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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히의 생애와 사상 - 김경재

Joyfule 2022. 10. 15. 00:29






틸리히의 생애와 사상 - 김경재

  

역자 후기


이론과 실제 사이에서


나는 내 자신이 실무적인 일보다는 지적인 일에 헌신해 온 생애를 살아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며 다른 어느 누구도 그 같이 생각할 것이다. 내가 무한한 것에 대한 생각과 처음 씨름한 것은 8살쯤이었다. 학교에서나 전(前)견신례 학습에서나 나는 그리스도교 교의학에 심취했다. 나는 철학에 관한 인기 있는 책들에 몰두했다. 내가 인본주의 전통에서 교육받았다는 사실과 그리스어 및 그리스 문학에 열중했던 것은 이론적인 것에 대한 이 같은 기질을 강화해 주었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나타낸 바와 같이 순수한 명상만이 순수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논점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했다. 전통적인 종교의 진실과 내가 내적 투쟁을 겪었던 것은 또한 나로 하여금 관조적 영역에 머무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인 삶에 있어서 명상은 존재에 대한 철학적 암시 이상의 무엇을 뜻한다. 종교적 진실에서 인간의 실존 그 자체는 백척간두 위에 있다. 그 물음은 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이다. 종교적 진실은 실존적 진실로서 거기서는 이미 그것이 실천과 별개의 것일 수가 없다. 종교적 진실은 요한복음이 말하듯이 행동되어진다(acted).


그러나 명상에 대한 편중적 몰두는 내가 문학적 공상 속으로 달아나던 것과 마찬가지의 현실 도피에 근거해 있다는 것이 곧 밝혀지게 되었다. 내가 이 위험을 깨닫고 실천적인 일과 직면하자마자 나는 아주 열심히 그 일에 뛰어들었는데 그것은 나의 지적 추구에 있어서는 일면으로는 유익했고 일면으로는 유해했다. 나날의 업무에 이 같이 뛰어든 첫 번째 사례는 빈골프(Wingolf)라고 불리던 한 학생단체에 직접 참여한 것이었다. 그 단체가 가진 그리스도교적 노선과 현대의 자유주의적 이상 및 실천 사이에서 빚어지는 긴장은 그 단체의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 기꺼이 불타오르던 그 개인적 긴장과 마찬가지로 실제적 정책에 관한 많은 문제를 야기했는데 그것은 특히 내가 그 단체의 회장으로 있던 동안에 더욱 그러했다. 

그리스도교적 공동사회의 원리에 대한 문제는 그 단체에서 너무나도 철저히 논의되어서 행동적 투쟁을 벌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것에 의해 크게 도움을 받았다. 그 기간 동안에 나는 종파적 신조와 같이 객관적으로 표방되는 성명의 가치를 이해하게 되었다. 만약 한 공동체가 주관적인 신념이나 회의를 넘어선 의미의 신앙고백적 기반을 가지면서 그것을 광범위하게 인정하게 된다면 그 공동체는 회의와 비판과 불확실에의 경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뭉치게 될 것이다.


나의 대학 친구들은 2년간의 교구 과정과 4년간의 서부전선 야전 군목 과정을 밟았다. 전후에 나는 교회 행정사무를 잠시 동안 맡아보았다. 실무적인 일을 하던 이 몇 년 동안 나의 이론적 연구는 비록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적 문제에 뛰어든 이 기간은 이론적 삶을 향한 나의 근본적 몰두를 뒤흔들어 놓지는 않았다.


이론과 실제 사이의 긴장은 혁명의 돌발로 더욱 고양되었다. 처음 얼마동안 나는 정치적 상황에 매우 민감하게 되었다. 1914년 이전의 모든 독일 지성인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정치에는 무관심한 편이었다. 사회적 죄악에 대한 우리들의 의식은 정치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았다. 독일 제국의 몰락과 1차 대전 마지막 해의 혁명을 맞아서야 나는 그 전쟁의 정치적 배후가 되는 문제들, 곧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상관관계, 부르주아 사회의 위기, 계급간 갈등 등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몰고온 어마어마한 힘은 신의 관념을 뒤흔들고 그 관념에 악마적 색칠까지 할만큼 위협적이었는데 그것은 전쟁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인간사회를 다시 뜯어고치고자 하는 소망을 통해 그 출구를 찾게 되었다. 종교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요청이 메아리치자 나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또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 우리는 "종교와 사회주의"에 관한 이론적 문제만을 다루었다. 내가 속해 있던 써클은 메니케(Mennike), 하이만(Heimann), 뢰브(Low) 및 명백히 이론과 관련된 교수들의 집단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적은 정치적이었으며 우리는 이론적 입장과 때로는 마찰을 일으키는 실제적 정치의 문제와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되었다. 이 마찰은 종교사회주의가 교회나 정당이나 (또 우리가 교수들이라는 점에서) 대학에 대해 미치는 영향을 논의하는 가운데에 반영되었다.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종교사회주의자들의 단체가 결성되었는데 그들의 목적은 교회정책의 변화와 이론적 토론을 통하여 교회와 사회민주당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이론적 바탕이 적당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단체로부터 떨어져 있었으며 (변명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리하여 교회정책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이 때에 이론과 실제 사이에 있었던 긴장은 이론 쪽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비록 이로운 것은 아니었을지언정 완전히 해결되었다.


사회민주당에 대한 나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론적 바탕에 대한 노력에 이바지함으로써 그 당에 영향을 주기 위해 입당하였다. 이런 목적 아래에서 나는 "사회주의의 새 장(Neue Blatter fur den Sozialismus)"이라는 잡지를 창간하기 위해 종교사회주의 단체의 친구들과 규합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독일 사회주의의 굳어버린 신학에 새 생명을 불어넣고 종교적 철학적 관점에서 그것을 다시 짜만들고자 희망했다. 

나 자신은 실제 정치에는 개입하지 않았지만 동료들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잡지는 당시의 정치상황의 문제들에 휘말리고 말았다. 물론 나는 특별한 임무에 대해서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이론적 작업은 정치의 목적에 이바지하고 정치운동의 개념적 표현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므로 그에 또 한 번 손상을 받아가며 그들의 편을 들지는 않았다. 한편 실제 정치와의 그 비교적 드문 접촉마저도 나의 전문작업이 그토록 절실하게 요청하는 정신집중을 방해했다.


이론과 실제 사이의 긴장은 전후 독일 대학을 다시 조직하는 데 대한 논의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19세기 때에는 고전주의의 낡은 인본주의적 이상이 학문의 전문화와 직업적 훈련에 대한 점증하는 질적 양적 요구에 의해 침식되었다. 학생들이 엄청나게 밀려들었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두루 전능한(well-rounded)" 인간이라는 고전적 이상을 치켜드는 척조차도 할 수 없었다. 

궁색한 타협안들이 이상과 현실의 엄연한 괴리를 은폐시키고자 고안되었다. 1931년 11월 22일자 프랑크푸르트 신문에 실린 나의 글에서 나는 이원적 교육계획안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빗발 같은 찬반양론을 일으켰다. 나는 한편으로는 전문학교의 설립을 주장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학에 대한 옛 개념을 대변하는 전문적 훈련에 메이지 않는 교양담당 교수 제도를 주장했다. 

양자는 상호 관련되어 있었지만 목적과 방법에 있어서는 달랐다. 교양과목 교수는 로고서(Logos)로서 인간 실존의 문제를 조명하는 임무를 띤 철학정신을 갖추도록 되어 있었다.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충성을 돌아보지 않는 철저한 질문도 있어야 했다. 동시에 교수의 교육철학은 당시 생활의 정신적, 사회적 문제들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어떠한 위대한 창조적 철학도 이 같은 요청을 기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19세기에 있어서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철학이 학교와 "철학과 교수"의 도구로 나날이 전락해 가고 있었을 때에 그 나약성의 징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금세기가 정치적 수단으로 근본적인 질문을 억누르고 정치적 세계관을 강요하려고 애쓸 때마다 그것은 철학을 적지 아니 파괴한다. 오늘날의 "정치적 대학"은 실제를 위해 이론을 희생시킨다. 이것이 그 반대 유형과 마찬가지로 대학의 두 유형 모두에게 숙명이 되어 있다. 현금에 와서 이론과 실제 사이의 경계선은 미래 대학의 운명과 함께 문명세계의 인본주의 문화의 운명이 결정될 전쟁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