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초의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
1782년 1월 5일, 스코틀랜드 북부 노덤벌런드(Nothumberland) 주 모패드(Morpeth)라는 작은 읍 소재지에서 로버트 모리슨이 태어났다. 모리슨의 아버지는 장로로서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고자 노력했고, 교회와 가정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바른 신앙인이 되고자 가족을 이끌었다.
모리슨은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집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모리슨의 어머니는 기도하는 습관을 가르치고, 성경을 끊임없이 들려주었다. 모리슨은 외삼촌인 제임스 니콜슨이 경영하던 학교에 입학하여 초급과정을 교육받았다.
14세에 학교를 졸업한 모리슨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신발 가게에서 수습공으로 일했다. 사춘기에 이른 모리슨은 잠시나마 어두운 거리를 방황했다. 그러나 무분별한 생활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16세 때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왔다. 하나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가 흘린 십자가 보혈을 믿고 받아들이며 거듭났다.
머나먼 선교지로
모리슨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업을 이어 갔다. 하지만 모리슨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대부분을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로 채웠다. 모리슨은 인간이 죄지은 대가로 영원한 형벌인 지옥에 갈 수밖에 없지만, 예수가 쏟은 보혈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넘쳤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가득 차서 예수를 전혀 모르는 지역에 가서 선교하기로 마음먹었다.
19세(1801년)가 된 모리슨은 뉴캐슬 장로교회 레이들로 목사에게 라틴어, 히브리어를 배우고, 조직신학과 속기술을 공부했다. 1803년에는 고스포트(Gosport)에 있는 선교사 아카데미(The Missionary Academy)에 전입했다. 여기서 모리슨은 중국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고, 중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모리슨은 죽음을 각오하고 중국에 뛰어들기로 작정했다.
1805년 23세 때, 모리슨은 런던선교회에 중국 선교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듬해 런던 선교회가 모리슨을 중국선교사로 내정하고 본격적인 선교사 훈련을 했다. 특히 대영 박물관에 있는 중국 서적들을 읽으며 현지훈련을 하고, 의학과 천문학 지식까지 교육했다. 1807년 1월 8일에 목사로 안수받고, 30일에 선교지로 향했다. 중국으로 가기 전, 미국에 들러 여러 선교 사역에 대해 정보를 입수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거대한 대륙, 중국 땅으로 들어가다
그러나 배의 목적지는 중국이 아니었다. 중국 땅에 들어가는 일조차 쉽지 않았기에 모리슨은 미국을 경유하여 중국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중국으로 가는 우회길은 멀고도 험했다. 약 7개월이 넘는 고생스러운 여정을 거쳐 모리슨은 중국 남쪽 포르투갈령 마카오에 도착했다. 그렇게도 그리워하고 죽기를 각오한 땅에 힘 있게 첫 발을 내디뎠으나 모리슨을 환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국 땅에 도착하는 것과 중국 땅에서 선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당시 중국 안에서의 합법적인 선교는 불가하였다. 또한 동인도회사(17세기 초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의 유럽인들이 동방 진출을 목적으로 세운 회사) 소속 상인 이외, 그 누구도 이곳에서 머물 수 없었으며, 이미 인도에서 선교 문제로 인해 크게 어려움을 겪었던 동인도회사는 모리슨의 동태를 감시하며 복음 전하는 일에 압력을 가했다. 뿐만 아니라 이미 마카오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로마 가톨릭 신부들은 모리슨이 마카오에 있는 것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그래서 모리슨은 마카오에서 광저우(Guangzhou)로 거처를 옮겨 이관(중국에 밀입국하였거나 또 입국 목적이 분명치 않는 외국인들을 임시 수용하는 곳)에 머물렀는데, 거기서도 당국의 감시와 이관 규칙들로 인해 그 행동이 자유로울 수 없었다. 졸지에 모리슨은 오랑캐 신세가 되어 수용 생활을 시작한 것과 같았다.
동인도회사에 들어가다
수용소를 나와 중국인과 같이 행세한 것도 잠시, 모리슨은 잠시 쉴 곳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 그리고 중국인을 만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상황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고독과 언제 추방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과 압박에 짓눌렸다. 그래서 그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것은 동인도회사에 취직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809년 2월 20일, 모리슨은 동인도회사의 통역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모리슨의 취직 문제는 선교사가 식민사업과 결부되었다는 문제로 런던선교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가져왔으나, 당시 선교회에서도 모리슨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모리슨은 동인도회사의 일원이 된 이후 중국에서 공인된 지위를 얻게 되어 거주의 권리조차 없어 불안하던 곤경을 벗어날 수 있었고, 동인도회사로부터 받는 500파운드의 봉급으로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여유를 얻게 되었다.
덕분에 그는 일을 하며 번 돈으로 비밀리에 중영사서(中英辭書)의 편찬, 성서의 중국어역 및 교의해설서 저작 등에 힘쓰기 시작했다. 번역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중국의 감시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의 인쇄 작업도 이루어져야 했다. 그리하여 런던선교회에서 파송된 부처와 협력하여 말라카에 대규모 인쇄소를 설립했다. 1818년 이후의 인쇄는 주로 이곳에서 행해졌으며 성경뿐 아니라 정기간행물도 발행하게 되었다. 거기서 인쇄된 성경은 주변 지역으로 배부됐다.
중국 선교의 기초를 설립하다
첫 번째 개종자는 그가 중국에 들어온 지 7년 만에 생겼다. 인내와 수고의 결실이었다. 모리슨은 17년간 최초의 신학문 학교인 영화학당(英華學堂)을 세우고, 성경 등의 문서작업과 광둥, 말라카, 마카오를 왕래하며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1824년, 건강 문제로 영국으로 귀국하였는데, 이때에도 중국 선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해 중국어강좌 등을 개설하여 강연을 했다. 이곳의 학생 중 한 명이 새뮤얼 다이어(Samuel Dyer)로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의 장인이다. 1826년 그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중국과 영국 간의 갈등을 중재하는 일에 힘썼고, 중국어사전 3권, 중국어 신구약성경인 ‘신천성서(神天聖書)’ 등을 남기고 1834년 52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
중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모리슨은 평생을 중국에 헌신하며 중국 선교의 단단한 기초를 설립하였다. 또한 그가 번역한 중국어 한문성경을 들고 이후 수많은 선교사들은 중국으로 들어갔으며, 1866년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선교사는 이 한문성경을 가슴에 안고 조선 땅에 들어오자마자 대동강에서 순교함으로 성경이 한국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모리슨은 생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모리슨의 중국 선교를 두고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모리슨 씨, 중국에서 당신이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그러자 모리슨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정말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동인도 회사 직원으로 중국 내에 거주할 수 있는 신분보장과 약간의 경제적 보상을 받았지만, 모리슨은 본인에게 주어지는 전부를 쏟아부어 중국 선교 사역에 전념했다. 특히 중국어 성경 번역과 출판 사역을 했다. 1812년, 기독교 서적을 출판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에 따라, 선교 거점을 광저우에서 말라카로 옮겼다. 특히 런던선교회에서 파송된 밀느 선교사와 함께 말라카에서, 1818년 외국인에 의한 최초의 신학문 학교인 영화학당(英華學堂)을 세워 기독교 정신을 보급하는 데 힘을 쏟았다. 영화학당은 중국인 최초 기독교 목사를 배출했다.
모리슨은 광저우, 말라카, 마카오를 왕래하며 중국인에게 복음을 전했고, 《중국어 사전》(3권, 1815~23)을 편찬했다. 1809년에 성경 번역을 시작해 1814년 출판한 중국어 신구약 성경인 ‘신천성서’가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중국에서 기독교가 깊이 뿌리내렸다.
모리슨은 중국 최초 기독교 선교사다. 사방에서 우겨싸는, 숨 쉴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며 자신에게 맡겨 주신 선교 사명을 감당했다. 1834년, 52세라는 젊은 나이에 로버트 모리슨 목사는 마카오에서 하나님 품에 안겼다.
(출처 : 양화진선교센타)선교사 열전 /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모리슨의 성경번역 사업]
모리슨의 공헌 중 하나는 성경 번역이었다. 물론 그의 번역본이 나오기 전에 윌리엄 캐리의 동역자 조슈아 마쉬맨의 중국어 성경 번역본이 있었다. 하지만 불완전하여 선교 열정과 문학적 노력의 기념물 정도로 여겨지고, 일반적으로 모리슨의 것이 중국어 번역의 첫 작품으로 인정된다……모리슨이 선교를 시작할 당시 외국에 대한 중국의 태도는 배척의 자세였다……모리슨은 중국에 인접한 마카오에 선교기지를 설립하고 인쇄소를 세워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그의 주된 선교사역은 성서 및 성서와 관련된 소책자를 번역하고 편찬하는 데 있었다. 동인도회사의 반대와 중국 정부의 쇄국정책 속에서……그의 주요 편찬사업으로는 「사도행전」, 「신천성서」, 스코틀랜드교회의 「영국교회의 기도문 번역」등이 있다……그의 중요한 사역 중 하나는 1818년 말라카에 영화서원을 창설한 것이다. 이 학교에서 1818년과 1883년 사이에 40여 명의 학생들이 과정을 이수했고 그중의 15명이 세례를 받았다.
[안승오, 『한 권으로 읽는 세계 선교 역사 100장면 』 (서울: 평단문화사, 2010), 2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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