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의냐, 하나님의 뜻이냐?
자기의 의라는 말은 교회에서 별로 들어보지 못한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의 근원지는 성경에 있다. ‘의(義’)라는 헬라어는 ‘디카이오쉬네’라는 단어로서 ‘옳음’이라는 뜻이다. 대부분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하나님의 의를 말하지만, 대조적으로 ‘사람의 의’를 말하기도 한다. 그 중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리새인의 의과 서기관의 의’이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드높은 종교심을 자랑하였던 유대지파의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적대시하며 자신들의 의로움을 드러내곤 했다. 그래서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대항하는 사탄의 좀비가 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만행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사도들과 제자들을 박해하여 결국 지옥으로 던져지는 끔찍한 운명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를 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못 박으시기도 하였다.(마5:20)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을 얻지 못하는 이유로서, 가장 경계하여야할 과오가 바로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바로 신앙의 연륜이 높고 성경지식이 출중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 덫에 걸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은 이러한 잘못을 꿈에도 모르고 있으니 한탄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지만, 뒤에서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이들의 행태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다.
교회에서 자신의 의를 가장 드러내기 쉬운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담임목사를 비롯한 목회자들이다.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단에서 안수를 받아,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을 받는 자타가 공인하는 교회지도자이다. 그래서 이들의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복선을 깔기 쉽다. 실제적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대언자’로 내세우거나, 일반 평신도와는 달리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관계가 있는 신분임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곤 한다. 물론 교회를 다스리고 교인들에게 영적 양식을 먹이는 목자의 신분임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당사자의 속내를 아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힘든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의 성품을 찬찬히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 잣대가 바로 교만이다. 교만한지 아닌지 살펴보면,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지 알 수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만은, 안하무인의 포악한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사실 목회자 중에서 겸손한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스스로 하나님의 높은 종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말에 순종하지 않거나 대항하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고 위협을 하는 것은 다반사이고, 이를 빌미로 교회에서 쫓아내거나 죄책감을 주며 다른 교인들에게 근거 없는 낭설을 퍼뜨리기도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신분으로 착각하는 사람이라면, 교만하기 짝이 없으며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사람이다. 특히 목회자는 해박한 성경지식을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서 사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두 번째로, 은사를 많이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은사란 하나님의 선물이다. 은사의 종류는 다양한데, 지식과 지혜, 사랑과 믿음도 은사이지만 이는 겉으로 드러내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적의 능력을 밖으로 드러나는 은사를 사모하는 데, 방언, 방언통역, 예언, 귀신 쫒음, 치유와 같은 은사들은 기적을 드러내는 은사들이다. 이런 은사들은 성령이 내주하심을 나타내는 증거로서, 이런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들은 죄다 성령의 사람이고 기도의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러한 은사가 성령이 주시는 것인지 아닌지, 분별력이 없으면 귀신에게 속어 넘어가지 십상이다. 그러나 이에 상관없이 죄다 성령으로 받은 은사라고 쳐도, 이 은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영혼구원을 위해 주시는 도구로 쓰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 은사를 마치 하나님과 가까운 사이를 자랑하고,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는 증거로 삼는 듯한 인상을 주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 역시 그들이 말과 행위를 떠나서, 겸손한 성품이 있는지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은사를 자랑하고 으스대면서, 자기의 말을 듣지 않거나 무시하면 겁을 주고 위협을 일삼는다. 또한 귀신을 쫒아주거나 치유를 해주는 조건으로 많은 헌금을 요구한다면, 이 역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평신도이지만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많이 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명함에 ‘40일 금식기도 3회 실시’라고 박아놓고 다니기도 한다. 이뿐 아니라 새벽기도회에 나가는 것을 은근히 과시하는 이들,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을 교회에 많이 드린 것을 목회자나 다른 교인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 하고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 전도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교회에 데려오거나 교회 봉사를 많이 하는 것은 자랑하는 이들, 또한 높은 교회 직분을 알아주는 것을 즐기는 사람 등이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높은 직분을 학수고대한다. 그러나 그간 교회에 한 희생적인 신앙행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한 것일 게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시고 인정해주시기만을 바랄 것이지, 왜 목회자나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시험에 들고 서운해 하고, 자랑하며 광고하고 다니는 것일까? 이는 죄다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네 교회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거나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지만, 자신의 이름이 드러내며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예수님 당신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랬다.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혹독한 책망을 들었음을 물론이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잣대는 작금의 우리네 교회도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 교회나 교인들 앞에서 한 희생적인 신앙행위가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영광을 받으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가증스런 악인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물론 전심으로 자복하고 회개하며 다시는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용서를 받겠지만,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회개를 거부하며 여전히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있다면 천국에서 그들을 보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이 땅에서 평안하고 형통한 삶은 꿈도 꾸지 말기 바란다.
출처 : 다음까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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