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세계문학

지(知)와 사랑51. - Herman Hesse.

Joyfule 2012. 10. 19. 10:35
 
  
 지(知)와 사랑51.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그는 이 농가에서 저 농가로 기웃거리며 아무 아낙네나 붙들고 지껄이다가는 
마구간이나 부엌 등 닥치는 대로 들어가서 
어느 집에서나 그에게 무엇인가를 주기 전에는 
그곳을 떠나지 않을 작정인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농부들에게 이탈리아의 전쟁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부뚜막 옆에서 전투의 노래를 불러 주기도 했으며, 
할머니들에게는 관절염이나 치통에 잘 듣는 약을 권하기도 했다. 
그는 무엇이든지 알고 있었고 어디든지 안 가본 데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빵조각이나 호두, 배 쪼갠 것을 잔뜩 얻어 가지고 바지춤에 처넣었다. 
그가 방랑하는 것에 싫증도 내지 않고 사람들을 놀래 주기도 하고, 
환심을 사기도 하고, 잘난 체 뽐내다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기도 하고, 
라틴어 부스러기를 주워모아서는 학자 행세를 하고, 
엉터리 같은 도둑의 암호로 탄복을 시키기도 하고, 
쉴새 없이 이야기하거나 학자 행세를 하는 중에도 
날카롭고 빈틈없는 눈으로 각자의 얼굴과 열려져 있는 책상서랍들, 
열쇠나 빵 덩어리를 눈여겨보는 것을 골드문트는 어이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교활하면서도 어디 하나 빈틈없는 유랑자로 온갖 것을 보고 체험하고 
굶주림에 허덕일 때도, 전신이 꽁꽁 언 때도 자주 있고 
위험에 악착같이 몸을 들이밀고 인색하게 살기 위한 고투를 거듭해 왔기 때문에 
영리해지고 당돌해진 사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나긴 세월 동안 유랑생활을 한 자는 이렇게 되는 것이다. 
언젠가는 이런 사나이와 같이 될 것이란 말이다!
이튿날 두 사람은 출발했다. 
골드문트는 처음으로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유랑을 경험했다. 
그들은 사흘 동안 같이 걸어갔다. 
골드문트는 빅토르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유랑자에게는 세 가지 중요한 사항, 
즉 생명의 위협에 대한 안전과 잠자리의 발견과 식량의 입수에 
만사를 결부시킨다는 습관이 기나긴 세월 동안 본능이 되어, 
유랑하는 사나이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겨울이든 밤이든 어떤 미미한 징조에서도 인가가 가깝다는 것을 알거나, 
숲이나 밭의 어떤 모퉁이에서도 휴식하는 장소 
혹은 잠자리로서 적당한가 어떤가를 자세히 조사하거나, 방에 들어서는 순간 
주인의 빈부의 정도, 그의 친절과 호기심과 염려의 정도를 알아내는 것, 
그것은 빅토르의 기술이 대가의 경지에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었다. 
교훈이 될 만한 여러 가지를 그는 젊은 친구에게 들려주었다.
어느 날 골드문트가 빅토르에게 자기는 그런 빈틈없는 준비 태세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고 싶지는 않다, 
자기는 그런 기술을 조금도 알지 못하거니와 자기가 겸손하게 부탁을 하면 
손님으로서 대접받는 것을 거절당한 일은 극히 드물었다고 말하자, 
키다리 빅토르는 웃으면서 악의 없이 말했다.
"그거야, 골드문트 너라면 잘돼 나갈 테지. 너는 앳되고 예쁘고 순진해 보여. 
그게 너의 훌륭한 숙박권인 셈이야. 
여자들은 널 밉지 않게 보고, 남자들은 이놈은 악의가 없다.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는 않을 거다, 
하고 생각할 테지. 하지만 생각해 봐. 인간은 나이를 먹는 법이야. 
어린아이의 얼굴에 수염이 나고 주름이 잡히지. 바지에는 구멍이 뚫려. 
생각지도 않은 사이에 밉살맞고 환영받지 못하는 불청객이 되어가는 거야. 
젊음과 순진 대신 굶주림만이 모든 걸 대신하게 되지. 
그럴 때를 생각하면 인간은 지금대로만 있을 수 없단 말이야. 
다소 세상을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돼. 
안 그러면 이내 거름더미 위에서 잠을 자거나 개에게 오줌벼락을 맞게 될 거야. 
하지만 보아하니 너는 언제까지고 떠돌아다닐 인간은 아닌 것 같다. 
돌아다니는 놈치고는 손이 너무 곱고 고수머리 또한 너무 탐스럽단 말이야. 
그래서 언젠가는 좀더 편안히 살 수 있는 구멍으로 기어들어갈 거다. 
아늑하고 따스한 침실이라든가, 환경이 좋은 훌륭한 수도원이든가, 
훈훈한 서재로 말이야. 너는 차림이 말쑥한 편이야. 
귀공자라고 해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을 거야."
빅토르는 자꾸 웃으면서 골드문트의 옷을 하나하나 조사했다. 
골드문트는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호주머니 속에 감추어 둔 금화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는 기사의 저택에 잠시 머물렀다는 것과 라틴어 문장을 쓰는 것을 도와주어서 
좋은 옷을 얻어 입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빅토르는 왜 이 추운 겨울에 그런 따스한 보금자리를 떠났느냐고 물었다. 
골드문트는 거짓말을 할 줄을 몰랐기 때문에 기사의 두 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두 사람 사이에 처음으로 말다툼이 벌어졌다. 
빅토르는 골드문트에게 그런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멍청이 같은 인간이라며 이제는 그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골드문트에게 둘이서 산성을 찾아가, 
골드문트는 물론 얼굴을 보여서는 안 되지만 리디아에게 보내는 편지를 
빅토르 자신이 가지고 가서 돈이나 재물을 반드시 손에 넣겠다고 했다. 
골드문트는 빅토르의 이러한 이야기에 반대했고, 
나중에는 화를 내며 그의 이야기를 들은 체도 안 하고 
기사의 이름이나 그곳으로 가는 길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빅토르는 그가 화가 잔뜩 난 것을 보자 
능글맞게 웃으면서 악의는 없었다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봐, 그렇게 신경쓸 것 없어. 
난 그저 자네가 훌륭한 미끼를 놓쳐 버렸다는 것을 말한 것뿐이야. 
하지만 자네는 친구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데에 너무 인색하군 어쨌든 너는 싫단 말이지? 
훌륭한 신사처럼 말을 타고 산성으로 돌아가서 그 아가씨와 결혼할 수도 있을 텐데.... 
젊은이, 자네는 왜 그다지도 귀하신 바보 같은 머리만 가지고 있지? 
할 수 없군. 어쨌든 발가락이 얼어붙을 때까지 함께 걸어가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