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마음 속의 교묘한 죄.
제리 브리지스(Jerry Bridges) 지음 오현미 옮김
성령의 권능 - 죄의 권세에서 깨끗케 하시는 능력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한 가지 방법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을 따라 행하십시오"
앞서 살펴본 어거스투스 토플레이디의 찬송은 '이중 치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것은 곧 죄책에서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도 정결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들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죄책에서 정결케 해주셨다. 우리를 너그럽게 대해주고 싶으셔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은 그분의 공의가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죄가 절대적으로 용서받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역사적 사실만큼이나 견고한 사실이다. 복음의 이 놀라운 진리를 확실히 붙잡아야 한다. 삶 속에서 묵인하며 지나치는 우리 죄가 용서받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만 그 죄와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플레이디의 찬송은 이렇게 죄책에서 정결케 되는 것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 정결케 되는 것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살면서 어떤 특정한 죄와 지치도록 씨름할 때는 복음이 정말 우리 삶 속에 있는 죄의 권세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 의아해지기도 한다. 반복적으로 씨름하고 있는 어떤 고질적인 죄의 패턴을 '죽이는' 데 과연 어떤 발전이 있기는 한 건지 궁금할 때도 있다. 토플레이디처럼 '만세 반석'이신 예수님께서 정말로 우리를 죄책은 물론 죄의 권세에서도 정결케 해주신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권세에서 정결케 되는 데는 두 가지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첫 단계는 죄의 주권 혹은 죄의 지배력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 이는 어떤 크리스천에게나 의심할 여지없이 완전하게 일어난다. 두 번째 단계는 아직 남아 있는 죄의 존재와 그 활동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으로,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계속해서 점진적으로 진행된다.바울은 로마서6장에서 이 이중적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로마서 6장 2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고 말하며, 8절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게 죽었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함으로써 우리는 죄책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삶 가운데 있는 죄의 지배력에 대해서도 죽었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해당되는 사실이며,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그분이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시는 때 성취된다(골 1:13).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는 바울의 말은 하나의 선언문이다.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셨다. 우리는 그 결정적 사건에 무엇을 더할 수도 없고, 우리가 죄책과 죄의 지배에 대해 죽었다는 사실에서 무엇을 뺄 수도 없다.
그러면서 바울은 또 이렇게 권면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죽을 몸에서 죄가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해 몸의 정욕에 순종하지 말고"(롬 6:12).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는데, 어떻게 죄가 우리에게 왕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일까?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죄란, 비록 우리 삶을 지배하는 권세는 잃었어도 여전히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주도적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죄의 존재와 그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죄는 우리 마음속에서 영적 게릴라전을 계속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 전투에 대해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적대 관계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육체의 욕망과 성령의 욕망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싸움을 날마다 겪는다. 둘 사이의 이 긴장 관계 때문에 복음이 정말 이 죄의 권세에 대해서도 효력이 있는 것인지 의아해하기도 한다. 복음이 과연 우리를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당길 능력이 있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삶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비교적 '보기 흉하지 않은' 죄를 생각하면 특히 더 그런 의문이 든다. 이런 교묘한 죄 가운데는 아주 집요한 것도 있는데,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그 죄들과 싸움을 벌여야 한다. 이제 그 죄에 대해서는 한 고비 넘겼다고 생각했다가도 며칠 지나지 않아 또다시 그 죄와 마주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렇게 죄와 싸움을 벌일 때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이제 죄가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난 왜 아직도 이 모양이지? 복음이 정말로 죄에서 나를 정결케 한 걸까? 내 일상에서 여전히 활개치는 이 교묘한 죄를 죽이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이 집요한 의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이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 나온다. "내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따라 행하십시오. 그러면 결코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적 영향력 아래 살면서 성령께 의지하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그렇게 하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실제 생활에서 성령의 지배적 영향력 아래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바로 우리 마음을 계속 성령께 드러내보이면서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도덕적 뜻에 순종하려 애쓰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 성령께 의지하면서 그 뜻에 순종할 수 있게 해주는 성령의 능력을 계속 소리쳐 구해야 한다.
크리스천의 삶에는 내가 '의존적 책임'이라고 이름붙인 기본 원칙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책임과, 이른 바 '용인할 만한' 죄든 용인할 수 없는 죄든, 우리 삶 속에 있는 모든 죄를 죽여야 할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에게는 이 책임을 이행할 만한 능력이 없다. 사실 우리는 우리에게 힘 주시는 성령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책임있는 존재기도 하고 의존적인 존재기도 하다.
성령을 따라 행하고자 애쓸 때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역사하셔서 삶 속에 남아 있는 죄의 권세에서 우리를 깨끗케 해주시는 것을 점점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이생에서는 완전해질 수 없다. 하지만 발전할 수는 있다. 이것은 분명 점진적인 발전이며, 때로는 아무 발전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진심으로 우리 삶 속의 교묘한 죄를 처리하기를 원한다면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여러분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져 있다(빌 1:6).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시작하신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다.
실제로 신약성경의 서신서들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서신서 기자들, 특히 바울 같은 이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이 일을 성부 하나님의 역사로 돌리기도 하고, 성자 예수님의 역사로 돌리기도 하며, 또 때로는 성령의 역사로 돌리기도 한다. 사실 우리가 영적으로 변화되는 역사에는 성삼위 하나님 모두가 개입하시지만, 성부와 성자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해 일하신다(고전 6:19). 바울은 성령을 통해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엡 3:16). 그리고 누군가가 기막히게 표현한 것처럼,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을 전달한다."그러므로 내가 성령의 능력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성부,성자,성령의 능력이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되어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는 뜻이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법
성령이 어떤 식으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지는 우리가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신비다. 우리는 그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역사하셔서 예수님을 닮은 형상으로 우리를 점점 더 변화시키신다는 성경의 증거를 믿고 받아들일 뿐이다(고후 3:18). 성령에 관한 이 위대한 진리를 적극적으로 믿을 필요가 있다. 우리 안에 있는 교묘한 죄를 우리 혼자 힘으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며, 성령을 따라 행할 때 비로소 이 죄가 점진적으로 해결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한 가지 방법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이기심과 조급함, 비판적 태도 등이 사실은 죄라는 것을 알게 해주신다. 성령께서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쓰인 성경을 통해 우리를 꾸짖으시고 바로잡아주신다(딤후 3:16). 또한 말씀을 접할 때 우리 양심이 밝아지고 죄에 민감해지게 해주신다. 내가 알기로 심지어 성령께서는 나의 교묘한 죄가 어떤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났는지 기억나게 해주시고, 그 행위를 출발점 삼아 내 삶 속에 있는 죄의 패턴을 지적해주기 시작하신다.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성령의 중요 사역 가운데 하나다.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의 어떤 특정 패턴이 죄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만 죄를, 특히 우리 크리스천 문화에서 보편적으로 용인되는 죄를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또 한 가지 방법은 우리가 죄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로마서 8장 13절에서 바울은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권면한다. 또한 빌립보서 2장 12-13절에서는 "여러분의 구원을 이루십시오. 여러분 안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결단하게 하시고 행동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행하라고 촉구한다. 바울은 하나님, 추측컨대 성부 하나님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사실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대행자인 성령을 통해 역사하신다.
빌립보서 4장 13절을 보면,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우리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성령을 의지하면 교만과 조급함, 비판적 태도 등을 처리할 수 있다.그러므로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발전이 아무리 더디게 보이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때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숨기시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오히려 그 덕분에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깨닫게 될 수도 있다.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역사에 더하여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단독적으로 역사하시기도 한다. 즉, 우리의 의식적인 개입 없이 홀로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13장 20-21절의 축복의 말에서 하나님을 "그분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특별한 진리가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되어야 한다. 죄와의 싸움에서 아무런 진전이 없어 보이는, 더할 수 없이 참담한 날들 가운데서도 우리는 성령께서 여전히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 죄 때문에 성령께서 슬퍼하실 수도 있지만(엡 4:30), 그분은 그 죄조차도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데 들어 쓰셔서 더욱 간절히 성령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부르짖게 만드신다.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한 성령의 또 한 가지 역사는, 우리를 영적으로 성숙시키는 환경을 조성하시는 것이다.우리 몸의 근육이 운동하지 않고는 힘을 쓸 수 없는 것처럼,우리의 영적 생명도 힘든 도전을 주는 상황이 아니면 성장하지 않는다.
걸핏하면 화를 내는 사람에게는 화를 내게 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남을 비판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에게는 비판적 태도를 취하게 만드는 많은 계기들이 생길 것이다. 쉽게 걱정에 빠지는 사람에게는 걱정이라는 죄를 접하게 되는 많은 기회들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여 범죄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지만(약 1:13-14), 우리 삶에 어떤 특정한 상황을 조성하시거나 허용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있는 특징적 죄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내가 가진 교묘한 죄가 드러날 때 비로소 그 죄의 활동을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환경을 주권적으로 통제하신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성경에 이 사실을 확증하는 말씀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 진리를 가장 명시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부분은 예레미야애가 3장 37-38절이다. "주께서 그것을 명령하지 않으셨다면 누가 그것을 말할 수 있고 일어나게 할 수 있는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입에서 나오지 않는가?"
이 말씀은 여러 가지로 적용할 수 있지만, 여기서 지금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진리는 하나님이 우리 삶의 모든 상황과 모든 사건을 주관하시며, 그 상황과 사건들을 다소 신비로운 방식으로 이용하셔서 우리를 예수님의 형상으로 점점 더 변화시키신다는 것이다.
로마서 8장 28절은 많은 크리스천들이 힘들 때 찾아가 위로를 받는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그분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루는 줄을 압니다." 이 말씀이 여러 상황에서 우리에게 격려가 되기는 하지만, 바울은 사실 우리의 영적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말하는 '선'은 바로 다음 절에서 설명되기를,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갖가지 환경을 통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은 우리를 더욱 예수님을 닮은 자들로 만들기 위해서라는 뜻이 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교묘한 죄를 깨닫고 자각하게 만드신다. 그리고 그 죄를 죽일 수 있게 하신다.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그리고 삶의 여러 가지 환경을 이용하여 우리에게 죄를 처리하는 연습을 시키신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몫이 있다. 우리에게는 삶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교묘한 죄를 죽여야 할 책임이 있다. 이 책임을 하나님께 맡겨놓고 뒷짐지고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절대 그럴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단 한 치도 발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은 단순히 우리를 돕기만 하시는 게 아니라 영적 변화의 방향까지 지도하신다. 성령은 여러 가지 수단을 사용하시며, 이 책 또한 성령의 도구가 되어 우리의 교묘한 죄를 드러내고 처리하는 데 쓰임받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성령은 우리 안목에만 의지하여 죄를 볼 수 있게 하시지 않으며, 우리 능력으로만 그 죄를 처리하게 두시지도 않는다.
어거스투스 토플레이디의 찬송가 가사가 맞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과 성령의 신비롭고도 아주 현실적인 역사를 통해 우리를 죄책과 죄의 권세에서 건져내신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 삶 속에 있는 교묘한 죄를 상세히 살펴볼 때 공연히 위축되지 말기를 바란다. 기억하라.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 죗값을 치르시고 그 죄에 대한 용서를 얻었다는 것을. 그리고 성령을 보내사 우리 안에서 거하시면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죄를 처리할 수 있게 해주셨다는 것을.
그리고 성령께서 내게 능력을 주셔서 삶 속에 숨겨 있는 은밀한 죄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죄는 속임수에 능하다(엡 4:22 참조). 죄는 나에게 특정한 죄가 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부인하거나 혹은 죄가 있어도 별로 심각한 죄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게 만든다. 오직 성령만이 죄를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내 보이실 수 있다.
이제 겸손해질 준비를 하라. 성령께서 나에게 이기심의 죄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시던 때가 기억난다. 그전까지는 남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명백하고도 지나친 이기심만이 이기심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나 역시도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 사람들에 비해 훨씬 더 교묘하게 이기적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건 참 굴욕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 곧 자기 죄를 마주하고 그 죄로 인해 애동해하는 자에게 복이 있으리라고 약속하셨다. 또한 의에 주리고 갈급한 자들, 곧 자기 삶 속의 죄가 죽고 그 대신 성령의 열매가 맺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들에게도 복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마 5:4, 6, 갈 5: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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