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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부상학생들, 이승만 대통령에게 “할아버지” 부르며 눈물바다

Joyfule 2020. 8. 14. 05:56




4·19 부상학생들, 이승만 대통령에게 “할아버지” 부르며 눈물바다
 

 책소개 :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 (3) /프란체스카 도너 리 著 / 도서출판 촛불 刊 (2006)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은 초대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1900~1992)가 1985년부터 ‘일요건강’에 연재한 글을 모아 간행한 회고록이다. 1933년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던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결혼한 후 1965년 이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서거할 때까지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록에는 대한민국의 독립과 건국, 6·25전쟁 등 현대사의 주요 장면이 포함돼 있다. 주요 내용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下野 성명 직후 “梨花莊까지 걸어가겠다”


귀국 염원 끝내 못풀고, 이역만리에서 서거

1960년 4월 23일 대통령이 4·19 부상 학생들을 찾아서 서울대학병원 병실에 들어섰을 때 부상 학생들은 모두 대통령을 “할아버지”하고 부르며 손을 잡고 얼싸 안으며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병실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병원에서 돌아온 대통령은 침통한 표정으로 “내가 맞아야 할 총알을 우리 소중한 애들이 맞았어”하며 비통해 했다.

대통령직을 사임해야겠다는 결심은 이미 서 있었다. 하야 성명 직후 경무대에서 이화장까지 걸어가겠다고 버티던 대통령을 억지로 차에 태웠던 일들이 지금은 꿈과 같이 느껴진다.

길가의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이화장 앞의 마당에서는 동네 사람들과 시민들이 모여 대통령을 박수와 만세로 맞아 주었다. 대통령도 손을 들어 답례를 보내며 눈시울이 젖어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대통령은 사람들이 잘 보이는 담 옆으로 올라가서 “여러분 우리 집에 놀러들 오시오”하고 말했다.

대통령은 이화장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나는 즐거움을 가지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대통령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기 때문에 마음이 든든했다. 그렇지만, 때로 불안한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6·25전쟁 당시 반공포로 석방으로 자유를 찾게 된 청년들이 찾아와 대통령의 안위를 지키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여주었다.

이화장에서 대통령의 일상생활은 별 불편이 없었지만 대통령의 건강과 휴양을 위해 하와이로 가서 몇 주일 쉬고 오시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측근의 제의를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2주일 내지 한 달 정도 하와이를 다녀올 수 있는 짐을 챙겼다.

예정했던 하와이 체류가 한 달이 지나자, 대통령은 한국에 돌아 올 준비를 했다. 그러나 모두가 좀 더 요양을 하시도록 만류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권고는 당시의 국내 사정을 알고 하는 이야기였으나, 완전히 정치를 떠난 한 고령의 노인으로서 고국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대통령에겐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1960년 한 해를 하와이에서 넘기게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고국을 그리는 마음은 날로 더하여만 갔고 나라에 대한 걱정도 커졌다.

우리는 마침내 새로 양자를 맞이할 것을 상의하였다. 대통령을 위해 양자를 구하려 한국에 왔던 이순용 씨는 한 때 정부의 오해를 받아 연금을 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으나, 마침내 인수를 입양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대통령은 그 날부터 인수가 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1961년 12월 13일 대통령이 그토록 기다리던 인수가 도착했다. 대통령은 인수의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첫 대면이었지만 두 사람은 오래 떨어져 있던 부자처럼 다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에도 나를 안타깝게 하는 것은 자나깨나 귀국 생각뿐인 대통령이 또 하루를 하와이에서 보낸 것을 못 견디게 괴로워하는 일이었다.

그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대통령에 관해 터무니없는 낭설을 만들어 내는 이가 있었다. 심지어 이화장에 있던 우리 물건을 몽땅 실어가 버린 정치인도 있었다.

귀국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대통령은 한일관계에 자신이 끼칠 영향을 생각해서 귀국을 못하게 누가 조종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했다.

대통령은 인수에게 우리 나라로 가는 여비가 얼마인가를 묻고, “내가 우리 땅을 밝고 죽는 것이 소원인데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해”하며 상기된 눈에 눈물이 가득 맺혔다.

“지금시기가 지나면 비행기 여행조차 불가능하다”는 주치의의 의견과 조국의 땅을 밞아보고 죽겠다는 남편의 뜻에 따라 나는 1962년 3월 17일을 귀국일자로 잡았다. 그렇지만 출발하는 날 아침 김세원 총영사가 찾아와 귀국 만류 권고를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누가 정부 일을 하든지 정말 잘해 가기를 바라오”하는 것이 대통령 대답의 전부였다. 그런 뒤 휠체어에 몸을 기댄 후 다시는 혼자서 일어나지 못했다.

1965년 6월 말에 나는 인수를 급하게 불러야만 했다. 대통령의 병세가 위독했기 때문이다. 7월 18일 밤 결국 나와 인수는 대통령의 병상 곁에 서서 임종을 지켜보게 되었다.

병상에서 “호랑이도 죽을 때는 제 굴을 찾아간다는데”하고 말하면서, “남북통일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다”고 하던 대통령을 생각하면 한이 맺힌다.

이제 나는 남편과 우리 민족의 소원인 남북통일이 하루빨리 이루어져서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선진국이 되기를 두 손 모아 빈다.

정리/김정은 기자  hyciel@

 

김정은기자  2006-09-08 오후 8: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