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知)와 사랑67.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골드문트는 어떤 보이지 않는 감각으로 자신이 예술가적 기질의 비밀이나
예술에 대한 일시적이며 과격한 증오심 같은 것을 어슴푸레 짐작하고 있었다.
생각도 없이, 막연히 감정적인 기분에서 여러 가지 비유의 형태로 그렇게 짐작을 하고 있었다.
즉 예술은 아버지의 세계와 어머니의 세계의 결합, 정신과 피의 결합이라는 것을.
예술은 가장 감정적인 세계에서 시작하여 가장 추상적인 세계로 흘러갈 수가 있었다.
혹은 순수한 관념의 세계에서 시작하여 가장 풍부한 피의 살덩이로 끝날 수도 있었다.
정말 숭고한 예술 작품, 교묘한 마술일 뿐 아니라 영원의 비밀로 가득 차 있는 예술 작품,
이를테면 선생이 만든 성모상과 같은 예술 작품,
너무나 완벽해서 오류가 하나도 없는 순수한 예술 작품,
그런 작품은 그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그리고 부드럽게 웃음 짓는 이중의 얼굴을,
그 남성적이며 여성적인 면을, 본능적인 것과 순수한 정신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만약 골드문트가 어느 때든 인류의 어머니 이브의 형상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는 날에는
그 이중의 얼굴을 가장 잘 표현해낼 것이다.
골드문트에게는 예술과 예술적 활동 속에서만 가장 심오한 그 대립을 융화할 가능성,
혹은 그의 성질의 분열을 상징하는 훌륭하고 언제나 새로운 비유의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예술은 결코 순수한 선사품은 아니었다.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어디서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예술은 수많은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었다. 예술은 희생을 요구했다.
골드문트는 3년 이상이나 애정의 쾌락 다음으로 알고 있는 최고의 불가결한 것,
즉 자유를 위해 희생되었다.
자유와 방랑, 유랑 생활의 자유 분방함,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립성,
이런 모든 것을 그는 포기했던 것이다.
그가 간혹 발작을 일으켜 작업실이나 작업을 소홀히 한다든가 하면
사람들은 그를 변덕쟁이에다 고집불통에 이기적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런 생활이 가끔 그를 참을 수 없는 경지에까지 몰고 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굴종적 생활을 의미했다.
그가 복종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은 선생이나 장래, 생활의 필요성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예술 그 자체 때문이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매우 정신적인 것 같은 예술도 얼마나 많은 하찮은 것들을 필요로 하는가!
예술도 비바람을 막는 지붕이나 연장, 통나무, 점토, 물감을 원했고 모두 돈을 필요로 했다.
또한 노동과 인내도 필요했다.
그는 예술을 위해 야성적인 숲속의 자유를, 허허벌판의 도취를,
위험하기는 하지만 쓰디쓴 쾌감을, 불행에의 긍지를 희생하고 말았다.
그는 숨이 막힐 것 같은 고뇌 속에서도
다시금 새롭게 자기의 희생을 바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이미 희생으로 바쳐진 일부분을 후에 다시 생각해 냈다.
그는 현재의 노예적인 질서와 뿌리를 내린 생활에 대해서 사랑과 연관성을 가진
일종의 모험이나 경쟁 상대와의 격투로써 조그만 복수를 했다.
감금된 그의 본성인 야만성과 억압된 힘은 온통 들고 일어서서 탈출구를 찾아 헤맸다.
그는 무법자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했는데 심지어는 그를 무서워하여 피하는 이도 있었다.
처녀를 찾아가는 길목이나 무도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별안간 어두운 골목길에서 습격을 받아 몇 대 얻어맞는 때도 있었다.
이럴 때 그는 으레 번개처럼 날쌔게 몸을 솟구쳐 막아 내며 공격을 취했다.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놈을 때려눕히고는 주먹으로 턱밑을 한 대 갈기곤 했다.
그러고는 머리카락이나 멱살을 쥐어잡았다.
이렇게 하면 침울한 기분을 잠시 동안 잊을 수 있었고
그런 것들은 또 여자들에게 호감을 사기도 했다.
그러한 모든 사건들이 그의 일상들을 풍요롭게 채워 주고 있었다.
사도 요한의 제작이 계속되고 있을 동안에는 모든 일에도 의미가 이었다.
작업은 오래 끌었다.
얼굴이나 손발의 모형을 제작하는 맨 마지막의 미묘한 작업은
엄숙하고 끈기 있게 정신을 집중시켜야 했다.
직공들이 일하는 작업실 뒤켠의 조그만 통나무집에서 그는 일을 끝마쳤다.
날이 새자 조상은 완성되었다.
골드문트는 비를 꺼내어 집안을 말끔하게 쓸었다.
요한의 머리카락 속에 쌓인 나무밥을 하나 남기지 않고 조심조심 털어 냈다.
그리고 그 앞에서 한참 동안을 서 있었다.
그는 흔히 경험할 수 없는 위대한 체험의 감정에 엄숙하게 젖어 있었다.
한평생을 사는 동안에 이런 감정을 아마 한번쯤 더 겪을 수가 있을는지,
어쩌면 이것으로 끝맺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결혼식날이나 기사로 임명되는 날에,
여자라면 첫 해산을 한 다음에 이 같은 감동을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것은 드높은 감격이며 심오한 엄숙함이지만
동시에 벌써 그 숭고한 단 한 번의 체험이 지나가서,
틀에 박힌 평상시의 생활에 휩쓸려 들어가고 말 것을 은근히 두려워하는 그런 감정이었다.
그는 그대로 선 채 고개를 들어 무엇을 기웃거리는 얼굴,
아름다운 사랑의 사도처럼, 꽃봉오리가 방긋 웃는 듯한 미소,
고독하고 적막한 헌신과 경건으로 아로새긴 표정....
이런 모습의 형상에서 그의 소년 시절의 지도자이며 친구인 나르치스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토록 아름답고 경건하고 정신적인 얼굴, 허공에 뜬 것 같은 날씬한 이 모습,
품위와 믿음의 상징인 듯 위로 쳐들어진 기다란 두 팔....
이 온갖 것들은 젊음과 내면적인 음악에 충만해 있으면서도 번뇌와 죽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절망과 혼란과 반항은 알지 못했다.
그 영혼은 그런 고귀한 표정의 이면에서 즐거움이나 슬픔을 가지고 있겠지만
순수한 균형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 영혼은 너무 순수하여 조화에 시달리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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