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부터 조나단 에드워드까지 1.
대 그레고리로부터 샤를마뉴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방 교회는 신학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신학적으로 유력했던 지방은 회교도들에게 정복을 당하였으며, 강력한 희랍 철학은 동방 민족의 세력에 밀려나게 되었다.
이제 신학은 교리적 배경이 없는 북쪽 지방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신학이란 단지 과거의 유산 정도로만 여겨지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샤를마뉴는 국가뿐 아니라 교회도 지배하였다. 교회의 예배, 훈련뿐만 아니라 교리 문제 등까지 간섭하였다. 그의 판단은 실천적인 것, 실용적인 것이냐?가 기준이 되었다.
신학적 암흑의 시대에 교회는 어느새 반펠라기안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신학의 중요성을 모르고, 실천적인 것, 실용적인 것을 강조하는 환경은 반펠라기안이 성장하는 좋은 토양이다. 반펠라기안 저술은 중세에 큰 감화력을 끼쳤고 이 교리가 공교롭게도 ‘어거스틴의 교훈’이라는 명칭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즉, 어거스틴의 가르침이라는 외침 속에서 반펠라기안이 가르쳐지고 있었다. 중세는 그레고리 정신과 교회의 실천적 필요성 때문에 반펠라기안적 경향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게 된다. 드디어 중세는 인본주의적 경향을 가진 반펠라기안의 완벽한 승리로 점철된다.
수도사였던 고트샬크는 어거스틴주의의 가면을 쓴 반펠라기우스주의의 정신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그가 간파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교회의 교리와 실전에 대해서 격렬한 공격을 가하였는데, 그러한 공격은 바로 종교개혁을 시도한 것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1. 종교개혁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교회 개혁 운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위클리프나 후스를 제외하면 교리에 대한 일관된 비판은 거의 없었다. 중세 후기의 개혁 운동은 성직자의 처신 문제, 교회 통치의 오류 등을 대상으로 삼았다. 루터도 처음부터 교리적인 문제로 시작한 것이 아니다.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면서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붙임으로 시작되었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 개혁은 점차적으로 교리적인 방향으로 향하게 되었다. 즉, 종교개혁의 관심은 교리적인 것이었다.
그중에서 특별히 구원론의 문제였다. 루터는 면죄부 매매와 관련한 회개의 개념에 반대하였다. 죄의 문제에 있어서 루터는 ‘우리가 하나님께만 죄를 고백할 의무를 가지며, 고해 성사 같은 것은 단지 인간적인 명령일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어거스틴적이며 바울적이었다. 이러한 관점으로 성경을 보는 루터에게는 당연히 펠라기우스주의와 반펠라기안주의가 거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반펠라기안은 어거스틴과 바울과는 반대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려고 하기 이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 대신 그는, 하나님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저 의롭게 해주시는 분이라고 보고 있었다[...] 루터는 자신이 실천하고 있던 반펠라기안주의에서 어거스틴의 보다 오래된 견해에로 전환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1514년과 1515년 사이에 그가 써놓은 글들 가운데서 간파될 수 있다.
루터는 면죄부 판매를 신학적으로 의심하였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면죄부를 구입함으로써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결정적으로 루터는 교황에게 가장 민감한 돈에 관해 언급했으므로 교황과 등을 돌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거스틴 이후 1000년 이상을 반펠라기안으로 점철된 흑암의 세계에 루터는 어거스틴의 신학을 통해 바울을 보게 되었다. 루터가 만들어 놓은 작은 구멍으로 빛줄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흑암은 너무나 어두웠기에 작은 구멍으로 들어오던 빛은 삽시간에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싸움은 역시나 ‘어거스틴대 반펠라기안’ 교리 싸움이었다.
2. 칼빈주의 vs 알미니우스
종교개혁 2세대인 존 칼빈은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 예언자적 인물인 루터는 자기 사상 대부분을 체계화 시키지 못하고 그 몫은 후대로 넘겼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칼빈은 자기의 신학사상을 체계화 하는데 성공하였다. 칼빈은 독창적인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그도 루터와 어거스틴과 기타 여러 사람들의 것을 물려받았다. 그는 종교개혁에 의해서 새롭게 발견된 원리들을 체계화 하는데 그 누구보다 월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칼빈은 ‘이중적 예정론’을 가르쳤다. 어떤 이는 구원으로 어떤 이는 멸망으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서술한 입장, 특히 신자들이 값없이 선택 된다는 주장을 부정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반대자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공로를 미리 아시고, 그것에 따라서 사람들을 구별하신다고 생각한다[...] 만일...그들이 거기서 불평등을 발견하고 따라서 이 교리를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적어도 그리스도의 예를 생각하고 두려워하여 이 숭고한 신비에 대해서 무책임한 지껄임을 그쳐야 한다[...] 인간은 모두 같은 운명으로 창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는 영원한 생명에, 어떤 이는 영원한 멸망에 이르도록 창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가지 운명 가운데 어느 하나로 창조되어 있는 각 사람은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든가 그렇지 않으면 죽음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번도 말씀을 들어 볼 기회가 없이 죽은 자는 어떻게 되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칼빈에 의하면 선택되지 않는 자들은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거나, 들을 기회가 있어도 마음에 품지 않고 그냥 흘려 보낸다고 하였다. 그러나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그들의 멸망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이지만, 그러한 원인은 인간에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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