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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체이스 선교사

Joyfule 2008. 10. 2. 00:37



 

채이스는 1905년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Louisville)에서 출생하여 다섯 살에 고아가 되어 숙모 집에서 양육되었다. 15세에 침례를 받고 교인이 되었으며, 17세 때 존슨 성서 대학(Johnson Bible College)에 입학하여 신학을 시작하였지만, 1924년 신시나티 성서 대학으로 전학하여 그곳에서 졸업하였다. 그곳에서 와네타 스미스(Wahneta Smith)양을 만나 결혼하였고, 슬하에 네 자녀를 두었다.
 

1927년 3월에 일본에 도착한 채이스 가족은 카닝햄 선교사 가족과 같이 7년 동안 일본에서 성경 공부 반을 만들어 성경을 가르치며 교회개척에 많은 힘을 쏟았다.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과도 접촉이 잦았으며 카닝햄 선교사가 개척한 동경 한인 교회에서도 일을 했다. 채이스는 카닝햄 선교부에서 사례비를 받고 일을 했는데, 일본에 온지 7년만에 카닝햄 선교사와 사례비 문제로 다툰 후 면직되어 카닝햄 선교부와 결별하게 되었다.
 

카닝햄과 채이스의 분열은 많은 파문을 던졌다. 선교부내에서는 미혼 선교사들(Farnham, Lemon, Schnen)이 사표를 냈고, 10개 처의 일본교회들은 선교부와 단절을 선언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로부터 한국에 파송된 초대 선교사인 J. 미챌 쉘리(J. Michael Shelly)는 카닝햄 선교부에 대해 불신을 갖고 채이스 쪽에 힘을 실어 줌으로써 채이스가 한국에 선교사로 올 수 있도록 도운 것으로 1963년 1월 23일에 해롤드 테일러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나 있다.
 

1936년 한국으로 건너와 서울 게이조 쇼게추조 32-6번지에 위치한 큰 고가와 대지를 영국 해외성서공회로부터 사들여 그곳에서 기독교회 선교부(the Korean Christian Mission)를 설립하였고, 지하실 방을 이용하여 성경공부 반을 열어 지도자들을 육성하였다.

미국에서의 목회경험으로는 루이지애나주 바톤 루지(Baton Rouge)와 캘리포니아주 잉글우드 도우니 레몬 그로브(Inglewood Downey, Lemon Grove)에서 목회활동을 했다. 은퇴한 후에도 필리핀 체부(Cebu)신학교에서 강의를 했고, 미국에서는 설교자가 없는 교회를 찾아 말씀을 전하였다.

채이스는 세계 제2차 대전과 6.25동란과 같은 매우 어려운 시기에 한국에 건너와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특히 그는 성낙소, 성수경, 최상현과 같은 분들을 환원시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초기 지도자들로써 평생을 헌신할 수 있도록 하였고, 1939년에는 힐 요한을 발탁하여 한국에 선교사로 오게 하였으며, 심요한, 박판조, 김문화와도 함께 사역하였다.

1936년 10월 11일 한국에 도착해서 1940년 5월 떠나기까지 채이스 선교사가 한국에서 4년 동안(1936~1940)에 이룩한 선교 업적은 다음과 같다.

1. 선교부 설립 - 1936년 서울 게이조 쇼게추조 32-6번지에 위치한 큰 고가와 대지를 영국해외성서공회로부터 사들여 그곳에 '기독교 선교부'(the Korean Christian Mission)를 설립하였다. 선교부를 설립함으로써 대내외적인 활동을 쉽게 할 수 있었다.

2. 성경공부 반 개설 - 채이스는 선교부 지하실에 성경공부 반을 개설하였는데, 1939년에 약 10여명의 남학생이 등록하였다.

3. 가족의 증가 - 채이스는 한국에 와서 아이 한 명을 더 낳았다.

4. 구호품 전달 - 당시의 한국은 경제사정이 매우 어려운 때었다. 미국의 성도들이 정성껏 모아 보낸 구호품은 춥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복음을 전하는데도 훌륭한 도구가 되었다.

5. 교회개척 - 1939년 힐 요한 선교사 내외가 한국에 왔을 때, 기독교회 선교부 산하 교회들이 서울에 다섯 개가 있었다. 또 채이스는 "한국에 교회당을!"(Chapels for Korea) 이라는 모금운동을 {크리스챤 스탠다드}(Christian Standard) 주간지와 공동으로 벌렸는데, 성과가 좋아 1949년에 약 5만불이 모금되었다. 이 돈은 교회 개척과 교회당 수리비용으로 사용되었다. 채이스는 이 돈을 다 사용하지 않고, 테일러 선교사에게 인계하였는데, 1957년 6월 미국에 보고 된 것에 의하면, 39교회에 도움을 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채이스는 1941년 봄에 한국에 건너와 몇 주간 머무는 동안 선교부 소유지를 전항섭에게 임대하였고, 전씨는 그곳에 난로공장을 세웠다. 그 후로 채이스는 몇 차례 더 잠깐씩 한국을 방문하였다.

채이스는 전국 선교사 대회(National Missionary Convention)를 만든 창설 멤버들 중의 한 사람이며, 대회장직을 역임했다. 그는 또 교회연금제도(Church Development Fund)를 만든 창설이사였고, 산 요세 성서 대학(San Jose Bible College)의 이사였으며, 북미주 기독인 대회(NACC)의 유지회원이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82년 NACC로부터 감사패와 1984년 신시나티 성서 대학 및 대학원에서 동문회상을 수상했으며, 도우니(Downey) 시와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시의 시의원직도 맡았다. 채이스는 1987년 12월 23일 캘리포니아주 로디(Lodi)에서 82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소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