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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69과)5.

Joyfule 2009. 4. 17. 00:19

 

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69과)5.

열왕기(6): 분열왕국 이야기(3)(18-25장)

 

 

 * 요시야의 종교 개혁의 영향
  요시야의 종교 개혁은 그 당시 뿐 아니라 그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요시야의 종교 개혁은 말씀과 언약에 대해 보다 더 진지한 태도를 가지게 만들었다. 흔히 정부에 의해 주도되고 백성들의 호응을 받아 추진되는 개혁 운동은 불안정한 기초 위에서 진행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요시야의 종교 개혁은 왕이 직접 개혁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시작되었으며, 외국의 속박에서 벗어나 보려는 민족주의가 이에 박차를 가하도록 만들었다.

예레미야역시 한 때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개혁이 점차적으로 형식적으로 흐르게 되자, 그는 이에 대해 맹렬하게 공격하게 되었다. 요시야는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에서만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했다.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기 때문에 자신들의 안전이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했다(렘 4:4,5, 7:4). 그러나 순종하지 않는 백성들에게 안전이란 있을 수 없었다. 어쨌든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통치방식이 훌륭했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그를 높이 평가했다(렘 22:15-16).

 

  신명기의 요지는 여호와를 신실하게 경외하는 자에게는 보호와 축복이 있으며,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자에게는 고통과 불행이 주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 원리는 국가의 번영을 비롯해서 사회의 전반적인 면에 두루 적용되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불순종하면 그들의 땅을 잃게 될 것을 경고하고 있다(4:25-31, 8:1920, 11;1-17, 28:58-68). 요시야의 종교 개혁이 일어난 후에 이러한 원리에 대해 의아심을 품을 만한 고통스러운 사건들이 계속 발생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주전 538년에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 백성들은 당연히 모든 예배는 예루살렘에서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바로 이 무렵에 성전에서 제물로 사용될 짐승들을 팔고, 돈을 바꾸어 주는 상인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인 장소(예루살렘)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찾아오는 순례자들에게 필요한 제물과 화폐를 공급해 주었다.

 

 * 요시야 말기의 국제 정세와 므깃도 전쟁(대하 35:20-27, 왕하 23:28-30)..


  그러면 요시야의 개혁은 유다를 용서받게 만들었는가? 하나님은 요시야처럼 철저하게 순종한 왕을 인해 유다에게 구원을 선포하셨는가? 열욍기 기자는 요아스의 순종에도 물구하고 이미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한 그 모든 격노를 인함이라.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뺀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한 이 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왕하 23:26-27)." 이 구절은 요시야의 의로운 개혁이 다가오는 유다의 멸망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게다가 요시야는므깃도에서 애굽 왕 느고와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다(왕하 23:29-30). 요시야의 개혁은 열왕기에 나오는 일련의 개혁의 절정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개혁이 아무 효력이 없게 되었다. 므낫세가 저지른 죄로 인해 유다의 멸망은 시간 문제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앗수바니팔이 죽은 후에(주전663년) 앗수르는 계속하여 유약한 자들이 그 뒤를 이었으므로 국세는 점점 쇠약해져만 갔다. 이처럼 약해진 앗수르는 바벨론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메데까지 바벨론과 연합하여 앗수르를 공격했다. 그리하여 주전 612년에 바벨론과 메데의 연합군은 앗수르의 옛 수도였던 앗수르를 점령했고, 또 2년 후에는 니느웨를 포위하였고, 그 성은 포위된지 3개월만에 점령되었다. 이러한 니느웨 성에 대한 멸망은 이미 선지자 나훔에 의하여 20년 전에 예고된 바 있었다(나훔 3:1-7, 16-19).

 

 그러나 앗수르는 다시 대오를 정비하여 서북부 도성인 하란에서 전쟁을 개시했다. 그러나 주전 610년에 하란은 결국 바벨론에 의해 점령당하고 말았다. 앗수르는 다음 해인 주전 609년에 또 다시 하란을 탈환하기 위해서 전쟁을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에 애굽의 바로 느고는 급속히 성장하는 바벨론을 견제하기 위해서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을 치려고 출정했다. 이때에 요시야 는 이스라엘이 독립하려면 앗수르가 멸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바벨론을 치려고 진군하는 애굽의 군대를 막으려고 했다.

 

요시야는 느고의 출정을 막기 위해 전쟁에 나갔다가 결국 므깃도에서 전사하고 말았다(왕하 23:29-30, 대하 35:23-24). 그러나 이 일로 인해서 애굽은  앗수르를 돕지 못하게 되었으며, 결국 하란은 바벨론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북방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의 죄에 아합의 죄가 더해졌을 때에 멸망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유다도 므낫세의 죄로 인해 급속하게 멸망으로 치닫게 되었다. 유다의 경우 잠시 지연은 될 지 모르지만 결국 그들도 멸망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께서 유다의 심판을 지연하신 이유는 단지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