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급교육과정 |
김창환 |
<3> 성 경
무오성
성경은 스스로에 대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딤후 3:16)'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최근을 제외하면, 성경이 신앙과 도덕의 문제에 있어서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는 무류성(infallibility)뿐만 아니라 모든 역사적, 사실적 문제에 대해서도 오류가 없다는 무오성(inerrancy)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20세기 신학에서는 이것을 부인하거나 타협하려는 경향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러나 프랜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는 성경의 무오성 문제를 복음주의의 분수령이라고 지적하며 '성경의 완벽한 권위에 대해서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면,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신학적인 의미와 완벽한 인간 생활을 영위하는 방법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성경이 오류를 포함한다고 타협하기 시작하면 그들이 비록 복음주의를 계속 표방한다 할지라도 그 복음은 기반을 둘 곳이 없으며 종국에는 공허해질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성경이 신앙과 도덕의 문제에 대해서 무류성을 지니지만 역사적, 사실적 문제에 대해서 무오성을 갖지는 않는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지지되기 어렵다. 첫째로 신앙은 역사적인 사실에 기반하고 있으므로 신앙과 도덕의 문제를 역사적, 사실적 문제와 분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둘째로 예수님은 구약의 역사적 사실들을 인용하면서 그 권위를 완전히 인정하셨다.
여기까지의 모든 논의는 독자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가정 하에 이루어졌거니와 여기에서 다시 독자가 성경의 무오성을 받아들인다고 가정하겠다. 물론 무오성이 주장되는 것은 원본이며, 사본이나 번역에 대해서는 무오성을 주장하기 어렵다.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은 성경이 어떤 주제에 대해서 명확하고 세세한 설명을 제공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는 성경이 과학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의미도 아니다. 다만 성경의 역사적, 사실적 진술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진실되게 기록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성경은 무오하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고 이해한 바가 무오한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적절히 해석되면 무오하다. 그러나 적절히 해석한다는 것이 그리 만만치는 않다.
해석의 문제
'성경 해석사는 성경 오석사'라는 말이 있다. 다소 과장이겠지만 성경 해석의 역사는 성경 해석상의 오류의 역사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아주 많은 경우에 성경은 알레고리적으로 해석되었는데 그 가운데 적지 않은 해석은 아주 터무니없다. 예컨대,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행한 여정은 사실상 갈대아(감각적 이해)를 터나 하란에서 멈춘 스토아 철학자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하란은 '구멍'을 의미하는 것으로 구멍, 곧 감각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는 것의 허무함을 상징하며 그가 아브라함이 되었을 때 그는 참으로 계몽된 철학자가 되었고 사라와 결혼한 것은 추상적 지혜와 결혼한 것에 해당한다는 식이다. 어떤 랍비들은 초문자주의 혹은 축자주의를 발전시켰는데, 본문의 세부사항에 대한 철저한 헌신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본질적인 것을 상실하였다. 성경 본문의 모든 문법적 현상(용어법, 생략 등)은 해석자에게 중요성을 지닌다는 확신에 근거해서 랍비들은 기상천외한 해석을 이끌어냈다. 20세기를 보면 자유주의 신학, 신정통주의 신학, 불트만(R. Bultmann)의 신학 등은 모두 나름대로의 해석체계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성경의 무오성과 양립하기 어렵다.
잘못된 성경 해석에 대하여 성경 스스로도 경고하고 있으나(벧후 3:16) 어떠한 형태로든지 해석을 하지 않고는 성경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 오류를 피하는 것은 정말로 어렵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무런 편견 없이 성경을 읽을지라도 번역에 사용된 단어가 가지는 뉘앙스가 원문에 사용된 단어와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도 만만치 않다. 인간 지성만으로 성경을 적절히 해석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성경을 적절히 해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조명하심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하심이 있을지라도 해석과정에서 인간지성이 개입하므로 그 해석이 완전하다고 믿기는 여전히 어렵다.
누군가 성경을 인용하고 설명이나 주장을 펼 때, 그가 어떤 형태로든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이 무오하다고 할지라도 성경 해석은 다르다. 갈릴레오(Galileo)가 말했듯이 '성서는 오류를 범할 수 없어도 성서 해석자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여러 가지로 오류를 범한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다
바로니우스(Baroniu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성경은 우리가 하늘로 가는 길을 말해 주지, 결코 하늘이 어떻게 운행하는지 말해 주지는 않는다.' 이 말은 성경의 무오성과 배치되지 않는다. 그의 요점은 성경이 천체의 운행에 관해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초점을 맞추거나 그것을 설명할 의도가 없다는 것이다. 명백히 성경은 과학적 지식을 전달하도록 의도된 것은 아니다.
성경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적응(accommodation)되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실 때에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눈높이를 낮추신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쓰여졌으며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에게 익숙한 것들을 사용한 비유를 통해 전달되었다. 성경이 적응되었다는 것은 성경의 무오성과 배치되지 않는다. 그 적응성이 표현형식 뿐만 아니라 내용에까지 미친다는 자유주의의 견해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성경은 근대과학이 없던 시기에 살던 사람들에게도 적응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성경이 고도의 과학적 진술을 하고 있으리라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난 절에서 성령의 조명하심이 없다면 성경을 적절히 해석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위에서 성경은 과학적 지식을 전달하도록 의도된 것은 명백히 아니라고 하였다. 아마도 우리는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이 원래 전달하도록 의도하신 내용을 해석하려 할 때는 성령의 조명하심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적인 내용처럼 원래 의도되지 않은 내용을 성경에서 끌어낼 때 성령의 조명하심을 얼마나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런 종류의 해석을 할 때는 오류의 가능성이 커질 것임에 틀림없다.
프랜시스 쉐퍼는 다른 사람들이 이 말을 하는 것을 듣지 못했던 때에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다'라는 말을 시작하였다. 그가 그런 말을 한 의도는 예컨대 우리가 성경에서 우주에 대한 포괄적인 진술을 얻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다른 의미로 쓰고 있다고 쉐퍼는 불평한다. 즉 성경은 과학이 관심을 두는 영역에 대해서는 아무런 확증도 해주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인다는 것이다. 쉐퍼는 분명하게 '성경은 과학이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얘기해 주고 있다'고 말한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지만 과학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무오하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가지 위험성을 주의해야 한다. 하나는 성경을 과학책처럼 사용하는 위험이며, 또 하나는 성경이 과학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여기는 위험이다.
성경과 과학 이론의 연결
찰스 험멜(Charles Hummel)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내가 접할 수 있었던 몇 권의 책들은 성경의 과학적 신빙성을 입증하려고 시도하였으며, 그 결과 나는 그 책의 메시지를 경청하게 되었다. 그런 논증으로 무장하고서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 과학을 공부하여, 회의주의적인 친구들을 변화시키고자 했다'고 썼다. 그러나 그는 결국 깨달았다. '과학적 법칙들은 개정되기도 하고 버려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현대과학과 일치하는 데서 그 신빙성의 근거를 찾게 되면, 그 과학적 이론이 묵은 것이 될 때, 결국 성경도 그 과학 이론과 함께 역사적 유물로 남고 말 것이다.'
특정 성경 구절과 특정 과학이론을 연결시키는 일은 확실히 위험하다. 이런 연결을 시도하는 사람은 보통 이중의 착각 속에 빠져 있기가 쉽다. 그 첫 번째는 과학은 확실하다는 것이고, 그 두 번째는 자기가 이해하는 성경의 의미가 어떤 해석을 거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원래 의미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모두 잘못되었음을 이미 논하였다.
만일 과학 이론과 성경을 결부시키는 것이 적절치 못한 일이라면 성경은 항상 어떠한 과학 이론과도 양립할 수 있는, 아마도 과학적으로는 공허한 그러한 방식으로만 해석되어져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다만 성경을 과학적인 측면에서 해석할 때에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음을 명심하고 가능한 여러 가지 해석 중의 하나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혹시 그 해석이 과학적으로 적절치 않은 것으로 판명될 때에 사람들은 성경 해석에서의 오류와 성경 자체의 오류를 혼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과 과학 이론을 조화시키고자 할 때 성경 해석과 과학 이론 둘 다 임시적이고 버려질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하겠다. 즉 성경과 과학이 배치되는 것처럼 보일 때는 성경 해석이 잘못되었거나 아니면 과학 이론이 잘못되었거나 또는 둘 다일 것이다.
세계관과 세계상
호이카스(R. Hooykaas)는 '성서는 특정한 세계관(world view), 곧 창조주에 대한 세계의 절대 의존사상을 견지하고 있지만, 명확한 세계상(world picture)은 보이지 않는다'고 썼다. 세계관과 세계상의 구별은 그리 간단하지 않지만 우리의 논의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에 기준해서 말하자면 세계관은 성경이 원래 말하고자 의도한 것에 포함되나 세계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창세기 1장을 보자. 창세기 1장에 분명히 나타나는 세계관과 상대적으로 분명하지 않은 세계상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창세기 1장은 해석상의 어려움과 논쟁점이 많은 부분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였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만물 위에 뛰어나시고 또한 주권을 가지셨다는 점을 혼동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것이 창세기 1장이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세계관이다. 반면에 창세기 1장에 나타나는 '날'이라는 단어가 24시간인지 또는 더 긴 시간인지 또는 심지어 어떤 시간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는 한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매우 복잡하다. 또는 하나님께서 생물을 '종류'에 따라 만드셨다고 했을 때의 그 '종류'는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도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세계상에 해당한다.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확고한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라. 이 세계관에 있어서는 성경 자체를 제외하고는 다른 어떠한 것의 도전도 허용하지 말라. 그리고 이 세계관으로 다른 모든 것을 판단하라. 그러나 성경에서 세계상을 끌어내는 것은 권장할 만한 것은 아니다. 어떠한 과학 이론과 어떠한 성경 해석을 조화시켜 함께 주장하는 것은 가능하겠다. 이 때 성경 해석을 통해 제시된 세계상은 성경적 세계관과 같은 확신을 가지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과학적 발견만으로도 세계상은 도전 받을 수 있으며 필요하다면 성경 해석을 새로 해야한다. 그러나 원래 제시되었던 성경 해석-과학 이론의 짝이나 새롭게 나타난 짝이나 그 사고방식이 성경적 세계관에 부합하는지 검토되어야 한다. 성경에서 세계상을 끌어내려 하지 말며, 성경 이외의 곳에서 세계관을 끌어내려 하지 말라.
생각해 볼 문제들
1. 본 과정에서 인용된 모든 성경구절들을 다시 한 번 살펴 보라. 본 과정이 그 구절들을 적절히 해석하고 있는가?
2. 성경을 읽고 그 이해한 바를 확신할 수 없다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3. 세계관과 세계상을 엄밀히 구분하는 것이 가능한가?
추천도서
Francis A. Schaeffer, 윤두혁 역,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생명의 말씀사, 1987.
Francis A. Schaeffer, 권혁봉 역, 『창세기의 시공간성』생명의 말씀사, 1974.
Francis A. Schaeffer, 김원주 역, 『궁극적 모순은 없다』생명의 말씀사, 1995.
Charles E. Hummel, 황영철 역, 『과학과 성경, 갈등인가 화해인가?』IVP, 1991.
James M. Boice ed., 황영철 역, 『성경의 무오설』생명의 말씀사, 1983.
Bernard Ramm, 정득실 역, 『성경 해석학』생명의 말씀사, 1974.
<4> 기 원
중요성
마르키 드 사드(Marquis de Sade)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외설문학의 선구자로 새디즘(Sadism)이란 말이 그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그는 단순히 외설적인 내용을 쓰는 데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것의 - 예를 들어 새디즘의 - 정당함을 주장하였다. 그는 창조자가 없이 자연이 그저 존재하고 어떤 초자연적인 인격의 개입 없이 자연에서 사람이 나타난 것이라면 그 결론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었다. '자연이 우리 남자들을 가장 강한 자로 만들었으므로, 우리는 여자를 우리가 기뻐하는 대로 다룰 수 있다'고 사드는 썼다. 그리고 그의 전제를 받아들이면 그의 결론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노벨상 수상자인 자크 모노(Jacques Monod)는 『우연과 필연』이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서 그는 '오직 우연만이 생물 생활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혁신 곧 모든 창조의 원천이다. 순수 우연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나 맹목적이며, 바로 진화의 거대한 건물의 기초에 놓여 있다'고 썼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철저한 고독, 자신의 근본적인 고립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그는 마침내 자기가 집시처럼 낯선 세상의 언저리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세계는 그의 음악을 듣지 못하는 세계로서 그의 희망에 무관심하여 그가 고통하든지 그가 범죄하든지 상관하지 않는다'고 썼다.
이상의 예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기원하였는가에 달려있다는 점이다. 정체성의 문제는 결코 기원의 문제와 분리되지 않는다.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모든 관점이 기원의 문제에 어떠한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과학적 관점
과학의 주류는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특히 모든 생물들이 어떤 의도와 목적이 없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러나 이는 과학의 결론이라기보다는 전제에 가까운 것이며 입증된 바 없다. 이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면 논의는 의도와 목적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와 상관없이 주로 '과학'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쪽으로 흐른다.
어떤 의도와 목적이 없이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입장은 점차로 난점에 부딪히고 있다. 우주론에서는 모든 법칙들의 상수와 매개변수의 값들이 생명이 존재할 수 있도록 미세하게 조정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생명의 기원 분야에서는 연구하면 할수록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기가 점점 어렵게 되었다. 어떠한 이론도 정설이 되지 못하고 있고 과학자들은 점차 생명의 기원이 설명될 것이라는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
화석기록 상에서는 새로운 생명 형태의 갑작스런 출현이 일반적이다. 굴드(S. J. Gould)는 그것에 대해 '단속 평형'(punctuated equilibrium)이라는 설명을 하고 있지만 어떠한 메커니즘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베히(M. Behe)는 생화학적 시스템이 지적인 존재의 설계를 필요로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논증하였다.
조금 전에 언급했듯이 과학의 주류는 우주와 생명이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러나 이 거부는 증거에 기초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이 모든 것이라는 신념 - 자연주의 - 에 헌신하고 있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을 보건대 이 신념이 무엇이 과학인지를 결정하기 때문에 이것을 과학적 증거를 통해 뒤집기는 힘들게 되어 있다. 이대로라면 무엇이 진실인지에 관계없이, 어떤 증거가 제시되는지에 상관없이 과학은 자연주의를 견지하게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과학은 진리와 상관없는 것이 되고 만다.
성경적 관점
성경은 우주와 모든 생물과 인간의 기원이 하나님으로부터라는 점을 분명히 선언한다. 그러나 '어떻게'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어왔다. 성경에서 기원과 관계가 깊은 부분은 창세기의 첫 부분(1장 - 11장)인데 주로 창세기 1-2장의 창조기사와 6-9장의 홍수기사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된다. 또 한가지 덧붙이자면 아담의 타락이 자연계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며 그 사건을 전후해서 어떠한 주요한 변화가 일어났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노아의 홍수가 어떠한 것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문제이다. 예수님이 직접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7)'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도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6-7)'고 썼다. 두 경우 모두 노아의 홍수는 재림과 연결되어 설명되고 있다. 따라서 노아의 홍수의 역사성을 부인한다면 이는 재림 또한 부인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신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담의 역사성이다. 로마서 5장 후반부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 5:17)'라고 기록되어있다. 또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라든가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라고 기록되어있다. 따라서 아담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아담이 보편적인 인간성에 대한 상징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역사성을 주장하기가 어려워지게 되는 것이다.
한편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몇몇 단어의 의미가 문제가 된다. 대표적인 것이 '날'로 번역된 히브리어 '욤'이다. 이 단어는 24시간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지만 불특정의 긴 기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창조한다는 의미의 '바라'와 '아사'가 있는데 '바라'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아사'는 이미 존재하는 재료로부터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종류'로 번역된 '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어왔다. 이런 부분에서는 해석의 오류가능성을 명심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창조론들
어셔 주교(Bishop J. Ussher)는 17세기에 천지창조가 대략 B. C. 4004년경에 이루어졌다고 계산하였다. 하지만 그 전이나 그 후로나 사실상 천지창조가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다는 해석이 있었다. 예컨대 간격이론(gap theory) 또는 재구성이론(reconstruction theory)은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매우 큰 시간 간격이 있었다고 본다. 1절의 창조 이후에 사단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홍수로 멸망한 이른바 루시퍼의 홍수가 있었으며 2절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표현은 그 결과를 표현한 것이고 그 이후의 창조기사는 재창조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화석기록과 오랜 연대를 설명하는데에 잇점이 있으나 성경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한편 날-시대 이론(day-age theory)은 지난 절에서 언급한 바 있는 '욤'이 긴 시대 - 고생대, 중생대 등의 지질시대일 수도 있다 - 라고 주장한다. 날-시대 이론은 보통 점진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ism)과 함께 주장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오랜 시간에 걸쳐서 필요할 때마다 개입하셔서 창조를 이루어갔다는 것이다. 화석기록의 연대를 모두 받아들이며 거기서 나타나는 갑작스러운 출현을 하나님의 개입으로 설명하려 한다.
홍수지질학(flood geology)은 대부분의 지질학적 기록과 화석이 노아의 홍수 때에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지구의 연대는 1만년 내외라고 주장하며 오랜 연대를 나타내는 증거들은 '성년창조'된 것으로 설명한다. 이 견해는 창조론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 과학적 창조론(scientific creationism) 또는 창조과학(creation science)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편 골격이론(framework theory)은 창세기 1장이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쓰인 것이 아니라 주제별로 되어있다고 주장한다. 처음 3일은 장소를 예비하고 나머지 3일은 그곳을 차례로 채우는 식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과학이론과 양립하기가 매우 쉽다.
한편 유신론적 창조론(theistic evolutionism)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수단으로 진화를 사용하셨다는 견해이다. 하나님께서 진화과정에 실제적으로 개입하셨다는 견해가 있는 반면 그런 견해도 부인하는 방법론적 자연주의(methodological naturalism)의 입장도 있다.
다양성 가운데 일치
1996년에 'Mere Creation'이라는 이름으로 컨퍼런스가 열렸다. 이 이름은 '내가 믿는 기독교,' 또는 '순전한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는 C. S. 루이스의 책 'Mere Christianity'에서 따온 것이다. 그 책의 머리말에서 루이스는 영국 국교회의 평신도라고 고백하지만 '독자들을 나와 같은 종파로 인도하려고 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은 '모든 시대의 신자들이 공통적으로 믿어온 신앙을 설명하고 옹호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많은 사람들이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를 옹호하기보다는 그처럼 논쟁적인 문제들에 몰두해왔'다고 지적한다.
지난 절에서 여러 가지 창조론을 소개하였거니와 진화에 반대하는 기독교 학자들 사이에 의견일치가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 루이스의 표현을 빌자면 그들은 순전한 창조(Mere Creation)를 옹호하기보다는 그처럼 논쟁적인 문제들에 몰두해왔던 것이다. 창조와 관련된 문제는 사실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하셨으되 어떻게 하셨느냐 하는 것이다. 전자는 신앙이 걸린 중요한 문제일 수 있겠지만 후자는 서로 간에 이견을 인정하면서 열린 마음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전략적으로 보아도 후자에 집중하여 창조론 진영을 분열시키기 보다는 그런 문제들은 잠시 제쳐놓고 먼저 전자에 집중하여 무신론을 배격하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필립 존슨(Phillip E. Johnson)은 '창조의 핵심은 창조주가 사용한 타이밍이나 메커니즘이 아니라, 구상(design)이나 목적에 관계한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창조론자'는 단순히 세계(특히 인간)가 '구상된' 것이며,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다'라고 썼다. 그는 먼저 창조론자들이 우주와 생명이 설계(design)되었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에서 연합하여 무신론적 견해와 싸워야 하며 그 이후에 연대 문제와 같은 세부사항을 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베히(M. Behe), 뎀스키(W. A. Dembski), 마이어(S. Meyer), 넬슨(P. Nelson)등의 학자들이 존슨이 제시한 비전에 따라 논의를 진행시키며 점점 세련된 논의를 펴가고 있는데 이들의 흐름을 '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라고 한다. 지적 설계의 등장과 함께 창조-진화 논쟁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생각해 볼 문제들
1. 어떤 사람들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진화론적 사고 때문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사실명제는 가치명제를 도출하지 못한다고 응수한다. 이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2.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우주와 생명에 의도와 목적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뒷받침하는 증거가 없다면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3. '지적 설계'가 다양성 가운데 일치를 제시하였으나 그것이 전체를 아우르기보다는 단지 새로운 이론 하나를 더하는데 그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추천도서
J. P. Moreland & M. Raynolds ed., 박희주 역, 『창조와 진화에 대한 세 가지 견해』IVP, 2001.
Richard T. Wright, 권오식 역, 『신앙의 눈으로 본 생물학』IVP, 1995.
William A. Dembski, 서울대 창조과학연구회 역, 『지적 설계』IVP, 2001.
Michael J. Behe, 김창환 외 역, 『다윈의 블랙박스』풀빛, 2001.
Phillip E. Johnson, 이수현 역, 『심판대 위의 다윈』과학과 예술, 1993.
Phillip E. Johnson, 과기원 창조론연구회 역, 『다윈주의 허물기』IVP, 2000.
Phillip E. Johnson, 양성만 역, 『위기에 처한 이성』IVP, 2000.
*한국창조과학회 자료실/창조론/창조교육에 있는 자료들을 참조하세요
http://www.kacr.or.kr/library/listview.asp?category=K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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