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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知)와 사랑53. - Herman Hesse.

Joyfule 2012. 10. 22. 09:30
 
  
 지(知)와 사랑53.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이 유랑자의 죽음은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날이 새자 그는 몸을 덜덜 떨며 빅토르가 흘린 피를 눈으로 깨끗하게 닦아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불안 속에서 정처 없이 헤매었다. 
그의 마음을 가라앉게 하고, 희한과 두려움을 잊게 해준 것은 굶주림, 그것이었다.
눈 덮인 황무지를 헤매며 살 곳도, 잘 곳도, 먹을 것도, 잠조차도 제대로 이룰 수 없게 되자 
그는 마침내 절망적인 생각에 광포하게 변했다. 
굶주림이 그의 온몸에서 야수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몇 번이나 지친 몸을 들판 한가운데 누이고 두 눈을 감고는 이제는 끝장이다, 
잠자고 싶다, 눈속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굶주림은 그에게 조금도 포기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살겠다는 욕망만으로 그저 미친 듯이 달렸다. 
극도의 절망 속에 이성은 사라지고 
생명을 구하려는 힘과 광포한 욕망과 야성의 힘만이 솟았다. 
눈이 쌓여 있는 두송나무 숲에서 얼어붙은 손으로 바짝 마른 조그만 열매를 따서 
혓바닥에 대기도 힘든 씁쓸한 것을 전나무 잎으로 싸서 먹었다. 
맛이 지독하게 아렸다. 
그는 갈증을 덜기 위해 한 움큼의 눈을 집어삼켰다. 
뻣뻣해진 두 손에 입김을 불면서 언덕 위에 앉아 애타게 사방을 휘둘러 보았다. 
보이는 것은 황무지와 숲뿐이고 사람의 발자취는 어디에도 없었다. 
머리 위를 몇 마리의 까마귀가 날고 있었다. 
그는 원망스레 까마귀를 쳐다보았다. 
조금이라도 이 다리에 힘이 남아 있는 동안은, 
그리고 이 피가 한 방울이라도 따뜻할 동안에는 너희들의 밥이 되지 않겠다. 
그는 일어서 무서운 죽음과 싸우면서 달리고 또 달렸다. 
이 마지막 안간힘 때문에 열이 열에 타는 듯한 피로가 몰려왔다. 
수많은 기괴한 생각이 거의 마음을 사로 잡아 어느 때는 거의 들릴락말락, 
어느 때는 큰 소리로 혼자서 뇌까렸다. 
그는 자기가 찔러 죽인 빅토르를 향하여, 
그의 죽음에 커다란 예리한 조롱의 인사를 내던졌다.
 '교활한 형제여, 너의 늑골에는 달빛이 잘 비치고 있느냐? 
여우가 네 옆에서 냄새를 맡고 있지는 않느냐? 
너는 늑대를 죽였다지? 그놈의 목을 물어뜯었나? 
안 그러면 꼬리를 쥐어뜯었나? 너는 내 금화를 훔치려고 했지? 
욕심 많은 돼지 같은 자식! 
하지만 이 귀여운 골드문트한테는 놀랐겠지, 그렇지? 
빅토르, 골드문트는 용케 네 늑골을 찔렀다! 
하지만 너는 언제나 배낭 속에 치즈며 소시지를 가지고 다녔지.'
골드문트는 헉헉거리며 이러한 독백을 외쳤다. 
그는 저 불쌍한 바보같은 한때의 동행자를 비웃었다.
드디어 그는 불쌍한 빅토르의 일은 잊어버렸다. 
그것은 율리에가 그날 밤 그에게서 멀어져가던 모습이 환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율리에를 향하여 사랑의 말을 부르짖고 
천한 말로 유혹하면서 애무를 하며 율리에의 육체를 요구하였다. 
그의 곁으로 끌어당겨 옷을 벗기고 
비참하게 횡사하기 전의 한동안을 같이 지내고 천국으로 가려 했다. 
애원하듯이, 재촉하듯이, 율리에의 봉긋 솟아오른 젖가슴과 
그 다리며 겨드랑이 밑의 곱슬곱슬한 털과 이야기했다.
그는 광야의 눈 속에 숨어 있는 풀밭에 넘어지기도 하고 
고통으로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생명에 타오르는 갈망에 미쳐가면서 
또다른 사람을 향하여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대화 상대는 나르치스였다. 
그는 새로운 생각과 지혜와 농담을 나르치스를 향하여 던졌다.
"나르치스, 당신은 무서운가요? 몸이 떨려요? 무엇을 깨달았나요? 그렇습니다. 
선생님, 세상은 죽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울타리 밖에도 나무 그늘에도 죽음은 기다리고 앉았습니다. 
아무리 두꺼운 벽을 쌓고 있다 해도, 
기숙사나 성당이나 교회라 할지라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죽음이 창문 밖에서 당신을 노리고 있습니다. 
죽음은 웃고 있습니다. 
죽음은 당신네들 모두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한밤중에 당신네들의 창 밖에서 죽음이 킬킬대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을 겁니다. 
찬송가를 불러요! 제단에 정성스레 촛불을 켜 놓으십시오! 
저녁 예배나 아침 미사를 드리고 처방실에 약초를 모으고 서가에는 책을 높이 쌓아 두십시오! 
당신은 단식을 하고 계십니까? 자지도 않고 있습니까? 
죽음의 사자가 손을 써서 뼈다귀만을 남기고 모든 것을 당신에게서 빼앗아갈 겁니다. 
이봐요, 나르치스! 빨리 달아나십시오. 
뼈를 단단히 붙드십시오. 뼈라도 흩어지지 않게.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뼈를 꽉 쥐고 있지 않으면! 불쌍한 인간의 뼈여! 아아! 불쌍한 인간의 창자여, 
위여! 아아! 가련한 두 개골 밑의 뇌수여! 모두 다 없어져 버립니다. 
모든 게 전부 끝장입니다. 
나무 위에서 까마귀들이 기분 나쁜 울음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사나이는 지금 자신이 어디를 향해 달리는지, 
어디에 있는지, 누워 있는지, 서 있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는 덤불 위에 쓰러지기도 하고 나무에 부딪히기도 하면서 
손으로는 쌓인 눈과 가시를 무의식적으로 쥐었다. 
그러면서도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의지가 
무엇보다도 강해서 그를 앞으로 내닫게 했다. 
마침내 그가 정신을 잃고 기절해 누워 있던 곳은 며칠 전 유랑 학생 빅토르와 만난 곳, 
밤중에 산모 옆에서 불을 들고 있었던 바로 그 조그만 마을이었다. 
그는 거기에 쓰러졌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그를 빙 둘러싸고 수군거렸으나, 
그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그때 그와 잠깐 사랑을 나누었던 여자가 그를 알아보고 그 형색에 놀랐다. 
그녀는 남편한테 욕을 얻어먹어 가며 측은한 마음에서 
생명이 다하는 그를 마구간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