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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히의 생애와 사상 - 김경재

Joyfule 2022. 10. 14. 01:26






틸리히의 생애와 사상 - 김경재

  

역자 후기


현실과 상상 사이에서


현실과 타협하는 데에 있어서 내가 경험한 어려움은 일찍부터 나를 공상의 세계로 인도했다. 열 네 살부터 열 일곱 살 사이에 나는 바깥 세계보다 더 진실해 보이는 상상의 세계에 곧잘 빠져들곤 했다. 때가 되자 그 낭만적 상상은 철학적 상상으로 변모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철학적 상상은 그 때부터 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에게 범주들을 결합할 능력을 주고 구체적 용어 속에 든 추상적 개념을 파악할 능력을 주고 광범위에 걸친 개념적 가능성들을 시험해 볼 능력을 준 점에서 그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상상적 능력이 상상의 산물을 현실로 착각하거나 체험과 이성적 비판을 소홀히 하거나 대화 가운데에서라기보다 독백 가운데에서 생각하거나 상부상조하는 학문적 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하는 등의 위험을 가지는 한에 있어서는 의심스러운 가치였다. 다행이었든 불행이었든 간에 이 상상적 경향은 다른 몇몇 조건과 함께 내가 통속적 의미의 학자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20세기의 지성인들 가운데에는 "숙련자"라는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의 학자에 대한 일종의 혐오감이 있었다.


상상은 다른 여러 방식들 중에서도 놀이의 즐거움에 있어서 스스로를 나타낸다. 이 즐거움은 나의 전 생애에 걸쳐서 게임에서나 스포츠(나는 그것을 놀이 이상으로 취급한 것은 없다)에서나 오락에서나 그리고 생산적 시간을 가져오면서 그것들을 인간 자유의 최고 형태의 표현으로 만드는 유희적 감정에서 내게 수반되었다. 놀이에 대한 낭만적 이론이나 니이체가 "장엄의 정신"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놀이를 좋아한 것이나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심미적 영역"이나 신화학에 있어서의 상상적 요소 따위는 내게 있어서 늘 매혹적인 것이면서도 위험한 것이었다. 아마 내가 더욱 더 예언자적 종교의 타협을 모르는 엄숙성에로 치닫게 된 것은 바로 이 같은 위험을 자각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사회주의적 결단"에서 내가 신화학적 의식에 대해 언급한 것은 국가주의적 이교주의가 심각성을 궁극적으로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겨냥한 항의였던 것이 아니라 동시에 내 자신 속의 정복되지 못한 신화적-낭만적 요소를 겨냥한 항의이기도 했다.


예술은 놀이의 최고 형태이자 상상의 순전히 창작적인 영역이다. 비록 나는 창작예술의 분야에서 아무 것도 내놓을 것도 없지만 예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나의 신학적, 철학적 활동에 엄청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가정에서 나의 아버지는 복음적 목사직과 어울린 음악적 전통을 유지했다. 그는 몸소 작곡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일 개신교도들처럼 그는 건축이나 미술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나는 예술적 체질이 아니었는데다가 나중에서야 시각예술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나의 예술 동경은 문학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것은 김나지움 교육의 인본주의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슈레겔이 고전독어로 번역한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특히 내게는 중요했다. 나는 거의 위험할 정도로 나와 햄릿같은 등장인물들을 동일시했다. 실존주의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오늘날 내가 본능적 공감을 갖는 것은 이 위대한 문학작품에 대한 실존적 이해에 얼마간 맥락이 닿아 있는 것이다. 괴테나 또스또예프스키도 내게 이와 맞먹을 영향을 갖지는 못했다. 괴테의 작품은 키에르케고르적 의미의 경계선적 상황을 거의 보여주지 못하는 듯했다. 비록 어른이 되어서 그 판단을 바꾸기는 하였지만 당시에 그것은 충분히 실존적인 것 같지 않았다. 한동안 계속되었던 햄릿에 대한 나의 매혹이 지나간 후에도 나는 다른 시적 공상의 산물과 나를 완전히 동일시하는 능력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나의 생애의 어떤 수주일이나 수개월을 뒤덮고 있던 특수한 무드, 말하자면 그 빛깔은 어느 한 문학작품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곤 했다. 나중에 이것은 특별히 소설에서 입증되었는데 소설은 내가 자주 읽는 것은 아니었지만 열정적으로 읽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순수한 예술적 관조에 대한 갈망을 시원하게 채워주기에는 너무 많은 철학을 담고 있었다. 미술을 발견한 것은 내게 있어서는 결정적인 체험이었다. 그것은 일차대전 중에 전쟁의 공포와 추악과 파괴성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다. 군대 책방에서 구입할 수 있었던 보잘것없는 복사판에서마저도 갖게 되는 나의 기쁨은 미술사에 대한 체계적 연구에로까지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 연구로부터 예술 체험이 발생하였다. 나는 전시의 마지막 휴가기간 동안 베를린에서 있었던 보티첼리의 그림과의 첫 만남 - 그것은 거의 계시였다 - 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체험에 부수된 철학적, 신학적, 성찰로부터 나는 종교와 문화에 대한 철학의 몇몇 기본 범주들, 곧 형식과 내용을 계발하였다. 예술작품의 내용이 어떻게 형식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또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창조적 열광에 눈뜨게 해준 것은 표현주의의 양식이었는데 그것은 금세기 첫 10년 동안 독일에서 출현한 것으로서 전쟁과 몰이해한 하층 중산계급 취미와의 쓰라린 투쟁을 치르고 나서야 겨우 공식적인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나의 계시이론의 골자를 이루고 있는 "깨고 나감(breakthrough)"이라는 개념은 이 성찰을 활용한 한 예이다.


후에 표현주의가 사라지고 새로운 사실주의가 대두했을 때 나는 그 새 양식의 연구로부터 "믿음 있는 사실주의(belief-ful realism)"라는 개념을 전개했다. "믿음 있는 사실주의"라는 생각은 나의 책 "종교적 상황"의 중심개념인데 그 책은 그런 이유로 인해 한 예술가 친구에게 헌정되고 있다. 서구 미술에 있어서 개인과 집단이 보여준 갖가지에 대한 나의 감명은 "대중과 인간성(Masse und Personlichkeit)"라는 강의에 영감과 소재를 제공해 주었다. 내가 고대교회의 해결책을 점차 좋아하게 된 것은 이탈리아의 초기 기독교 예술이 준 깊은 감명에 의해서 촉진된 것이었다. 고대 로마 바실리카의 모자이크 작품은 교회사를 아무리 많이 공부해도 알 수 없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조형예술의 양식과 소재(Stil und Stoff in der bildenden Kunst)"라는 항목에서, 또 1930년에 있었던 베를린 종교미술 전시회의 개막연설에서, "대상과 방법에 대한 학문의 체계(Das System der Wissenschaften nach Gegenstanden und Methoden)"의 관련항목에서, 나의 종교철학(Religionsphilosophie)"에서, 그리고 "종교적 상황"에서 직접적으로 반영되었다.


현대 회화에 대한 이러한 생동적 체험은 또한 호프만슈탈(Hoffmannsthal), 게오르게(George), 릴케(Rilke), 그리고 베르펠(Werfel)에 의해 대표되는 현대 독일문학을 이해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나는 릴케의 후기 시편들에 의해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심원한 정신분석적 사실주의라든가 풍부한 신비성 그리고 형이상학적 내용으로 충만한 시의 형식 등은 이 시편들이 내가 종교철학의 개념들을 통하여 추상적으로만 다룰 수 있었던 성찰에 이르는 구체적 수단이 되게 하였다. 내 자신에게 있어서나 내게 시를 소개해 준 나의 아내에게 있어서나 이 시들은 거듭거듭 읽는 한 권의 기도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