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리히의 생애와 사상 - 김경재
역자 후기
사회계급들 사이에서
소읍 생활의 특수한 성격은 어린 시절부터 내가 뚜렷이 볼 수 있었던 사회계급들 사이의 경계선을 마련해 주었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동무들을 사귀었는데 나는 나의 부모와 시장, 의사, 약사, 몇몇 상인들 등의 아이들에 의해 대표되는 상류계급에 대해 그들이 가지는 적의를 함께 하였다. 비록 나는 이 몇몇 선택된 부류의 아이들과 라틴어 개인교습을 받고 그리고 나중에는 그들과 함께 가까운 도시의 김나지움에 다녔지만 나의 실제 동무들은 초등학교의 소년들이었다. 그것은 나와 비슷한 사회적 수준을 가진 아이들과 상당한 알력을 빚게 하였고 우리는 우리의 학창시절을 통하여 외톨이들로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특권계급에 속한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매우 일찍부터 훗날 나의 활동에 매우 중요하게 된 사회적 죄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상류계급의 아이가 보다 낮은 계급의 아이들과 일찍부터 친밀한 만남을 갖게 될 때 거기에는 가능한 두 결과만이 있는 듯하다. 그 하나는 사회적 죄의식의 계발이요 다른 하나는 낮은 계급 아이들의 공격적 원한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계급증오다. 나는 자주 그 두 유형에 직면해왔다.
그러나 사회문제와 관련된 나의 경계선적 상황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아버지의 교구에는 토지를 가진 오랜 귀족사회의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교회의 후원자들이었기 때문에 나의 부모는 그들과 직업적, 사회적 접촉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장원(莊園)의 집들을 방문하고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 놀 수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이런 가문의 한 후손이자 드문 지적 능력을 가졌던 한 사람은 나의 평생 동안의 친구가 되었다. 이 접경적 상황의 한 결과로 부르주아 계급(나 자신의 계급이기도 한)에 대한 나의 훗날의 반대는 사회주의가 가끔 그렇게 되었듯이 또 하나의 부르주아 계급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는 사회주의 속에 사회주의적 노선과 내적 연관성을 가진 봉건전통의 요소를 합류시키고자 시도했다. 내가 "종교 사회주의의 노선(Grundlinien des religiosen Sozialismus)"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사회주의적 결단"에서 전개한 바 있는 종교사회주의의 특수한 윤곽은 나의 그 같은 태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 까닭에 내가 독일 사회민주당만큼이나 부르주아적이 되어버린 한 정당에 가담할 수 있었던 것은 고심스러운 결정이었고 단지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나의 젊은 시절의 이 같은 체험을 다룬 글 "힘의 문제 : 철학적 근본확립에 대한 고찰(Das problem der Macht : Versuch einer philosophischen Grundlegung)"은 나의 몇몇 친구들에 의해서까지도 오해되었는데 그 까닭은 그들의 부르주아적 평화주의가 이 특수한 경계선적 상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기서 다른 어느 곳보다 독일에서 그 자체의 특유한 전통을 가지고 별개의 집단을 이루고 있는 공직자에 대해서 좀 이야기해야겠다. 좁은 의미에서 보면 나 또한 학교 직원인 목사의 아들로서, 또 프러시아 대학의 전직 교수로서 이에 속한다. 프러시아 관료주의가 뜻하는 것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모든 것에 앞선 의무 개념의 우선성, 최고의 규범으로 평가되는 법과 질서, 국가권력의 중앙집권화 경향, 군사적 행정적 권위에의 복종, 그리고 "조직적 전체"에 대한 개인의 종속을 고집한다. 독일 철학이 철학적 이론에서나 정치적 실제에 있어서 고도로 개발된 체계를 좋아하는 것이 바로 이 같은 이데올로기의 탓이라고 하는 것은 극히 정당한 말이다. 이 프러시아적 이데올로기는 나의 생애와 활동의 여러 군데에서 반영되었는데 예를 들면 "지식체계에 관한 개설(Entwurt einer Systems der Wissenschaften)"에서나 또 내가 전시나 평시나 기꺼이 군사적, 행정적 권위에 복종할 뜻이 있었다는 점에서나 또 결정적인 것으로서 내가 그 정책을 광범위하게 반대하는 정당을 지지하고 있었다는 데에서 그러했다. 확실히 나는 이 태도의 한계를 의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나의 양심에 무서운 짐을 지웠으므로 결과적으로 개인적인 결단을 가져왔고 또 전통이라는 새롭고 예기치 않았던 것의 출현 앞에서의 망설임이라든가 개인적 선택의 위기를 줄이기 위해 모든 것을 싸잡는(all-embracing) 질서를 열망하는 따위를 파기하게 했다.
내가 명백히 부르주아적인 삶에 대해 느꼈던 뿌리깊은 혐오감은 "보헤미아"라고 불리던 조그마한 사회적 집단에 대한 나의 애착에서 드러났다. 예술가, 배우, 신문인, 작가 등이 매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이 집단은 지적 열정을 순전한 비부르주아적 외관과 결합시켰다. 신학자이자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다시 한 번 경계선 위에 서게 되었다. 이 집단의 성격은 사고와 행동에 있어서 그 어떤 부르주아적 인습도 명백히 없었다는 점, 그리고 지적 급진주의 및 아이러니컬한 자기비판에 대한 놀라운 능력 등으로 특징지어져 있었다. 보헤미안들은 중산계급의 발길이 드문 카페나 아뜨리에나 유원지에서 만났다. 그들은 급진적인 정치적 비판에 기울어져 있었고 그들과 같은 계급의 회원들에게보다는 공산주의 운동가들에게 더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국제적인 예술가 운동이나 문예운동을 추구했다. 그들은 회의주의적(懷疑主義的)이었고 종교적으로는 급진적이었으며 또 낭만적이었다. 그들은 반군국주의적(反軍國主義的)이었고 니이체와 표현주의와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봉건질서층이나 부유한 부르주아 계급의 회원들은 아무도 "보헤미아"회에 반대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언제나 보헤미아회에 가입할 수 있었다. 회원으로 가입하는 대가로 그들은 보헤미안들에게 사회적 경제적 특권을 제공했다. 반대는 선입견과 암암리의 요구를 지니고 지적, 특히 예술적인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며 안정을 바라고 지식인을 불신하는 하층 중산계급인 소부르주아 계급(petit bourgeoise)에서 나왔다. 내가 한 번도 소부르주아 계급의 삶에 포함되어 본 적이 없으며 오히려 그 계급 출신의 많은 사람들처럼 명백한 오만함(만약 반의식적이었다면)으로써 그것을 물리쳤다는 사실은 나의 지적 운명과 인간적 운명을 틀잡는 것이었다. 지적으로 볼 때 소부르주아의 옹졸함을 극복하려는 투쟁은 끊임없이 새로운 전망을 열어주었는데 그것은 이번에는 나로 하여금 지적이거나 사회적인 안주처를 찾는 데에 어려움을 주었다. 나는 중산계급의 반동적 혁명으로 말미암아 개인적으로 곤경을 겪기도 하였는데 그 반동적 혁명은 지식층을 강타하여 결국 파멸시키고 말았다. 낭만적인 중산계급 이데올로기(나찌즘)의 대표자들에 의해 지식인들이 악의에 찬 박해를 받았다는 것은 지식인들의 반쯤은 정당하게 중산계급을 배척한 데에 따른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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