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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장애를 극복하는 구체적 방법(1) 자기 가치에 대한 확신.

Joyfule 2021. 2. 24. 00:19


 

  

    인격장애를 극복하는 구체적 방법(1) 자기 가치에 대한 확신.

 

 

 사람이 자기 인생을 비관하는 이유는 대개 자신의 가치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청년들은 때때로 죽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그 말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직 자신의 값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인이 생기고 사랑을 하다 보면 그런 소리가 거의 뜸해집니다.

그러다가 아이 하나 낳게 되면 그런 소리가 정상적인 경우에는 사라집니다.
오히려 "나는 아이를 내버려 두고 죽을 수 없어!" 합니다.
50억이 넘는 인류가 있지만 이 아이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키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자기 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자기 가치를 깨닫게 되고 그는 도저히 죽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가치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대단히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가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주인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하찮은 물건이라도 주인이 귀하면 그 물건도 귀해지는 법입니다.
같은 만년필이라도 링컨이 사용했던 만년필은 귀한 보물입니다.
같은 편지라도 백범 김구 선생님의 편지는 귀한 보물이 됩니다.
그 물건 자체가 귀한 것이 아닙니다.
그 물건의 주인이 귀하기 때문에 그 물건도 귀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존귀한 이유는 생김새가 아름답거나 지식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자기의 주인(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이 귀하시기 때문에 따라서 귀한 것입니다.

무속인이 귀한 사람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주인이 귀신이기 때문입니다.
마약중독자가 귀하게 여김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주인이 마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도의 주인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귀한 존재일까요?
자식, 부모, 아내... 물론 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의 생명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명이 없다면 자기 주변의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26절에 보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의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나같은 사람은 일찍 죽어야 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신성한 자기 존재에 대한 자기 모독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할 때 "이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기도합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말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지나치면 안됩니다.
왜 우리가 벌레만도 못합니까?
이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도 지나치면 실례가 됩니다.
그리고 겸손이 너무 지나치면 오히려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이 됩니다.

자신의 가치를 억지로 무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참 행복을 느낄 때는 언제입니까?
그것은 자기의 존재 가치를 발견했을 때입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가치 있게 여기고 대견스럽게 여길 때
기쁨이 나오고 용기가 나오게 되고 그 가운데 행복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오면서 스스로 생각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보아도 죽일 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업하다 실패한 것도 아니고 창기와 함께 놀아나다가 재산을 탕진했고
게다가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한 모습을 자기가 보아도 한심합니다.
스스로도 용서가 되지 않지만 한편으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일꾼 중의 하나로 취급해 달라고 하더라도 집으로 돌아가자."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지만 얼마나 비참한 모습입니까?

그러나 아버지가 어떻게 맞이합니까? 기쁨으로 그를 맞이하며 소리칩니다.
"소를 잡으라. 목욕을 시키고 가락지를 끼우라. 잔치를 베풀라."
탕자가 스스로를 보는 관점과 아버지가 그를 보는 관점이 극과 극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천하보다 값있게 보십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왜 나에게 복을 주시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 때문에 서운해 할 필요가 없어야 합니다.
십자가 속에 이미 우리의 값이 다 들어있고, 우리의 가치가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십자가의 구원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받을 것을 다 받은 셈입니다.

우리 각 개인들은 이렇게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라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자신을 함부로 생각하고 함부로 굴리는 것은 잘못입니다.

요즘 안타까운 사실은 사람이 너무 쉽게 죽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싫다고 죽고, 배반당했다고 죽고, 살기 어렵다고 죽고,
대학입시에 떨어졌다고 죽고, 공부하기 싫다고 죽어버립니다.

죄 중에서 가장 큰 죄 중의 하나는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이 너는 존귀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죽어 버리니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며 얼마나 큰 죄가 됩니까?

그러한 태도가 나오는 것은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 현실에 집착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가 있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고 죽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활은 그 초점이 현재에 있지 않고 언제나 미래에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주안점은 현재에도 있지만 언제나 미래에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오늘 실패가 있고 오늘 고난이 있어도
미래의 분깃이 있는 사람은 그것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실패를 많이 해 본 분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할 말이 많아서 좋습니다.
실패를 모르고 살아온 사람은 할 말이 없습니다. 생이 재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실패한 사람에게 인생의 조언을 할 수 없습니다.
결국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실패한 사람은 그 실패를 통해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어떤 젊은 과부가 목사에게 찾아와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아요?"
목사가 민망해 할 말이 없없습니다. 결국 한 마디 했습니다.
"어떡하긴요. 기도하며 살아야죠."
그러니까 이 젊은 과부가 답답해하며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내 심정을 몰라요."

목사가 그 심정을 잘 알 리가 있겠습니까? 정말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무슨 말로 이 여인을 위로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교회에 다니는 과부생활을 오래 한 어떤 여집사를 불렀습니다.
"빨리 와 주세요. 이런 사정이 있는데 당신이 좀 와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 나이든 과부 여집사가 와서 젊은 과부에게 말했습니다.
"인생은 살 만한 것입니다. 용기를 내세요."
이 나이든 과부의 말에 젊은 과부가 위로를 받고 돌아갔습니다.
과부의 심정을 과부 외에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여러 종류의 사람을 두셨습니다.

그처럼 실패한 사람은 말해 줄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도처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파란만장한 경험이 있다면 할 말이 많아서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그 경험도 하나님이 그 사람 자신에게 주신 선한 분깃입니다.

여러분! 절대 기죽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가치를 인정하십시오.
하나님이 필요하시다는 데 왜 이리 할 말이 많고 이유가 많습니까?
우리는 오늘 이 순간에도 생명이 건재한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마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고 계시다는 또 하나의 증거일 것입니다.

특히 자기의 환경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완벽하게 조건을 다 갖추었다고 해서 그것이 능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움직이시는 과정을 보게 되면 부족한 사람을 많이 쓰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의 관점은 그 마음의 중심에 가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관점에 여러분들에게도 주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참좋은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