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이한규목사

주님이 임하시는 마음(1)

Joyfule 2015. 10. 29. 09:47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시편(147) 주님이 임하시는 마음(1) (시편 98편 1-9절)

1. 은혜를 기억하는 마음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구원의 은혜에 대해 기뻐하며 찬송하는 고백을 합니다(1절). 그처럼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남이 기억해주기를 원하면 남을 기억해주는 것부터 잘하십시오. 은혜 받기를 원하면 은혜를 오래 기억하는 훈련부터 잘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베푼 은혜를 잊으면 마음속으로 분노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남의 은혜를 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의 은혜도 잊지 말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잊지 마십시오.

 은혜를 기억하는 마음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감사를 아는 마음이 임하십니다. 축복과 행복도 감사를 아는 마음에 주어집니다. 행복한 환경보다 먼저 감사하는 마음을 구하십시오. 성숙함이란 고난과 불편 중에도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믿음이 커지면 감사가 커지고 감사가 커지면 평안이 커집니다. 감사가 충만한 것이 결국 성령 충만한 것입니다. 복된 공동체는 프로그램이나 세미나로 형성되지 않고 거룩한 공통 비전과 넘치는 감사로 형성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커지면 희망도 커집니다.

 삶이 지옥 같이 느껴지는 제일 이유는 환경과 상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감사가 전혀 없는 곳입니다. 감사가 넘치면 그곳이 하늘나라가 됩니다. 상처, 사건, 사고, 질병 등의 절망적인 상황을 감사로 번역하는 탁월한 영적 번역가들이 되십시오. 감사 없이 축복을 기다리는 것은 구름 없이 단비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아의 항아리에 감사의 물을 채울 때 그것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로 변합니다.

 남이 변하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항상 자기 변화가 우선입니다. 자기를 ‘감사하는 자기’로 변화시키면 만족하지는 않아도 초월할 수는 있습니다. 핵심 축복은 만족이 아닌 초월입니다. 초월할 때 만족을 주는 것이 조만간 찾아옵니다. 최고의 영성은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면 하나님이 그 마음이 찾아와주셔서 약할 때 강함 주시고 부족할 때 만족 주시고 가난할 때 부요케 하시는 역사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2. 공의를 나타내는 마음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구원’이 ‘하나님의 공의’를 명백히 나타낸 것이었다고 노래합니다(2절). 하나님은 공의로운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게 함으로 공의를 충족시키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를 통해서 주목해봐야 할 것은 구원이 ‘공짜’라는 사실보다는 구원을 통해 하나님이 명백하게 나타내신 ‘공의’입니다.

 ‘공짜’를 추구하는 마음이 아닌 ‘공의’를 추구하는 마음을 준비하십시오. 성도라고 무조건 좋기만 하면 안 됩니다. 공의를 따라서 지혜롭게 좋아야 합니다. 성도는 ‘호인’은 되어야 하지만 ‘호구’가 되면 안 됩니다. 요새는 호인과 호구가 묘하게 동일시되어 표현될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남편을 호인으로 보지만 그 호인 남편 때문에 속 썩어 미치려는 아내들이 많습니다. 맨날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어리석게 당하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좋게 보면 공의가 서지 않습니다. 좋은 것을 좋게 보는 것이 진짜 좋은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며 품는 의문 중 하나는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꾼들의 상을 둘러엎고 채찍질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사랑이 많은 예수님이 꼭 그렇게 했어야 했을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또한 이런 의문들도 듭니다. “왜 사랑의 사도 요한이 자기 서신에서 이단을 그토록 무섭게 정죄했을까? 왜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무섭게 말했을까? 왜 성경은 그런 내용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기록했을까?” 시간이 꽤 지나서야 그런 장면과 말씀에서 사랑의 실체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공의가 없는 사랑이나 책임의식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을 내세워 공의와 질서와 리더십을 세우지 못하고 ‘열린 것’만 좋아하다가 거의 무장해제 수준까지 열리는 것은 ‘호인의 모습’이 아닌 ‘호구의 모습’입니다. 사람을 사귈 때도 호인 칭호에 도취되어 나쁜 친구를 정리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 나쁜 친구는 과감히 멀리하십시오. 그것은 차별도 아니고 사랑이 없는 모습도 아닙니다. 나쁜 친구를 멀리해야 하나님이 좋은 친구를 주십니다. 성도는 공의로운 호인은 되어도 공의가 상실된 호구가 되면 안 됩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