는 1960년대 초에 가서야 한국은행 조사부가 온갖 노력 끝에 작성, 발표하게 된다.

 

이승만 정부가 산업개발위원회에 어느 정도 기대를 걸었는가는 소속 위원들의 대우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부흥부장관 월급이 4만2000환이었는데, 산업개발위원회 위원들에게는 사명감을 갖고 일하라는 취지에서 장관보다 월급이 네 배나 많은 18만원으로 책정했다. 또 고문단이 한 번 회의를 열 때마다 5000환씩을 제공할 정도로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

 

위원들이 작업 진행 과정에서 가장 예측이 어려운 것이 국방 수요였다. 국방비 지출의 장기 소요 예측을 위해 국방부에 인력 파견을 요청하여 임원택(林元澤) 중령(후에 서울대 교수), 신상철(申尙徹) 중령(후에 KOTRA 이사)이 작업에 참여했지만 수요 예측이나 통계, 지수가 제대로 잡히지 않아 애를 먹어야 했다.

 

위원들은 처음엔 7개년 계획을 예상했는데 경제개발계획을 세워 본 경험도 없고, 미래 예측지수도 불투명해서 중간에 목표를 수정했다. 그리하여 7개년 계획을 목표로 하되, 우선 1단계를 3개년으로 하여 2단계 작업을 진행한 것이다. 비교적 쉽게 수요 예측을 해서 우선 3개년 계획을 작성하고, 그것을 시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살려 통계 미비에서 오는 오차를 고쳐 나가자고 생각한 것이다.

 

수많은 노력과 시행착오 끝에 드디어 1960년 4월15일, 역사적인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1960년부터 1962년까지를 계획연도로 설정, 경제개발 이론에 따른 계량적 계획방식을 도입한 우리 나라 경제개발계획의 효시였다.

 

이 계획은 목표를 ‘과소(過小)생산의 해결’에 두고 중점사업을 선정, 1960년부터 62년까지 GNP 성장률을 5.2%로 책정했다. 이 같은 성장률은 1953년부터 1958년까지의 경제 성장의 반영이었다. 부문별 성장률은 1차산업이 연평균 3.8%, 2차산업 11.2%, 3차산업 3.7%로 계획되었다.(2)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재원(財源)으로 내자(內資) 6393억환(1955년 불변가격)과 8660만 달러의 외자도입이 필요할 것으로 전망했다. 내자 7393억환은 정부부문 53%, 민간부문 47%로 구성해 정부 예산을 통한 자본형성에 역점을 두면서 민간부문은 저축률 13.8%로 끌어올려 투자재원을 충당토록 했다. 계획기간중 외자 8660만 달러는 외부 원조가 15% 감축될 것으로 예상해 짜여진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이 통과된 지 나흘 후 4ㆍ19가 터지는 바람에 이 계획은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이 안이 5․16 직후 부흥부에서 일하던 관리들에 의해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으로 승계된 것이다.

 

1950년대 말에 산업개발위원회가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지 않았다면 우리 정부 테크노크라트들의 훈련이 늦어졌을 것이고, 경제성장도 그만큼 지연됐을 것이다. 그 어려운 시절에 우리가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축적한 경험과 지식이 박정희 시절에 추진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큰 영향을 주었고, 그 때 외국에 유학을 보낸 인재들이 속속 귀국하여 경제개발계획 실행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말하자면 이승만 시절에 뿌린 씨앗이 박정희 시절에 꽃을 활짝 피운 것이다.

 

당시 이승만 정부의 정책 입안자들은 처음 경제개발의 씨앗을 뿌릴 때 그것이 어느 정도 결실을 거둘 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 경제가 나가야 할 방향과 방법을 명확히 제시했고, 그 기본이 되는 프로그램을 완성했다. 이런 점에서 산업개발위원회의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은 재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이승만 정부 시절의 경제 테크노크라트들은 박정희 정부 시절 또 한번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참여하게 된다. 송인상씨는 4ㆍ19 당시에 재무부장관이었는데 당시 국무위원들이 3․15 부정선거에 관여했다 하여 체포 투옥되었다가 1963년 5월에 석방됐다. 그 후 1965년 7월부터 1974년 3월까지 한국경제개발협회 회장직을 맡았는데, 여기서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의 기본 틀을 수립하는 작업에 참여한 것이다.

 

3차 5개년 계획은 미국의 아델만 교수가 기본 골격을 만든 것을 토대로 한국경제개발협회가 정부 용역을 받아 전체 플랜을 수립했다. 이 작업에 참여했던 성기수 박사는 3차 5개년 계획의 수치 계산을 위해 일본 이토추상사에 가서 컴퓨터 작업을 하여 작업을 도왔다. 그 과정에서 성박사는 컴퓨터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고, KIST의 초대 컴퓨터연구실장을 지내는 등 한국 컴퓨터 분야의 선구자가 됐다. 3차 5개년 계획을 수립할 무렵에는 경제기획원 담당자들이 경제개발에는 선수 소릴 들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올라가 있었다고 한다.

 

기업가 전성시대

 

1956년 정부는 마지막 귀속재산인 은행주를 불하했다. 그 시절 축적된 민족자본이 극히 미미했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는 투자재원의 조달에 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정부는 기업가들이 은행을 주축으로 하는 근대적 콘체른을 형성, 전후복구와 산업 근대화를 앞당기자는 착상에서 은행주 불하를 단행한 것이다.

 

은행 귀속주의 제1차 공매는 2년 전인 1954년 11월에 실시됐으나 계속 유찰돼 1956년 3월에 입찰조건을 완화하여 다시 실시한 것이다. 각 분야에서 거부(巨富)를 축적한 기업가들의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그 결과 한빛은행(구 한일은행)의 전신인 흥업은행은 이병철 회장이 전체 주식의 85%를 인수하여 삼성에 불하됐다.

 

제일은행의 전신인 저축은행은 삼호방직의 정재호 회장에게, 조흥은행은 주식의 50%가 이병철 회장에게, 한빛은행으로 통합된 상업은행은 대한제분의 이한원 회장에게 넘어갔다. 대한양회의 이정림 회장은 1959년에 발족한 서울은행을 창업했다.

 

기업가들이 은행을 차지함으로써 손쉽게 투자자금 조달이 가능해졌으나 한편에선 은행이 기업들의 사(私)금고로 전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업들은 필요할 때마다 은행에서 돈을 가져다 기업 운영에 투입했다. 그 결과 일반인이나 중소기업은 은행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사채나 고리대금에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3)

 

여러 가지 모순에도 불구하고 투자 자금 동원 수단이 마련됐고, 전후복구로 인해 건설자재와 전력이 미흡하나마 정상 공급되었다. 국가 기간산업이 제자리를 잡아갔고 상업자본이 산업자본화의 길을 걸으면서 기업들은 각 분야에서 제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근대적 의미의 기업들이 태동하여 한국의 시장경제 체제의 하부구조를 담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산업질서의 재편과정은 수백 년 유교사상의 질긴 뿌리로 남아 있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를 하루아침에 뒤엎는 결과를 야기했다. 이제는 공상(工商)이 사농(士農)을 압도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것은 곧 기업가 혁명이었다.

 

한편에선 경제개발계획 수립 등 경제개발을 담당할 엘리트 집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고난을 겪는 과정에서 관리능력이 급속히 향상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국가 차원에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추진할 관리 집단과 기업가 집단이 생겨난 것이다.

 

기업들이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던 1958년 이병철 회장은 한국경제재건연구소란 단체를 만들었다. 이 단체는 이병철 회장이 소장을 맡았고 홍성하씨가 간사장, 그리고 이기붕, 김영선, 김유택, 임문환, 주요한, 송방용씨를 비롯한 정치 경제 학계 중진들이 거의 빠짐없이 참여하여 한국 경제의 앞날을 놓고 진지한 의견을 나누었다. 지도층 인사들은 틈만 나면 한 자리에 모여 이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정립하고, 구체적인 청사진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병철 회장은 한국경제재건연구소 설립 목적에 대해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외국 원조 없이 지탱할 수 있는 한국 경제의 재건, 자립방안을 토의했다. 이때 나는 이미 사업에 종사하는 한 기업인의 입장을 넘어 이 나라 경제 전체의 장래를 걱정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러나 국가 경제정책의 방향이 모호하고 경제 전망이 불투명하여 우울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 연구소 운영의 소득이라면 이병철 회장을 비롯한 참여 인사들이 대한민국의 살길은 외자도입을 통한 공업화의 길밖에 없다는 현실 인식에 눈을 뜬것일 것이다.

 

이 시기에 근대적 의미의 기업군이 탄생하게 된다. 자유당 말기 재계 랭킹 상위 10위에 든 기업가는 이병철(삼성물산), 정재호(삼호방직), 이정림(개풍상사), 설경동(대한전선), 구인회(락희화학), 이양구(동양시멘트), 남궁련(극동해운), 최태섭(한국유리), 함창희(동립산업), 백남일(태창방직) 순이다. 이것이 1950년대 후반의 재계 지도였다.

 

기업군 계열의 선두로 떠오른 기업은 삼성그룹이었다. 1953년 제일제당 설립으로 이병철 회장은 엄청난 부를 손에 쥐었다. 한 해에 무려 80억환이라는 경이적인 순익을 올린 것이다. 뒤를 이어 1956년 2월에 제일모직을 준공함으로써 손대는 사업마다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56년에는 은행귀속주 불하에 참여하여 흥업은행 인수에 성공함으로써 한국 재계의 선두를 달리는 기업이 된다. 훗날 그는 자서전에서 성공의 비결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자고로 성공에는 세 가지 비화가 있다고들 한다. 운(運), 둔(鈍), 근(根)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은 능력 하나만으로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운을 잘 타고나야 한다. 때를 잘 만나고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운을 놓치지 않고 운을 잘 타고 나가려면 역시 운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일종의 둔한 맛이 있어야 하고, 운이 트일 때가지 버티어 나가는 끈기라고 할까, 굳은 신념이 있어야 한다. 둔과 근이 따르지 않을 때에는 아무리 좋은 운이라도 그만 놓치고 말기 일쑤다.>

 

재계 서열 2위는 정재호 회장의 삼호방직이 차지했다. 그는 6ㆍ25의 덕을 톡톡히 본 기업가였다. 대구에 있던 삼호방직이 파괴의 화를 면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부가 대구와 부산으로 피난을 오면서 영남 기업인들은 정계 실세들과 교분을 맺는 기회가 됐다. 이러한 시운(時運)에 편승한 정재호 회장은 조선방직을 인수하고 대전방직을 복구했으며, 삼호방직을 대대적으로 확장해 한국의 방직 왕으로 부상했다. 또 은행 귀속주 불하에 참여해 저축은행 인수에 성공에 순풍에 돛을 단 형국이 됐다.

 

뒤를 이어 재계 3위로 부상한 기업군이 이정림(李廷林) 회장의 개풍상사다. 개성상인 출신의 이정림 회장은 문경시멘트공장을 인수하여 대한양회를 설립했다. 이어 1959년에는 최태섭, 이양구, 박두병, 김광균, 김익균씨 등의 지원을 얻어 서울은행을 설립했다. 1950년대 말기에 그는 개풍상사와 대한양회, 대한탄광, 삼화제철, 대한철강을 운영하는 재계 3위의 기업가로 발돋움해 있었다.

 

다음은 대한산업의 설경동 회장. 대한산업이란 무역회사를 차려 무역업에 종사하던 설경동 회장은 1953년 8월, 수원에 대한방직을 설립했고, 조선방직 대구공장을 불하 받아 대단위 공장으로 확장했다. 1955년 2월에는 조선전선을 인수하여 국내 최초로 전선(戰線) 전문생산회사인 대한전선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1956년에는 대동제당을 설립해 착실히 부를 축적함으로써 제4위의 대기업군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재계 5위의 기업군은 구인회 회장의 럭키가 차지했다. 진주에서 포목상으로 출발한 구인회 회장은 1947년 화장 크림을 생산하는 락희화학공업사를 창업했다. 이어 플라스틱 사업에 손을 대 큰돈을 벌었다. 이어 치약으로 공전의 히트를 쳤고, 1959년에는 금성사를 설립하여 라디오를 생산하면서 착실한 성장을 거듭해 갔다.

 

1950년대는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수천 년 이어오던 가치관이 무너지고 식민지에서 독립국가로, 해방과 분단과 동족간의 전쟁을 치르며 신분질서의 파괴, 민족의 대이동이 진행됐다. 전후에는 전란의 참화에서 일어서기 위해 건설의 망치 소리가 전국을 뒤덮던 시기였다. 혼란의 기운이 차츰 진정되기 시작한 것은 1958~59년 무렵이었다.

 

1959년 7월 전후복구 담당 부서인 부흥부는 '부흥백서'를 발간했다. 그것은 정부 차원에서 전후복구가 완료됐음을 사회 각계에 알리는 메시지였다. 신현확 부흥부장관은 '부흥백서를 내면서'라는 머리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온 겨레의 힘찬 노력이 열매를 맺어 근년에 이르러 우리 나라의 살림사리(살림살이)가 버쩍 늘었고 환경도 크게 명랑하여 졌습니다. 특히 지난해에는 농업과 공업의 생산이 더욱 많아지고 물건값이 해방후 처음으로 떨어졌으며, 돈의 가치에 대한 국민의 신인도 더욱 두터워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놀라운 것은 생산된 물건이 많이 쌓여 그것을 팔기 위해서 시장을 더욱 넓혀야 하는 문제가 급해졌고, 한편에 있어서는 금융기관을 통한 일반의 저축이 예없이 늘어 금융사정이 정상화되는 동시에 앞으로 투자를 어디다 할까 하는 새로운 문제까지도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4)◎

 

김용삼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