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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와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Joyfule 2020. 8. 14. 05:54



이승만 대통령 와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한국번영 보니 이박사 옳았다"
 42년 첫대면 억제된위엄 느껴
 교육-안정-독립 업적 인정해야
 그동안 50권 저술 인세-연금으로 편안한 생활
 "미에 당당히 맞서 친미 비판 안될말"

발행일 : 1995.02.26 / 17 면

 기고자 : 정리=이한우 


대담 서희건 편집부국장

이승만초대대통령의 외교고문으로 일했던 로버트 올리버박사(86)가 22일 내한,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승만과 나라세우기 전을 관람했다. 그는 국립묘지에 있는 이승만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고 국사편찬위원회방문 등 바쁜 일정을 마치고 26일오전 미국으로 돌아갔다. 대한민국 건국과 제1공화국의 산증인이기도 한 올리버박사를 서희건부국장이 만났다. <편집자주>

서희건=23일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승만과 나라세우기 전을 돌아보신 소감은 어떠셨습니까.

올리버=압도될 정도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설득력 있게 이승만박사의 전생애를 재창조해놓았더군요. 그의 삶전체가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됐습니다. 이런 준비를 해온 조선일보사의 통찰력에도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서희건=올리버박사께서 이승만박사를 처음 만난 것은 언제 어디서입니까.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올리버=42년 9월 중순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펜실베이니아주 버크넬대에서 수사학(수사학)을 가르치다가 전쟁때문에 휴직을 하고 식량관리계획처의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만난 것은 워싱턴 dc의 라파예트공원광장에서 약간 떨어진 코네티컷가에 있던 콜로니얼 카페테리아에서입니다. 그곳은 중급관리들이 의견교환과 정책비교를 위해 즐겨 이용하던 곳이었는데, 한국에서 태어난 펜실베이니아주 루이스 버그시 장로교회 에드워드 장킨목사의 소개로 이박사를 만났습니다.

금속활자-한글 자랑

서희건=이박사는 처음 만나 주로 무슨 이야기를 하던가요.

올리버=주로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내가 한국에 관해 거의 무지상태였기 때문에 한국은 유럽보다 훨씬 앞서 금속활자-나침반, 4절지 1백12권에 달하는 백과사전 등을 개발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또 중국이나 일본의 문자와는 전혀 다른 26개의 고유한 문자 한글과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게 된 사정 등을 상세히 들려주었습니다.

서희건=이박사에 대한 첫 인상은 어땠습니까.

올리버=단어를 잘 선택하고 흠잡을 수 없이 매끄럽게 말을 잘 이어나갔습니다. 그는 표정이 풍부했고 유머도 넘쳤습니다. 자기나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내가 받은 가장 강한 인상은 억제된 위엄 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서희건=그때부터 친해지셨군요.

올리버=이박사는 나에게 한국을 이해시킨 다음, 한국을 위한 일을 해달라고 간청했어요. 그래서 나는 43년 3월 7일 워싱턴 포스트지에 일본의 숙적-한국 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기고했습니다. 그 후에도 신문과 잡지에 한국의 사정을 알리는 글을 여러 개 썼고, 44년 9월에는 퍼블릭어페어즈출판사에서 잊혀진 나라 한국 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서희건=한국에 처음 오신 것은 언제입니까.

올리버=46년 6월 3일입니다. 그리고 이박사는 나를 김성수씨에게 소개해 보성전문에서 강의를 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습니다. 그때 미국사와 민주주의에 관해 강의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서희건=그러면 외교고문으로 정식 임명된 것은 언제입니까.

올리버=47년 1월입니다. 그러나 이박사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미국의 국무부나 국방부와 마찰을 빚고 있었기 때문에 정식 임명되기 전부터 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주로 했던 일은 정식정부가 출범하기 전 캐나다나 un에서 한국을 대리해 의견을 발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에 대사를 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겁니다.

고집불통 별칭얻어

서희건=광복후 미국정부와 이승만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올리버=미국은 이박사가 미국생활을 오래했고 고령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정책에 고분고분 따라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게다가 한국에는 이박사의 정치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명목상의 지도자정도로 생각하고 그의 귀국도 순순히 허용했던 거지요. 그러나 이미 이박사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자기조국은 강력한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귀국한 이박사와 미군정 하지장군의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지요. 그때부터 이박사를 싫어하는 미국인들은 그의 이름 앞에 고집불통(stubborn)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시작했어요.

서희건=6 25전쟁 당시 올리버박사는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올리버=이박사와 미국이 전쟁을 보는 시각은 크게 달랐지요. 미국으로서는 소련이나 중국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소극적이었고, 이박사는 차제에 한국을 통일시켜야 공산세력을 견제하는 데도 유리하다며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자주 충돌할 수밖에 없었지요. 둘사이를 중재하고 화해시키는 것이 나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서희건=이박사의 남한단독정부론에 대해 한국내 학자들의 시각은 상당히 부정적입니다. 당시 미국의 생각은 어땠나요.

 

올리버=상당히 좋은 생각(good idea)이라는 입장이었습니다. 적당히 절충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북한도 사실상 정권이 수립된 상태였기 때문에 좋아했고, 소련도 마찬가지 입장이었습니다.

 

서희건=박사님은 이승만전기를 쓰셨습니다. 그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올리버=오랫동안 가까이 지내면서 그분을 존경하게 됐습니다. 적어도 루스벨트나 처칠에 못지 않은 인물이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사실 세계정치인중에서 그처럼 동양과 서양의 고등학문을 동시에 몸에 익힌 인물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미국은 한국을 대충 속국정도로 생각했는데, 이승만박사는 당당한 논리를 전개하며 이에 맞서 국가간의 동등한 지위를 강조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이박사가 아니고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겁니다.

미언론서 많은 비난

서희건=한국학계에서는 이승만박사를 친미주의자라고 해서 비판하는 견해들이 많습니다.

올리버=( never 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휴전협상이 한창 진행중일 때도 이박사는 미국에 대해 "전쟁에서 얻지 못한 것을 협상테이블에서 얻을 수 있을 것 같으냐"며 대항했습니다. 내가 보더라도 그는 미국에 협조를 하지 않아 미국정계나 언론계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그것이 한국을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서희건=이승만박사의 반공노선은 동구권이 몰락한 지금에 와서 새삼 국제적으로도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된 무슨 특별한 배경이라도 있다고 보십니까.

올리버=글쎄요. 중국이나 소련의 현실정치에서 나타난 독재를 보고 싫어하게 된 것같습니다. 무슨 특별한 동기는 없었던 것 같고 미국정치제도를 좋아한 것도 한 이유는 되겠지요. 그러나 반공이 그의 확고한 신념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서희건=현재의 시점에서 이승만박사의 업적을 정리한다면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요.

올리버=그는 교육 대통령입니다. 어려운 가운데도 교육에 대한 그의 열의가 없었다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 우수한 인력은 양성되기 어려웠을 겁니다. 또 그는 민주주의의 기초는 교육에 있다고 보았고, 그래서 55년에는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 이라는 교재의 집필을 저에게 부탁해 쓴 적도 있습니다. 이 책은 미국에서도 널리 읽혔습니다. 또 하나는 안정 대통령입니다. 물론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에 대해서도 탄압했다는 점에서 그 분에게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에도 2차대전때 미국내 일본인들을 억압한 경우가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야겠지요. 끝으로 그는 독립 대통령이었습니다. 특히 미국과의 관계에서 그러했습니다. 미국과의 우호를 유지하면서도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던 모습은 안타까울 정도였습니다.

서희건=미국의 경우 건국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에 대해 비난을 합니까.

올리버=물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워싱턴-링컨 등 훌륭한 대통령들이 욕도 많이 먹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강한 대통령이 훌륭한 대통령입니다. 우리가 이름을 기억하는 워싱턴-링컨-루스벨트 등이 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의 전기와 자료들이 나와 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욕만 하는 경우는 없지요. 또 학교에서는 그분들을 존경하게끔 가르칩니다.

"당시 언론자유 보장"

서희건=이박사의 말씀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올리버= 절대 포기하지 마라(never give up) 입니다. 그 분은 자신이 한번 목표를 정하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형입니다. 서재필박사의 경우, 한국에 왔다가 결국 포기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이승만박사는 감옥을 나와서도 계속 자신의 길을 갔지 않습니까.

서희건=이승만박사에 대해 독재자라고 하는 의견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올리버=세상에 그만큼 언론자유를 보장한 독재자가 있습니까. 당시 ap통신이 꼽은 몇 안되는 언론자유가 보장된 나라가 한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4 19이후 하와이에 왔을 때 조그만 가방 몇 개 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길 바랍니다.

서희건=올리버박사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올리버=그동안 저술한 책이 50여권 됩니다. 그중 한국에 관한 것은 8권입니다. 여기서 나온 인세로 주식에 약간 투자를 한 것이 약간의 돈을 벌게 해주었고 재직했던 대학에서도 연금이 나와 편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서희건=오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으로 하실 말씀은.

올리버=번영된 한국의 모습을 보며 역시 이승만박사의 선택이 옳았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박사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것을 보니 한국을 위해 일했던 것이 자랑스럽게 여겨집니다. <정리=이한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