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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진기자 로버트 카파...

Joyfule 2006. 5. 28. 00:53

총알 사이로 ‘셔터의 진실’을 쏘다

 

전쟁사진기자 로버트 카파의 2차대전 종군기
106컷중 암실 직원 실수로 10컷만 남았지만
왜곡이나 미화 없이 전쟁 비극 있는 그대로
이면의 진실 전하고자한 기자정신 ‘카파이즘’으로 추앙
한겨레 이정용 기자
▲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로버트 카파 지음. 우태정 옮김. 필맥 펴냄. 1만2000원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 인간성이 말살되는 살육의 현장이기에 증언하고 감시할 눈이 더더욱 필요하다. 그래서 기자들은 역설적이게도 전쟁현장 취재를 일생 최대의 꿈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모름지기 기자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가끔은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취재하는 광경을 머릿속에 한두 번은 그려봤을 것이다.

죽음의 위협과 기자의 사명감이 미묘하고도 긴박하게 교차하는 가운데 눈앞에 펼쳐지는 잔인한 장면들을 응시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오직 카메라에 의지한 채 현장을 기록하는 기자들. 이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투철한 기자정신은 로버트 카파로부터 시작된다.

전쟁사진이라면 그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본명은 엔드레 에르노 프리드만. 1913년 헝가리 태생의 유대인. 1931년 좌익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해 베를린에서 사진기자 생활 시작.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파리로 간 그는 1936년 사진을 팔아 돈을 벌기 위해 로버트 카파라는 이름의 가공의 미국인 사진가 행세를 하다 아예 그 이름으로 활동했다. 애인 게르다 타로와 함께 스페인내전에 뛰어들어 공화파인 인민전선쪽에서 취재하다 그해 9월 코르도바 전선의 참호에서 뛰쳐나온 인민전선 병사가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순간을 담은 사진이 미국 <라이프>에 실리면서 그의 이름이 전세계에 알려졌다. 포토 저널리즘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를 받게 한 그 사진은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전쟁기록사진으로 평가받았다.

생사 경계선서 인간적 고뇌

▲ 연합군이 시칠리아 트로이나에 진주한 직후 응급치료를 받은 아이를 안고 있는 현지 주민 모습. 1943년 8월 미군은 1주일간의 고전 끝에 트로이나를 탈환했다(위). 1944년 6월6일 감행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오마하 해변에 상륙하는 미군 공격 제1파 부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나오는 유명한 전투장면은 바로 카파가 찍은 이 사진들을 원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필맥 제공
카파는 그 뒤 중일전쟁, 2차 대전, 중동전쟁, 인도차이나 전쟁 등 숱한 전장들을 취재하며 지금까지 모든 사진기자들에게 전쟁사진의 전설로 살아 있다. 자기희생과 위험을 무릅쓴 취재정신을 일컫는 ‘카파이즘’도 그 속에서 태어났다.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필맥 펴냄)는 카파가 찍고 쓴 2차대전 종군기다. 1944년 6월 2차대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종군해 106컷의 사진을 찍었으나 <라이프> 암실 직원의 실수로 대부분 소실되고 10장만 살아남았다. 그 10장을 실은 <라이프> 기사에 붙은 설명이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였다.


책은 뉴욕에서 백수로 뒹굴던 그가 2차 세계대전 발발 뒤 <콜리어스>의 의뢰를 받아 북아프리카 전투를 취재하러 떠나는 장면을 시작으로 베를린의 함락 때까지 매순간 전장의 최 일선에서 삶과 죽음을 넘나들면서 찍은 사진과 그의 시각을 드러내는 생각과 인간적인 고민 등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글들을 담고 있다. 그도 사진기자라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회의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장면들이 곳곳에 산재돼 있다. 숱한 전장에서 피가 낭자한 사진을 찍어왔음에도 그는 처절한 장면을 볼 때마다 심한 구역질을 느끼며 자신이 장의사나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다. 시실리 작전에서 자신도 병사들과 같이 낙하산으로 현장에 뛰어들며 나눈 자신과의 대화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한다. 고민들을 현장에서 극복해 내면서 어떤 왜곡이나 미화도 하지 않고 오직 카메라로 전쟁의 실상을 알린 그의 숨은 휴머니즘과 기자정신이 어떻게 영글어갔는지 짐작하게 한다.

모든 전장에서 병사보다 더 가까이 전투현장에 다가가 촬영한 것으로 유명했던 그는 1954년 <라이프>의 요청으로 베트남 전장에서 프랑스 전투부대원들을 촬영하다 지뢰를 밟고 숨졌다. 41살.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사망한 최초의 미국 종군기자로 기록됐다.

베트남 전장서 지뢰 밟고 숨져

카파가 평가받는 이유는 이런 극적인 요소 때문만은 아니다. 역자 우태정은 이렇게 말한다. “(그를 빼놓고 전쟁사진을 논할 수 없는 까닭은) 그가 유일한 전쟁사진가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로저 팬튼, 알렉산더 가드너와 같은 뛰어난 사진가들이 많이 있었다. 41년이라는 짧은 생애에 다섯 차례의 전쟁터를 누비다 결국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사실 때문만은 더더욱 아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전쟁의 진실을 전하고자 했던 그의 기자정신 때문이다.”

한국에선 간간이 그의 유작들을 볼 수 있는 기회들은 있었다. 사진 인구도 많아지고 유명한 초대전이 국내에서 열리면서 그의 유명한 사진들을 접할 기회가 많아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삶과 같이 했던 유작들의 숨은 이야기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종군 취재기가 담긴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는 카파이즘에 심취한 이들에게 목마름을 풀어주는 시원한 단물과 같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종군사진기자, 로버트 카파


강렬하고 생명감 넘치는 사진들


로버트 카파의 사진세계는 전쟁이라는 극한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성의 적나라한 실상에 대한 파악이다. 그는 전쟁을 전문으로 찍는 전쟁사진가로서, 스페인 내란 중에 일약 유명한 존재로 등장하여 일생동안 카메라를 들고 전쟁터만 누비다가 전쟁터에서 최후를 마쳤다. 1913년 10월 22일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로버트 카파는 본명이 엔드레 프리드만인데, 1931년 유대인인 그는 유태인을 탄압하는 독재정권을 피해서 독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베를린 대학에 다니는 한편 울스타인 통신사의 암실당당 조수로 학비를 벌었다. 1932년 러시아의 트츠키가 스탈린에게 축출되어 망명 기에 올랐을 때, 마침 이를 취재할 기자가 없어 대신 나가 취재한 사진이 특종이 되었다. 그리하여 암실 조수로부터 정식 사진기자로 임명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다시 유태인 박해를 피해 파리로 떠나 1935년부터는 로버트 카파로 이름을 바꾸어 보도사진가로서 새로운 활동에 들어간다. [라이프]가 창간된 1936년, 드디어 스페인에서 먼저 전쟁이 터졌다. 드디어 스페인서 먼저 전쟁이 터졌다. 프랑코가 독재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내란을 일으켰고, 인민전선파가 이에 맞서 대항한 것이다. 그는 이 전쟁에 뛰어들어 최전방으로 갔다. 어느 날 공격명령과 함께 인민전선파의 병사 하나가 돌격하기 위해 참호를 박차고 나가는 순간 머리에 총탄을 맞아 그 자리에서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바로 가까이에 있던 로버트 카파는 이를 본 순간 본능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그것이 제대로 들어맞아 이 결정적 순간의 자면은 [라이프]지에 실려 온 세계에 공개 되었고, 로버트 카파라는 이름은 하루 아침에 유명해졌다. 이것이 바로 그가 평생 전쟁사진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운명적인 계기가 되었다. 로버트 카파가 전쟁사진가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띠고 있다. 사진가로서 전쟁에 종군한다는 것은 자기 생명을 담보로 맡기는 위험한 모험행위이다. 자진해서 줄곧 전쟁터로만 뛰어들어 전쟁사진만 전문으로 찍은 것은 마치 외인부대에 자원한 군인들처럼 모험심에 불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진은 유달리 힘차고 강렬하며 생명감이 넘친다. 그리고 도전과 응전의 팽팽한 대치 속에서 감도는 김박감이 고조되어 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위험속에 송두리째 내던져서 환기되는 생명적인 충일감이며, 또한 생존 적인 자기확인 행위이기도 하다. 그는 사진가로서 생명들의 결사적인 대결과 충돌의 소용들이 속에 뛰어들어 생명의 역동성과 솟구치는 존재의식을 온 몸으로 느꼈다. 그래서 그의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생명적 존재의 식에 넘치며, 삶과 죽음의 틈바구니에서 끈질긴 생명의 몸부림을 하고 있다, 그의 사진은 다른 보도사진가들의 다큐멘터리 사진보다 더 직설적이며 현장성이 강하고 호소력이 있다. 로버트 카파의 남성적이고 능동적이며 대담한 성격은 일정한 직장이나 어떤조직체계에 얽매이기에는 너무나 활달한 것이었다. 그리셔 그는ㅁ 보도사진가로 출발한 처음부터 일정한 언론기관에 속하지 않고 프리랜서로서의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그러나 편집자가 주도하는 잡지 제작체계에 그는 많은 제약을 받아야만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자 1947년 까르띠에 브레송, 데이비드 시무어와 함께 새로운 보도사진의 유통방식을 모색하기 위해 일종의 사진운고 은행 격인 '매거넘'을 설립하였다. 이 기구는 보도사진가들이 자구책을 모색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세계적으로유명한 보도사진가들만으로 구성된 엘리트 사진집단이기도 하였다. 1955년 그가 마지막으로 종군한 싸움터는 인도차이나전쟁이었다. [라이프]의 요청으로 현지로 달려간 그는 그해 5월 25일 월맹군이 부설한 지뢰를 잘못 밟아 폭사하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마흔한 살이었다. 로버트 카파는 보도사진가로서의 업적도 길이 남을 만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보도사진의 유통체계를 뒤바꿈으로써 보도사진의 새로운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하었다. 그리고 수동적으로 현집자의 기획과 지시에 따라 작업을 해야만 했던 사진가들이 자신의 취향에 따라 자유롭게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보도사진은 보다 더 개성적이고 전문적인 성격을 띠게 만들었다. 로버트 카파는 비록 단명 했지만 정력적이고 강한 추진력으로 많은 사진들을 찍었으며, 보도사진 계에 기여한 공헌 또한 컸다.














 

 

 

 


 

  로버트 카파는 1913년, 10월 22일,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양복점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가난한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17세 때 유태인 차별 정책과 공산주의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었다. 1931년 독일 베를린에 온 로버트 카파는 정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조국에서 쫓겨났고, 타국에서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할 수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의 이런 처지는 그로 하여금 세계 공통의 언어인 사진의 세계에 몰입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베를린, 알프레드 아이젠슈타트(Alfred Eisenstaedt)의 암실에서 일하고 있었으나 히틀러의 등장으로 더이상 베를린에 머물 수 없게 된다. 1933년에 그는 다시 파리로 왔고, 이곳에서 평생의 연인 겔다 타로(Gerda Taro)를 만나게 된다. 포르투갈 출신의 사진작가였던 겔다는 카파에게 있어 그림자와 같은 존재였다. 이 무렵 카파가 사진을 촬영해오면, 동생 코넬이 암실 작업을 하고, 겔다가 원고를 들고 잡지사를 찾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던 1936년, 스페인 내란이 벌어지자 카파는 겔다와 함께 인민전선파에 가담한다. 그는 평생을 종군 사진가로서 전쟁으로 시작해서 전쟁으로 끝나버린 운명적인 삶을 살았다.

 



로버트 카파와 그의 연인 겔다 타로(Robert Capa and Gerda Taro), 1935년 프랑스 파리, photo by Fred Stein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이름인 카파의 본명은 안드레이 프리드만(Andrei Friedmann)이었지만, 종군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로버트 카파로 개명하였다. 그가 전설적인 종군기자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36년 스페인내란에서 총탄을 맞아 쓰러지는 병사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라이프>지에 실리게 되면서부터이다. 그의 짧은 생애동안 5차례의 전쟁을 취재했는데, 1936년의 스페인 내란의 촬영을 시작으로, 1938년에는 중일전쟁을 취재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에 종군하였으며, 특히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찍은 사진 연작들은 불후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 1948년 팔레스티나의 이스라엘 독립전쟁에도 참여하였으며, 라이프지의 청탁으로 1954년, 5월 25일, 베트남 독립전쟁을 취재하던 도중, 지뢰를 밟아 41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는 기자 정신, 생사를 돌보지 않는 기자 정신을, 그의 이름을 빌어, 「카파이즘」이라 일컫는다. 카파의 연인이었던, 여성 종군기자 겔다 역시, 스페인 전쟁 때, 탱크에 깔려 사망했다고 하니, 그의 운명적인 삶을 짐작케 한다.

 

 

 

어느 인민전선 병사의 죽음(Republican militiaman (Federico Borrell Garcia) at the moment of death. ("The Falling Soldier" / September 5, 1936.)

 

한 병사가 돌격하기 위해 참호 속에서 뛰쳐나가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을 보여준 이 사진은 마침 돌격하는 병사 가까이 있었던 로버트 카파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로 잡아냈고, 이 사진이 1936년, 그 해 창간된,「라이프(Life)」지에 게재되면서, 로버트 카파는 하루 아침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병사의 죽음>은 후세에 연출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마치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이 너무나 리얼한 나머지 실제 사람의 본을 뜬 것이라고 의심했던 것처럼, 인위적인 연출로는 불가능한 것이며, 실제 사진임이 증명되기도 하였다.

 

 

 

 

 



오마하 해안 (Omaha Beach),  1944, 6, 6

 

 

(프랑스의 한 농부가 미국인 병사에게 사이다를 주고 있다.)

-= IMAGE 1 =-

 

바르셀로나 근처 몽블랑(Montblanch. Near Barcelona), 1938년, 10월 25일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의 연합군에 지원하는 현장에서 찍은 사진이다.)



베트남의 하노이 지방 북부, 남딘 (Nam Dinh, South of Hanoi, Vietnam), 1954, 5, 25, 

(이 흑백 사진을 찍은 직후, 발 밑에서 지뢰가 터졌고, 로버트 카파는 더 이상 셔터를 누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