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김요한목사

주일설교-신앙이 무엇인가요?

Joyfule 2024. 4. 17. 12:43


주일설교-신앙이 무엇인가요?

 

 

  신앙의 사전적인 의미는 믿고 바라보는 것 곧 믿고 앙망입니다

히11:1절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고 실상으로 믿는 것이라고 정의를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실상으로 보는 눈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시편 42편은 신앙이 무엇인가 확실한 대답을 해 줍니다.

만약 우리가 이대로 하지 않으면 그 신앙은 취미생활이나

습관적인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이 잘못되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분을 우롱하고 

농락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제 경험으로 주의 이름을 간절히 호소하는

기도가 없으면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져 행사나 업무에 쫓겨 허둥대고 말더라고요.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자세와 상태가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시편기자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동선을 파악하고 그를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주 안에서 은혜와 진리를 알고 그 길을 따라 나아가는 것이 신앙의 선결조건입니다.

 

신앙은 내 영혼의 목마름을 느끼는 실제적인 상황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

 

다른 대용품으로는 안 됩니다. 생수가 필요한데 콜라로는 결코 해결이 안 되죠.

문제는 땅에 있는 육신의 목마름이 아니라 하늘의 신령한

영혼의 양식과 생수에 대한 목마름임을 아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마5:3) 

영혼의 목마름이므로 도무지 다른 대용품을 갖다 채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영혼의 필요를 알고 계십니다.

이를 두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을 이미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영혼의 양식과 생수가 필요한 것을 이미 아시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영혼의 허기와 갈증을 알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도 참 많이 속고 방황하다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 하나님 안에 발견이

된 자로서 주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외길에 섰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반드시 영혼의 갈급함을 채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알든지 알고 믿든지 결판이 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생수의 남편이신 그리스도를 건너뛰고는 참 예배(요4:24)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8-39)’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에덴에 흐르던 그 강, 에스겔 문지방에서 나온 생수,

새 하늘 새 땅에 흐르는 생명수의 강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안에 흐르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의 갈급함이 실재이면 그 해결책 또한 실제적으로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다 있기 마련입니다.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이 있고 목이 마르면 마실 물이 있듯이 우리 영혼의

갈급함을 주신 하나님이 그 대책을 마련하시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 영혼의 목마름에 대한 그 해결 방법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시42:2)

주께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해결책입니다. 우리는 목회가 사명이며

선교가 사명이고 교회의 일이 사명인 것처럼 생각하여 옆길로 빠져

정작 주님을 믿고 찾고 따르는 가장 핵심적인 사명을 놓쳐버리곤 합니다. 

그래서 히11:6은 하나님이 반드시 계신 것과 그 분을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분임을 믿고 나아가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진리의 성령의 체험이 없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까지는 어느 정도 따라와서

예수를 믿는다, 그 분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고 

고백을 하지만 진리의 지식이 그들에게 없음을 봅니다.

십자가 그 너머에 대해서는 깜깜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십자가 너머부터는 계시의 세계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얻고 그 생명에 의한 의와 거룩으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직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대교회의 취약점입니다.

 

이런 어설픈 신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이겁니다.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42:3)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거죠.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여주기만 하면 믿겠다고 빈정댑니다. 

이 말을 따라 많은 교회들이 가시적인 하나님

곧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쪽으로 기울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더라도 하나님이 계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신사도주의란 말도 생기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말씀을 듣고 믿어야지 보고 믿어서는

온전한 구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때때로 자신의

하나님을 보여 줄 수가 없으니 속이 상해 눈물이 음식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름만 평강인 예루살렘을 보고 우시는 마음과 흡사합니다.

 

오늘 말씀 중에도 시편기자가 속이 상할 대로 상했습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시42:4)

말씀을 증거하다 보면 나는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을 알고 있으나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없는 답답함이 가득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공부를 할 때도 조마조마하고 끝나서도 허탈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표현으로 다른 사람들의 기대치를 다 채워 줄 수 없는 낙망과 불안입니다.

복음을 전하기는 하는데 신앙의 고정관념에 고착이 된 사람을 보고 

내가 부족해서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풍성함과 그 영광스러움에 

대해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마음과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을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2:5)

개정 전의 성경대로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을 도우시는...’이 더 좋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앙망하고 간절히 그 이름을 부르면

주께서 나타나셔서 체면을 세워주시는 것이 사실이며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낙망이 되는 이유는 자신과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 바라라’ 이 말씀은 ‘기다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마 소망이라는 말로 번역을 했나 봅니다.

신앙에는 반드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소망에는 인내가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 구하고 난 다음에는 그 기도가 이루어지길 기다려야 합니다. 

그 얼굴의 도우심이란 우리말로 하면 체면을 세우신다는 뜻입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조롱하는 자들의 소리를 듣고

가만히 계실 하나님이 아닙니다. 반드시 자신의 체면을 세우시고 맙니다.

그 분의 체면을 세우실 때는 우리의 체면도 함께 세우실 것입니다.

오늘 아침도 주님의 대속의 은총을 따라 가서 성령이 내주 역사하는 자리에서

주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며 하나님 아버지께 집중하니 체면을 세워 주십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