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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머튼의 생애

Joyfule 2018. 2. 6. 11:26

 

 

토마스 머튼의 생애(1915 - 1968)

 

현대 사막의 교부라고 불리는 토마스 머튼은 1915년 1월 31일 뉴질랜드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프랑스 남부의 프라데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는 한창 전쟁을 하던 시기이다. 그의 부모는 모두 예술가이다. 그는 그의 부모를 이렇게 말한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자신들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믿으면서도 이 세상에 사로잡혀 있는 포로들이었다. 사실 나의 부모는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성인이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부모님은 예술가였다.”그는 자신을 “나는 아버지에게서 사물을 보는 태도와 고결한 성품을, 어머니에게는 고요함과 다재다능한 성품을 물려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종교 교육에 대해서는 부모들의 노력이 거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종교에 대해서는 “종교에 관해서는 어디까지나 우리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어머니의 방침이었다”이렇게 고백한다.


그의 나이 6세때 어머니와 사별한 후 미국에서 외조부모와 생활하게 되었다. 그 기간에 그의 아버지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 스스로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기도를 하게 되는데 그것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아버지를 위해 기도했다고 해도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무신론자라도 위기를 당하면 우러나는 거의 맹목적이고 본능적인 감정에 불과한 기도였을 것이다. 하느님의 존재를 정확하게 믿은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중에 하느님을 인정하고 경배할 필요성을 느끼는 이러한 감정은, 하느님께 종속된 인간 본성에 깊이 새겨져 있는 인간의 본질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소년 시절은 프랑스에 다시 와서 지내게 되었는데 이 시기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카톨릭 문화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영성형성의 기초를 다지는 시기도 바로 이때이다. “내가 어린 시절에 받은 진정한 가치가 있는 종교나 윤리 교육이란 아버지한테 받은 것뿐이다. 그것은 체계적인 것이 못 되고 기회 있는 대로 자연스럽게 보통 이야기 중에 얻어진 것으로 그만큼 효과가 컸다. 아버지는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나에게 종교를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저 영적인 생각이 떠오르면 이것이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되어 나온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교육이 다른 교육도 마찬가지지만 가장 큰 효과를 가져오게 마련이다.”이렇게 자신의 영성 형성을 고백하고 있다.


그후 아버지를 따라서 영국에 가게 된다. 처음 영국의 오캄에 왔을때 그는 “나의 운명은 문화가 침체된 이 한적한 고장의 떼까마귀가 우글거리는 나무 아래서 3년 반을 살면서 장래를 준비하도록 되어 있었다.”라고 말한다. 오캄에 있을때 아버지의 뇌종양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15세 되던 해 그는 “1930년 내가 열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내게도 기묘한 내적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확고한 독립적인 사상에 의해 여러 가지 지성적 반항의 징조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다시 머튼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내 메마른 영혼의 딱딱한 껍질이 드디어 내가 겨우 들여놓았던 종교 세계의 문까지 완전히 닫아 버렸다. 먼지만 쌓여 있는 텅 빈 신전에 어느 하느님이고 발붙일 자리는 없었다.”라고 자신의 심경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때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윌리엄 블레이크를 다시 접하면서 윌리엄 브레이크를 접하게 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다 라고 했다.
18세때 이탈리아 여행을 하게 되는데 거기서 머튼은 비잔틴 모자이크에 매혹되었다. “이 성당들 벽에 있는 예술이 내게 말을 하였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이 대체 누구인가를 조금씩 알기 시작했다.”그 시기에 그는 1년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신비 체험을 통해서 개종의 체험을 하게 된다. 이 체험 이후에 미국의 생활에서는 다시 종교에 흥미 없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켐브리지 대학에 입학하지만 고뇌하는 머튼에게는 그 시절이 아주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 이후 그는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동안 “나는 이 세상의 평화와 정의를 위해 헌신하고 싶었다. 나는 이 세상은 또 한번의 전쟁으로 끌어넣고 있는 세력들의 규합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이들의 관심을 딴 데로 전환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라고 선상에서 고백하고 있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하여 공산주의에 대한 많은 책을 탐독하고 집회에도 참여하는 열성을 보였다. 그 시기에 마크 교수를 만났다. 그와 만남을 머튼은 “내가 그 시기에 마크 교수를 알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때 공산주의를 신봉하여 계급 없는 사회라는 이상향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어떤 어리석은 것이라도 순순히 받아들일 위험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공산주의에 대한 부나비 시절을 지내고 1937년 그에게 사상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준 질송의 ꡔ중세 철학의 정신ꡕ이라는 책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머튼은 이 책에서 하느님의 자존성(aseitas)에 대한 개념을 충격적으로 받아 들였다. 그가 질송의 책을 내려놓았을 때의 감정을 “교회에 가고 싶은 소망이 어느때 보다도 진지하고 뿌리깊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그처럼 심각하게 느껴 본 적이 없었다.”라고 말한다.
이후로 머튼은 점점 카톨릭적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홉킨스의 시와 그의 필기장에 심취되어 예수회의 생활은 어떤 것인가? 예수회 회원들은 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사제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가? 하는 물음을 가지고 이런 것에 신비스러운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신이 신부가 되고 싶다는 그의 마음을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 단 월쉬(Dan Walsh) 교수에게 털어놓고 그와의 관계를 지속하다가 그는 1938년 11월 16일 세례를 받고 카톨릭 신자가된다.
머튼은 월쉬 교수의 도움으로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입회하기를 결심하고 입회 허가를 기다리는 시기에 그는 처음으로 묵상 기도를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가 쿠바를 여행하던 중 신비적 체험을 하게 되는데 “마치 내가 하느님의 현존을 목격하여 갑자기 그 눈부신 빛 속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 그런데 그 만남은 사변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구체적이요 체험적인 것이었고, 지식에 속하면서도 한층 더 사랑에 가까운 것이었다.”라고 그 체험을 말한다. 그러나 그의 프란치스코 수도원 입회는 거절당하고 말았다.


1941년 3월 머튼은 게쎄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성주간 동안 피정을 할 수 있느냐는 편지를 보내고 허락의 답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에게 또 하나의 편지가 왔다. 그것은 군에서 온 징집 명령서이다. 그 속에서 머튼은 과거 공산주의 입장에서 전쟁에 나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생각에 고민하게 된다. 그러던중 그는 비전투요원에 입대 원서를 냈다. 그리고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그는 군에 입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런 사건들이 머튼에게 더욱 게쎄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으로 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는 수도원에서 피정을 마치고 떠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서 14처에서 온 정성을 다 기울여 하느님의 마음에 드신다면 트라피스트회 수도자가 되는 성소의 은총을 주시기를 간청했다.”


다시 돌아와 생활을 했지만 그에게는 윤리적 사회적 갈등이 심하게 일어났고 그는 대학에 사표를 제출하고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들어가기를 결심하고 수도회로 향했다. 수도회에서 수련자로서 생활을 하면서 수도사의 꿈을 계속 이어갔다. 그가 수련자로 수도회에서 수련을 하면서도 많은 시들을 쓰기도 하였다. 그런 기간이 흘러 1943년 그의 동생 존 폴이 전쟁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1947년 그는 사제 서품을 받았고, 그 이듬해에는 그의 자서전 “칠층산”을 출간하게 되었다. 1968년 방콕에서 열린 학술회에 참석한다. 그러나 그곳 그의 호텔방에서 감전으로 생을 달리했다. 그후 게쎄마니 수도원으로 옮겨 장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