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성을 위한 ━━/창조론증거

초급교육과정

Joyfule 2021. 1. 28. 00:30

 

초급교육과정
김창환

일 러 두 기

본 과정은 NOAH(association of Natural science Oriented to the Attribution of the Holy One) 학술부 프로젝트를 통하여 구성되었으며 창조-진화 논쟁에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 문제를 바라볼 기본적인 시각을 제공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다. 본 과정은 그 대상을 대학생 정도의 지성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상정하고 있다.

본 과정이 견지하고 있는 관점은 객관적이지 않으며 편견을 포함하고 있을 수 있다. 오히려 본 과정은 모든 견해가 편견을 포함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구성되었다. 따라서 본 과정이 제시하는 내용을 반드시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본 과정의 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라. 그것이 본 과정의 원래 의도에 부합하는 것이다.

본 과정은 기본적으로 두 책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 두 책 접근법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개의 책을 주셨다는 관점인데, 그 두 책은 성경과 자연의 책(the Book of Nature)이다. 이에 따라 올바른 과학과 올바른 성경해석은 서로 모순될 수 없다는 확신을 그 기저에 깔고 있다.

본 과정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데, 즉 한 쪽 극단을 피해 다른 쪽 극단으로 몰려가지 않도록 배려되었다. 따라서 한 견해를 반대한다고 해서 그 정반대에 해당하는 견해를 찬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본 과정은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부분 '지성'은 출발점이며 둘째와 셋째 부분 '과학'과 '성경'은 언급했듯이 두 책 접근법에 따른 것이다. 마지막 부분 '기원'은 본 과정의 도착점이자 새로운 시작점이다. 본 과정은 창조-진화 논쟁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다만 그 논쟁을 바라볼 기본적인 시각을 제공하려고 할뿐이다.

초급교육과정 준비책임자, NOAH 학술부 부장 김창환

 

<1> 지 성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은 복음주의 지성이 대단치 않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마크 놀(Mark A. Noll)이 쓴 책,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의 제1장 첫 문장이다. 그는 미국 복음주의자들에 대해 이렇게 지적한다.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사고 영역에 있어서는 모범이 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이미 몇 세대 전부터 계속되어 온 일이다. 대중적인 차원에서는 상당한 성공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불행하게도 진지한 지성생활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는 실패를 거듭해 왔다.'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는 계속해서 지적하기를 '지성적인 삶에 대한 복음주의의 무관심은 몇 가지 이유에서 기이'하다고 하였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복음주의자들이 '하나님이 자연의 주재자요, 인간 제도(가정, 일, 정부)의 유지자이며, 조화와 창의성과 아름다움의 근원'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연과 인간, 사회 및 예술에 대한 건전한 분석을 게을리 해왔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역사적인 것인데,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지성에 대해 현저할 만큼 정밀하고 창의적이며 풍부한 관심을 기울인 지도자들과 여러 운동의 영적 후예들'인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영적 선조들과는 달리 현대의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 아래서 포괄적인 사고를 추구하지 않으며, 기독교적 관점에서 전 영역에 걸쳐 형성된 지성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지성을 계발하도록 별로 격려해주지 못한 것 같다. 오히려 기피해야 할 것으로 제시되는 경우가 많지 않았나 싶다. 그리스도인들이 지성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몇 가지 논점들을 성경을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의문점들

건전한 지성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상호비판이 필요불가결하다. 그러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복음주의 지성을 추구하려는 사람은 여기서 딜레마를 만날 수도 있다. 어떻게 비판을 주고받지 않고 건전한 지성을 추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말씀을 잘 살펴보면 그 비판이 사람에 대한 비판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지 견해나 이론에 대한 비판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여기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교훈은 견해나 이론에 대한 비판이 결코 사람에 대한 비판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다른 사람의 견해에 대해 비판을 하기에 앞서서 자기의 견해가 비판을 받을 것을 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건전한 지성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의심도 또한 필요불가결하다. 그러나 성경은 예컨대 다음과 같은 식으로 기록되어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제시된 견해와 이론을 의심하지 않고 믿어야 한다면 건전한 지성은 꿈도 꿀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바는 도무지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신뢰의 대상은 하나님이며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다른 것을 그만큼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지성은 당연히 의심스러운 것으로서 마땅히 의심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전도와 관련해서는 어떠한가?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17-21)'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확실히 지성은 전도하는 데에는 큰 소용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 지성으로 무엇인가 증명해 보임으로써 전도하려는 전략은 별로 효과적이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성을 추구하는 것은 전도하는 것과는 독립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전도하는 것과 전혀 상관없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5)' 복음주의 지성은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그릇된 이론들을 공격함으로써 전도를 간접적으로 도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부대효과일 뿐으로 전도를 위해서 복음주의 지성을 추구하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다.

혹자는 지성과 사랑이 대립관계에 있는 것으로 본다. 성경을 보자.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하)' 과연 지성은 사랑과 대립관계에 있으며 지식이 더할수록, 지성이 계발될수록 사랑은 줄어들게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 절로 넘기겠다. 다음 절에서 복음주의 지성을 위한 명쾌한 지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큰 계명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막 12:29-30)' 30절을 영어로 보면 다음과 같다.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NIV)' 여기서 주목해야할 단어는 '뜻'으로 번역된 'mind'이다. 'mind'는 지적인 성향이 강한 단어로 종종 '지성'으로 번역된다. 앞서 인용한 책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의 원제목은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이다. 원문의 헬라어 디아노이아  역시 '이해력, 생각, 통찰력, 사고'등으로 번역되는 지적인 경향이 강한 단어이다. 즉 성경 말씀을 다시 번역해보면 '너의 모든 지성으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주의 지성을 위한 가장 명쾌한 지침일 것이다.

'너의 모든 지성으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당연히 사랑이 결여된 지성을 경계한다. 동시에 지적인 재능을 묻어두고 사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역시 경계한다. '너의 모든 지성으로'라고 하였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수준의 지성을 요구하시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이라고 제시하신 것의 일부이다. 이는 계명이며 따라서 명령이다.

'너의 모든 지성으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앎과 믿음

근본적인 문제를 하나 다루어야 하겠다. 앎으로써 믿는 것인가? 아니면, 믿음으로써 아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것인가? 다음 두 개의 성경 말씀을 살펴보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 1:20)'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얼핏 보기에 로마서 말씀은 창조하신 증거를 앎으로써 믿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처럼 보이고 히브리서 말씀은 믿음으로써 비로소 창조의 사실을 알게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 두 말씀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로마서 말씀의 문맥을 보면 수수께끼가 풀린다. 로마서는 이어서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는 자들이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우준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그들은 믿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앎으로써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아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되겠지만 지성은 스스로를 위해 출발점을 제공할 수가 없다. 오직 무언가를 믿음으로써 출발할 수밖에 없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가 'Credo ut intelligam!'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반드시 아는 것보다 믿는 것이 선행하여야 한다.

성경 말씀은 이렇게도 말한다. '보라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렘 8:9하)'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이 말씀들은 모두 지혜와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참된 앎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써만 접근할 수 있다.

 

독단성 문제

복음주의 지성이 잠재적으로 가장 많이 받게 될 비판은 아마도 독단성에 관한 것이 되기가 쉬울 것이다. 'dogma'라는 말은 독단적인 주장을 일컬을 때도 쓰지만 '교리'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불신자들을 대할 때에도 독단적일 뿐 아니라 의견이 다른 복음주의자를 대할 때도 종종 독단적이다. 혹자는 절대진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은 독단적일 수밖에 없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성에 초점을 맞추었을 경우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에서 독단성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발견할 수 있다.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신 5:8-9상)' 이 계명은 당연히 다른 신들을 위한 우상을 만드는 것을 금하고 있지만 거기서 그치고 있지 않다. 아론의 금송아지를 생각해보자. 아론은 금송아지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출 32:4하)'라고 하였고 또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출 32:5하)'라고 하였다. 어쩌면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생각한 것이다. 두 번째 계명은 명백히 이러한 잘못도 금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성경 말씀을 보자. '여호와께서 호렙 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하늘에 나는 아무 새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까 하노라(신 4:15-18)' 이 말씀은 우상을 만들지 말아야 할 이유로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였다는 것을 들고 있다.

어떤 지적인 견해가 우상이 될 수 있음은 명백하다. 그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은 그것이 진리라고 굳게 믿을지라도 위에서 살펴본 말씀은 준엄한 경고를 준다. 말하자면 '너희가 완전한 진리를 보았느냐 그렇지 않다면 깊이 삼가라'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죄악된 인간 중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을 본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진리를 본 사람 역시 없다. 따라서 깊이 삼가는 것이 마땅하다.

한편 불신자가 이루어 놓은 지적인 업적에서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앞에서 설명하기를 하나님을 믿는 것만이 참된 앎으로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 잘못된 출발점을 가진 모든 지적인 업적을 무시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마 5:45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잘못된 출발점을 가졌더라도 진리를 간절히 구하는 자들에게 진리의 조각들을 나누어 주셨을 것이라고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볼 문제들

1. 지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학계에서 성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는 의미인가?

2. 선교와 지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의 중요성을 서로 비교해 보라.

3. 올바른 신앙이 지적 업적에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되는가? 올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지적 업적을 어느 정도까지 신뢰할 수 있는가?


 

추천도서

Mark A. Noll, 이승학 역,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엠마오, 1995.

George M. Marsden, 조호연 역, 『기독교적 학문 연구@현대 학문 세계』IVP, 2000.

Alister E. McGrath, 김선일 역,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IVP, 2001.

Nicholas Wolterstorff, 문석호 역, 『종교의 한계내에서의 이성』성광문화사, 1991.

Francis A. Schaeffer, 김기찬 역, 『거기 계시는 하나님』생명의 말씀사, 1995.

Francis A. Schaeffer, 김영재 역, 『이성에서의 도피』생명의 말씀사, 1970.

Francis A. Schaeffer, 허긴 역,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생명의 말씀사, 1973.

Francis A. Schaeffer, 김원주 역, 『다시 자유와 존엄으로』생명의 말씀사, 1995.

 

 

<2> 과 학

 우리 시대의 권위

필립 존슨(Phillip E. Johnson)은 창조과학에 대한 미국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비평하면서 이렇게 썼다. '대법원 재판에서 법학자로서의 필자의 주의를 끈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과학'과 '종교'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지만, 그 용어가 내포하는 결론에 대해서는 누구도 명료하게 밝히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연론적 진화가 '과학'이고 초자연적 창조가 '종교'라고 말한다면, 전자는 진리이고 후자는 환상이라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과학의 이론이 사실로서 가르쳐진다면, 그 이론이 배제하는 모든 것은 사실이 아니게 된다.'

여기서 창조와 진화의 문제에 대해서 다루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 시대에 '과학'이라는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합당한 것인지 살펴보려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어떤 것을 '과학적'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비과학적'이라고 부를 때에 그것은 또한 무엇을 의미하는가? '과학적'이라고 알려진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그것이 과학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과학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반대하는 경우, 필경 머리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게 된다.

우리 시대의 권위는 과학이다. 달리 말하면 '과학은 우리의 문화 안에서 유일하게 보편적으로 유효한 지식의 형태이다.' 어째서 우리 시대는 '과학'에게 이런 권위를 부여하게 되었는가? 과학은 얼마나 믿을만한가? 또는 이른바 '과학적 사실'이라는 것은 얼마나 '확실'한가?

 

확실성의 신화

어떤 사람들은 '과학적'인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주로 과학기술의 찬란한 성공과 과학을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여기에도 어느 정도의 진실은 있다. 그러나 이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과학과 기술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밀접하지는 않다. 아주 오랜 동안 과학과 기술은 거의 상관이 없었고 어느 정도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지금은 과학과 기술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이 쉽지 않게 되었지만 아직도 각각의 특성을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기술의 성공을 과학에 돌리는 우를 범하기 쉽다.

기술은 어떤 조건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주로 관심이 있으며 왜 그런지에 대한 관심은 2차적이고 보통 불필요한 것이다. 반면에 과학은 주로 '왜?'라는 질문에 답하려하는데 관심을 둔다. 과학이 '왜?'라는 질문에 잘못된 대답을 하고 있을지라도 어떤 조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며 그런 사실들을 조합하여 만들어낸 기술 역시 훌륭하게 작동할 것이다. 말하자면 전구에 불이 들어온다는 사실이 전자 이론이 옳다는 것을 보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과학이 '과학'이란 이름 하에 주어진 권위에 따라 모두 동등한 정도로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모든 과학이 동일한 신뢰도를 갖는 것은 아니다. 물리학이나 화학처럼 자연계에서 되풀이되는 현상을 다루는 과학은 실험과 반복된 관찰로 시험되므로 상대적으로 신뢰도가 높은 편이다. 반면에 우주의 기원, 생명의 기원과 같은 문제를 다루는 과학은 오직 한 번 발생한 사건으로 되풀이되지 않기 때문에 실험이나 관찰로 시험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이런 과학은 물리학이나 화학과 같은 과학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신뢰도가 낮다고 할 수 있다.

확실성의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과학이 객관적이라고 보는 데에 있다. 실험하고 관찰하고 이론을 세우고 그것을 시험하고 반증하는 과정에서 과학자 개인의 편견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아직도 널리 펴져 있지만 실제로 과학철학의 영역에서는 과학이 완전히 객관적이라는 관점은 이미 죽은지 오래되었다. 어째서 과학이 객관적일 수 없는지는 다음 절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관찰의 이론 의존성

아인슈타인(A. Einstein)은 하이젠베르크(W. Heisenberg)와의 대화 중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관찰할 수 있는 양만을 가지고 한 이론을 세우려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입니다. 사실 사람이 무엇을 관찰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이론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관찰은 매우 복잡한 과정입니다. 관찰되어야 할 현상은 우리의 측정장치에 어떤 사건을 야기시키며 그 결과 또 다른 현상이 야기되고 그것이 돌고 돌아 결국 감각인상을 만들어 냅니다. 즉 우리가 하나의 현상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감각인상이 이루어지기 전까지의 과정이 어떠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즉 우리가 새로운 사실을 관찰하려 할지라도 관찰되어야 할 현상에서 우리의 의식까지의 과정은 지금가지의 자연계의 법칙이 정확하게 작용한다고 가정해야 할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의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관찰은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관찰자가 무엇을 관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이미 관찰자의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론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관찰이 의미 있는 것이며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인지, 어떤 것이 무의미한 것이고 어떤 것을 무시해야 하는지는 이미 관찰자 안에 형성되어 있는 이론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 관찰자가 행한 관찰결과가 그가 가지고 있는 이론에 부합하게 나타났다고 할지라도 그 관찰이 이론의 타당성을 높여준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물론 관찰자가 두 가지 가능성 중의 어느 것이 더 타당한지 알고 싶다고 할 때 관찰을 통해 바른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틀릴 가능성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편견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 가장 위험한 종류의 편견은 한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너무나 당연히 여기고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입견은 관찰에 의해서 뒤집힐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이 관찰될 수 있는지를 그 선입견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관찰이 객관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과학도 객관적일 수 없다. 과학이론이 관찰에 기반하여도 객관적일 수 없으며, 관찰에 기반하지 않으면 더더욱 객관적인 기반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관찰이 이론에 의존하기 때문에 과학은 객관적이지 않다.

 

앎과 믿음

앞에서 던졌던 질문을 다시 던져 보겠다. 앎으로써 믿는 것인가? 아니면 믿음으로써 아는 것인가? 앞에서는 성경을 통해서 '믿음으로 아는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 살펴본 관찰의 이론 의존성에 비추어 보아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관찰을 하기도 전에 이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면 그 이론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믿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당신은 지구가 둥글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가? 아마도 당신은 그렇게 말한 선생님을 믿었거나 그렇게 쓰여있는 책을 믿었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지구의 인공위성사진을 보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진이 진실된 것임을 믿었던 것이다. 인공위성사진이 가능하려면 인공위성이 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인공위성이 가능하려면 지구가 둥글어야 한다. 따라서 어느 시점에서든 지구가 둥글다고 믿기로 하는 시점이 있는 것이다.

실험의 경우도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당신이 질산은(AgNO3) 용액과 염화나트륨(NaCl) 용액을 섞어 흰색의 염화은 침전을 얻었다고 해보자. 그러나 당신이 사용한 것이 질산은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아마도 시약병에 붙어있는 라벨을 믿었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사용한 것이 질산은인지 아닌지 확인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는가? 그리고 그 확인에 사용하게 될 시약과 기계가 바로 당신이 원하는 그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어느 시점에서든지 당신은 무언가를 믿음으로써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이성은 유용하기는 하다. 그러나 출발점이 주어져 있지 않으면 이성을 사용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성은 자기를 위해서 출발점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이성을 위한 출발점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그 출발점을 믿을 수밖에 없다.

 

두 개의 함정

사람은 늘 한쪽 극단을 피해 다른 쪽 극단으로 달려가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성경은 우리에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앞 절들에서 우리는 과학이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100퍼센트 객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 100퍼센트 주관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파이어아벤트(P. Feyerabend)와 같은 사람은 과학을 완전히 주관적인 것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과학자들의 학회는 정당대회와 유사하며 과학 이론 또한 종교적 교리와 다를 바 없다.' 어떤 이론이 더 나은지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남는 것은 심미적 판단, 취미에 의한 판단, 형이상학적 편견, 종교적 기대,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의 주관적인 바램일 뿐이다.' 그에 따르자면 과학은 100퍼센트 주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질서정연한 실제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은 여기에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정연한 실제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비록 우리의 이성은 그 실제 세계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거나 파악하기 어렵지만 끊임없이 실제 세계와 교류하며 과학이론은 실제 세계에 의해 심판받게 마련이다.

선입견이 관찰을 왜곡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 선입견이 자기를 지키도록 관찰을 왜곡시키는 데에 실패하게 되면 그 선입견은 잘못된 것으로 기각될 수 있다. 그래서 이론이 실제 세계와 너무 큰 차이가 있으면 그 이론은 살아남기 어려운 것이다. 확실히 어떤 이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이론이 틀리다는 것을 보이는 것은 좀더 쉽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에 대해서 논의할 때 두 개의 함정을 조심해야 한다. 하나는 과학이 완전히 객관적이라는 관점이며, 또 하나는 과학이 완전히 주관적이라는 관점이다. 과학은 완전히 객관적인 것도 아니며 또한 완전히 주관적인 것도 아니다. 

생각해 볼 문제들

1. 객관적인 실제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과연 그 여부를 확실히 결정할 수 있는가?

2. 모든 견해가 편견으로 인해 편향되어 있다는 주장은 자기 반박적이지 않은가? 그 스스로가 편견으로 인해 편향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격이므로 이 주장은 옳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3. 하나님이 존재하는 경우와 존재하지 않는 경우, 우리가 도무지 무엇인가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어떠한 차이가 생기는가? 


추천도서

Del Ratzsch, 김해진 역, 『과학철학; 자연과학에 대한 기독교적 조망』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 출판부, 1990.

Michael Polanyi, 이은봉 역, 『과학, 신념, 사회』(주)범양사 출판부, 1990.

Thomas S. Kuhn, 김명자 역, 『과학 혁명의 구조』동아출판사, 1992.

R. Hooykaas, 이훈영 역,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솔로몬, 1992.

Werner Heisenberg, 김용준 역, 『부분과 전체』지식산업사,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