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知)와 사랑48.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단념해야 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요, 정당치 못했다.
"리디아."
그는 리디아의 귀에다 속삭였다.
"우린 쓸데없이 괴로워하고 있어. 지금 우리 셋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우린 욕망이 원하는 걸 해야 돼."
리디아가 부들부들 떨며 몸부림을 쳤기 때문에 그의 욕망은 또 다른 한사람에게로 옮겨갔다.
그의 손이 율리에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었기 때문에
율리에는 떨리는 기나긴 탄식으로써 쾌감을 표시했다.
그 소리를 듣자 마자 마치 독약이라도 마신 듯 리디아의 가슴은 질투로 죄어들었다.
리디아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이불을 침대에서 벗겨 던지며 장승처럼 서서 고함쳤다.
"율리에, 가자!"
율리에는 온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셋 다 발각될지도 모를,
그 생각 없는 흥분이 위험스럽다는 것을 깨닫고 아무 말도 없이 일어섰다.
그러나 욕망이 짓밟히고 기만당한 골드문트는
일어나는 율리에를 재빨리 얼싸안고 양쪽 젖가슴에 번갈아 입을 맞추며,
타는 듯이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내일예요. 율리에, 내일 또 만나요!"
리디아는 맨발에다 잠옷 바람으로 서 있어서 추위로 발가락이 얼어붙었다.
그녀는 율리에의 외투를 마룻바닥에서 집어들고
괴롭고도 비굴한 몸짓으로 동생의 몸에 걸쳐 주었다.
어둠 속이었지만 동생은 그것을 알아보고 감동한 나머지 언니와 화해할 마음이 생겼다.
자매는 방에서 소리없이 나가 버렸다.
골드문트는 모순된 감정에 휩싸여 두 자매가 사라진 뒤의 정적 속에 묻혀 있다가
집안이 고요해졌을 때에야 한숨을 쉬었다.
이처럼 젊은 세 사람의 기묘하고도 부자연스런 동침이 있은 다음
골드문트는 온갖 생각이 뒤얽힌 고독과 적막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들도 침대에 들어간 후 아무 말 없이 오직 쓸쓸하게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불행과 모순의 귀신이, 고독과 영혼의 혼란이 집안 전체에 둘러싸여 있는 것만 같았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골드문트는 겨우 잠이 들었다.
율리에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고,
리디아는 한잠도 이루지 못한 채 뒤척이는 사이에 희미한 아침이 찾아들었다.
리디아는 얼른 일어나서 옷을 바꾸어 입고
나무로 만든 조그만 그리스도 상 앞에 무릎을 꿇고 오래오래 기도를 했다.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달려가서 이야기할 것이 있다고 청을 드렸다.
율리에의 순결을 걱정하는 기분과 자신의 질투를 구별하려 들지 않은 채
리디아는 이 사건이 종말을 맺으려는 결심을 한 것이다.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일러바쳤을 때까지도 골드문트와 율리에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리디아는 이 사랑의 모험에 율리에가 관계하고 있다는 것만은 밝히지 않았다.
골드문트가 여느 때나 다름없는 시간에 서재에 나타나자,
평소 같으면 덧신에다 펠트 웃옷을 입고 글쓰기에 한창일 기사가
그날은 장화와 자켓 차림을 하고 칼을 차고 있었다.
골드문트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이내 짐작했다.
"모자를 써!"
기사가 말했다.
"너희들하고 같이 갈 곳이 있다."
골드문트는 못에 걸린 모자를 벗겨들고 계단을 내려가는 주인을 따라 갔다.
안마당을 지나서 바깥으로 나갔다.
살짝 얼어붙은 눈 위로 미끄러지는 그들의 발 밑에서 눈이 바스락거렸고
하늘엔 아직도 아침 노을이 가시지 않았다.
기사는 아무 말도 없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젊은 친구는 따라가면서 몇 번이나 저택을, 자기 방의 창문을,
눈이 쌓인 경사진 지붕을 되돌아보았다.
마침내 그들은 그 모든 것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저 지붕을, 저 창문을, 서재를, 두 자매를 이제 두 번 다시 보지 못하리라.
갑작스럽게 헤어지리라는 것은 오래 전부터 예감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의 가슴은 터질 듯 아파왔다.
이 이별은 그에게 심한 고통을 주었다.
그들은 그렇게 한 시간이나 걸었다.
기사가 앞장 서고 젊은이가 뒤따르면서,
골드문트는 자신이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기사는 어쩌면 그를 죽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골드문트는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위험하지는 않다.
도망치기만 한다면 기사는 단검을 휘두른다 하더라고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
절대로 그의 생명에는 위험이 없었다.
하지만 모욕을 받고 그것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사나이 뒤에서
이렇게 묵묵히 걸어간다는 것이, 이렇게 말도 없이 끌려간다는 것이,
그로서는 견디기가 힘들었다.
마침내 기사가 걸음을 멈추고 섰다.
"이제부터는 너 혼자서 가라."
갈라진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이쪽으로 계속 가거라.
너를 길들인 유랑 생활로 인도할 것이다.
또다시 내 집 가까이에 얼굴을 내밀었다가는 그대로 쏘아죽일 테다.
너에게 보복할 생각은 없다.
내가 좀더 생각이 깊었어야 했어. 너같은 젊은 놈을 내 딸 곁에 두지 말았어야 했다.
감히 다시 돌아온다면 네 생명은 끝이다.
이젠 가라! 하느님이 널 용서해 주시길!"
기사는 버티고 서 있었다.
눈 내린 아침의 희미한 빛 속에 회색 수염에 뒤덮인 그의 얼굴이
그것과 일부가 되어 사라진 것 같았다.
기사는 유령처럼 그렇게 서서 골드문트가 언덕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구름이 낀 하늘에는 붉은 햇살이 점점 힘을 잃어 보이지 않았다.
눈발이 천천히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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