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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신앙(청교도들은 누구이며 무엇이며 청교도 신앙은 어떠한 것인가?) 1.

Joyfule 2014. 7. 5. 00:09

 

 

 

 청교도 신앙(청교도들은 누구이며 무엇이며 청교도 신앙은 어떠한 것인가?)


청교도 주의는 16세기와 17세기의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시대가 허용했던 것보다 더 발전된 영국 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추구한 운동이다. '청교도'라는 말 자체는 경멸적으로 남용된 불확실한 말이었다. 1568년에 런던에는 재침례파 회중들이 많았었다. 그들은 스스로 청교도 혹은 흠 없는 주님의 어린양들이라고 불렀다. 청교도란 용어는 이들과 관련해서 처음으로 사용됐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청교도들의 강조점은 개인 경건과 생활 전반에 걸친 실제적인 거룩이었다. 청교도라는 말은 이처럼 철저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쓰여지기 시작했다. 경건한 자들 혹은 명칭만의 교인이 아닌 자들을 청교도라고 칭하였다. 또한 복음을 귀히 여기고 복음 전파에 힘쓰는 자들을 청교도라고 칭하였다. 성경의 경고처럼 경건한 자들은 그들의 거룩한 삶 때문에 놀림당할 것을 각오해야 했다. 그래서 당시의 경건한 교인들에게는 '흥을 깨는 사람' 혹은 '청교도'라는 별명이 붙어 다녔다.


우리에게 청교도가 필요한 이유로 그들은 일상생활의 통합을 이루었다. 그들은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는 감정을 분발시켰다. 율법주의에 빠짐이 없이 율법 지향적이었고, 수치스러운 방종의 경향이 없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표현하였다.
타락한 인간 심령의 부정직성과 기만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변치 않는 마음가짐으로 겸손과 자기 불신을 교화, 영적으로 보이지 않는 흠들과 숨어 있는 마음 속의 악들을 찾기 위하여 정규적으로 자신을 검사하였다.


청교도의 결혼 윤리는 지금 당장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배우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왜나하면 그러한 사랑은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있어 가장 좋은 친구로 견실하게 사랑할 수 있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도움으로 후에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데로 나아가게 되는 배우자를 찾는 것이었고, 배우자는 서로의 구원의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청교도들은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로 자녀들을 훈련시키고, 자녀들의 육체와 영혼을 함께 돌보며, 근실하고 경건하고 사회적으로 유용한 성인의 삶을 위해 자녀들을 교육하였다.
청교도의 가정 생활 윤리는 질서와 예의와 가정 예배를 유지함이 기초가 되었다. 친절과 인내와 언행 일치와 격려의 태도는 가정에서 필수의 덕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가정에서의 어려움과 실망들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런 어려움과 실망들 중 어느 것에 의해서도 풀이 꺾이거나 마음이 상하지 않는 성숙의 모범을 보였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다른 모든 것들을 그분과 맺는 관계를 따져서 평가하는 것이 청교도들의 습성이다. 청교도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을 영원 무궁히, 그리고 저 밑바닥으로부터 만족시키실 수 있다고 믿었다. 존 윈스롭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하늘의 소망만이 진정한 위로와 안식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으로 인한 위로가 아닌 다른 것을 더 즐거워함으로써 마음을 번민에 빠지지 않게 하기로 작정했다."
사무엘 윌라드는 하나님이 "종교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말한 후에, "그분을 아는 지식이 가장 먼저 추구해야 할 바"라고 결론지었다.


청교도들에게 하나님 중심의 삶은 영적, 도덕적 성결을 삶의 우선 과제로 삼는 것을 말한다. 백스터는 "하나님 나라에서 성결이 최고 덕목이요 추천 사항이다. 고귀한 것과 사특한 것 사이에는 확연한 구분이 지어져야 한다"고 썼다.
청교도의 특징은 영적 우선 순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중대 사안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중대 사안이란,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 안에서 회심하는 영혼, 사죄, 영생, 하나님을 친근히 함, 그리고 거룩한 생활이었다.
청교도는 모든 삶이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다는 통찰에 의해 선 사상이요 운동이다. 청교도들은 동시에 두 세계에 살았다.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와 지상적이고 물리적인 세계이다. 청교도들은 이 두 세계를 똑같이 실재(實在)로 취급했기 때문에, 거룩한 삶과 세속적인 삶 사이에는 어떤 틈바구니도 없었다. 한마디로 모든 삶이 거룩했던 것이다.


존 코튼은 이렇게 이론적으로 말한다.
"영적인 삶은 물론이고 공민으로서 이 땅에서 사는 삶 까지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 그분은 그분을 믿는 믿음의 역사가 미치지 않아도 좋은 치외 법권 지역을 인정하지 않으신다."
토머스 구지는 그리스도인들이 "마음과 열심을 영적으로 승화하여 이 땅에서조차 천상의 심령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청교도는 삶의 전체성을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한 공로를 가지고 있다.
청교도는 지상적인 일들을 신성하게 처리해 나간 사람들이다. 그들은 때로 지상적인 일들을 멀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거기에 거룩함을 불어넣기도 했다. 삶에서 거룩함을 불어넣지 못할 만한 영역은 없다.


삶의 전영역에 걸친 경건이 청교도들의 목표였다.
종교 개혁자들처럼 청교도들도 성속 이분법을 거부했다. 청교도들은 모든 직업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순종하며(봉사를 통하여), 이웃 사랑을 나타내는 장(長)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직업에 필연성을 불어넣었다.
나다니엘 매더(Nathaniel Mather)는 하나님의 은혜로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모든 활동이 영화(靈化)된다. 이를테면 아내와 아이를 사랑하는 일도 은혜를 드러내는 활동이 되고, 먹고 마시는 일도 순종의 일이 되므로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고귀한 일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청교도들에게 삶의 모든 영역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 그들의 모든 목표는 매일 하는 일을 하나님을 향한 종교적인 헌신과 통합시키는 것이었다. 토머스 게이테커(Thomas Gataker)는 성속이 서로 마찰하거나 충돌하지 않음을 이런 글로써 밝혔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모든 세상 직업일랑 당장 벗어버리고...... 오로지 기도와 묵상에 전념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다른 일들과 더불어 소명을 붙들고, 다른 일들과 동시에 소명을 좇아야 한다."
청교도들의 목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지 이 세상의 어떤 노동에 갇혀서만이 아니라 그 노동을 통해서이다.

 

존 코튼의 글에서도 같은 사상이 엿보인다.
"진정으로 믿는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자기 소명을 따라 산다. 영적 생활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시민적인 생활까지, 아니 더 나아가서 모든 생활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삶의 의무에서 면제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코튼 매더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일에 종사하는가뿐 아니라 어떻게 종사하느냐에 관해서도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직업을 그리스도인답게 수행하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한다."


윌리엄 퍼킨즈는 그의 고전적인 저작 사람의 소명 또는 부르심에 관한 논문(Treatise of the Vocations or Callings of Men)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명 또는 부르심이란 일종의 생활 자세로서 공동선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위임 또는 부과하신 것이다...... 각계 각층, 남녀 노소,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준행해야 한다.
소명 교리는 미국 청교도에서 조금 더 부각된다. 코튼 매더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외 없이 소명을 갖는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 필생의 과업으로 알고...... 진력해야 할 각별한 사업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존 코튼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
"믿음은 우리 마음을 확실한 소명을 따라 살도록 자극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이 은혜 베푸시는 방법을 바라보자마자, 확실한 소명과 직업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경주하기 시작한다.
청교도적 소명 개념이 끼친 영향 중의 하나는, 일하는 사람을 하나님을 섬기는 청지기가 되게 했다는 점이다. 사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일을 맡겨 주시는 분이다. 이렇게 본다면 일과 인격을 별개로 취급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더구나 일의 중요성은 일 자체에 있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과 일하는 사람이 맺고 있는 인격적 관계를 겉으로 드러내는 수단이다. 어떤 청교도 문헌에는 "우리의 소명이 무엇이든, 그 소명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불러 일을 맡기시는 분이라면, 그런 일은 그분에 대한 봉사일 수 있다.

 

 존 코튼은 이렇게 표현했다.
"사람을 섬김으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마치 하나님 앞에서 그 일을 하듯이 신실하게, 그리고 마치 하나님의 일을 하듯이 일한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길과 일을 인정하실 것임을 알기에 마음 편히 일한다."
청교도들이 보기에 받은 바 소명을 행한다 함은 곧 하나님 앞에서 일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의 소명 교리가 가져다 준 또 다른 현실적인 결과는 직업에 만족을 느끼게 했다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소명에 충실해야 함을 굳게 믿었다. 천직이란 가볍게 결정할 것도, 쉽게 포기할 것도 아니었다. 청교도들의 소명관은 마음 내키는 대로 이직(離職)하는 형태에 제한을 가한다. 대부분의 청교도들이 정당한 경우에라도 직업을 옮기지 못한다고 믿지는 않았지만, 그런 관행을 분명히 경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