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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知)와 사랑50. - Herman Hesse.

Joyfule 2012. 10. 18. 10:22
 
  
지(知)와 사랑50.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편지는 없었다. 
골드문트는 리디아의 선물을 손에 들고 허공을 달리는 마음으로 눈 속에 멍하니 서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 웃옷을 벗고 재킷을 갈아입었는데, 따뜻한 게 기분이 좋았다. 
그 위에 얼른 웃옷을 껴입고 제일 안전한 주머니에다 금화를 숨기고는 
가죽끈을 맨 다음 들판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이제 좀 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발은 아프고 피곤했으며 온몸이 무거웠지만 농부의 집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 가면 따뜻하게 몸을 녹일 수 있고 우유도 얻어먹을 수 있을 테지만 가기가 싫었다. 
너절하게 늘어놓고 꼬치꼬치 캐묻는 것에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곳간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이른 아침 찬서리와 매서운 바람을 받으며 추위에 쫓기듯 걸어갔다. 
그는 밤마다 기사나 혹은 그 기사가 지녔던 칼이나 두 자매의 꿈을 꾸었다. 
날마다 외로움과 침울한 여신이 그의 가슴을 누르고 놓아주기 않았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그는 한 마을에 이르러 잠자리를 구했다. 
그곳은 가난한 농부 집이었는데 빵은 없고 그 대신 옥수수 스프가 나왔다. 
새로운 체험이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집 안주인이 밤중에 애기를 낳은 것이다. 
골드문트도 그 자리에 있었다. 
짚단에서 쉬고 있는데 농부가 도움을 청하러 왔고, 그는 산파 옆에서 등잔을 비춰주었다. 
생전 처음으로 그는 해산하는 광경을 보았다. 
놀라움과 불타는 시선으로 산모의 얼굴을 보고 뜻밖에 하나의 새로운 체험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그 얼굴에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진통의 비명을 지르며 고통 속으로 나자빠진 여인의 얼굴을 불빛에서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예기치 않던 무엇이 그의 눈에 띄었다. 
울부짖는 여인의 표정은 사랑의 절정에 다다른 여인의 얼굴에 비친 표정과 다를 것이 없었다. 
얼굴에 나타난 커다란 고통의 표정은 크나큰 쾌락의 표정보다 
물론 격하기도 했고 훨씬 더 흉해 보였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었다. 
오만상을 찌푸리다가 잠잠해지는 점도, 이글이글 타오르다가 사그라지는 점도 같았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고통과 쾌락이 형제같이 닮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놀라움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또 다른 무엇을 이 마을에서 체험했다. 
해산한 밤이 지나고 이튿날 아침, 
그가 발견한 이웃집 아낙이 유혹하는 그의 눈짓에 금세 응했기 때문에, 
그 마을에서 하룻밤 더 쉬어서 그 아낙을 대단히 즐겁게 해주었다. 
최근 몇 주일 동안 어지간히 몸과 마음이 자극을 받은 터라 
오래간만에 그의 정욕은 겨우 안정을 얻었다. 
이렇게 머무르고 있는 동안에 그는 새로운 체험을 얻게 된 것이다.
이틀째 되는 날, 빅토르라는 키가 크고 염치도 어지간히 좋은 
한 친구를 같은 마을에서 만났다. 
언뜻 보면 신부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부랑자 같기도 한 그는 
어디서 주워 모은 것 같은 라틴 어로 그에게 인사를 걸어왔다. 
학교 다닐 나이는 벌써 지났지만 유랑 학생이라고 떠들어대면서.
뾰족한 턱에 수염이 난 이 사내는 일종의 성실성을 보이기도 하고 
방랑자의 익살을 섞어 가며 골드문트에게 재빠르게 접근해왔다. 
골드문트가, 대체 어느 학교 학생이었으며 여행의 목적지는 어디냐고 물어 보자, 
이 별난 친구는 연설조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맹세코 말하거니와, 이 사람은 여러 대학에서 수학하고 
쾰른이나 파리에서도 수학한 일이 있었다구. 
그리고 또 라이덴의 학위 논문 중에서 내가 작성한 
'간장의 형이상학' 보다 충실한 내용으로 언급된 것은 없을 겁니다. 
친구여, 그 이후 불쌍한 이 사람은 
견딜 수 없는 배고픔과 괴로운 마음으로 독일 제국을 헤매다닌다오. 
이 사람은 농부의 눈물을 흘리는 자라 불리기도 하며, 
젊은 아낙네들한테 라틴 어를 가르치고 
요술을 부려서 밥을 얻어먹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오. 
이 사람의 목표는 시장 부인의 침대이며, 
까마귀 밥이 되지 않는다면 대승정의 나른한 직무에 
내 몸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를 테지. 
젊은 친구여! 
손을 놀려 입에 풀칠을 하며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은 
그 밖의 다른 생활보다는 나은 것이라네. 
결론으로 토끼 불고기만큼 이 사람의 불쌍한 위 속을 흐뭇하게 해준 것은 없었다오. 
보헤미아 신은 이 사람의 형제라네. 
우리 모두의 아버지는 이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를 길러 주고 있지요. 
하지만 그것을 완성하는 것은 이 사람 자신에 맡겨져 있는 것이라오. 
그저께도 우리들의 아버지는 무정하게 이 사람을 학대하여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는 늑대의 생명을 구해 주려고 하였다오. 
만약 이 사람이 그놈의 짐승을 때려 죽이지 못했던들 
그대는 이 사람과 만나게 될 영광을 입지 못했을 것이오. 
영원한 아멘을." 
이런 종류의 자포 자기적인 익살과 유랑자의 라틴 어에 아직 익숙하지 못한 골드문트는, 
망나니 같은 덥수룩한 모습과 유쾌하지 못한 웃음소리에 
얼마간 겁을 집어먹기는 했지만 유랑자의 어딘가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설득을 당해서 같이 여행에 동참하게 되었다. 
늑대를 때려죽였다는 이야기가 농담이든 아니든, 
둘이 있는 것이 마음 든든하고 무섭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출발하기 전에 빅토르는 그의 라틴 어로 농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해서 
어느 소작농의 집에서 하룻밤 더 묵기로 했다. 
그런데 빅토르는 골드문트가 지금까지 나그네길에 오를 때마다 
농부의 집이나 마을에서 손님으로 대접받을 때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