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리히의 생애와 사상 - 김경재
역자 후기
교회와 사회 사이에서
비록 나는 가끔 교회의 교리와 관습을 비판해 왔지만 교회는 늘 나의 보금자리였다. 그 같은 사실은 새로운 이교적 이념들이 교회로 밀려들어오던 즈음과 내가 나의 정치적이고도 종교적인 보금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지는 않나 하고 두려워하던 즈음에 더욱 뚜렷하게 되었다. 그 위난(危難)으로 나는 내가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느낌은 나의 어렸을 적의 경험 - 프로테스탄트 목사의 집이라는 데서 온 그리스도교적 영향 하며 19세기 막바지의 동부독일의 조그마한 도시가 가질 수 있었던 비교적 잘 이어온 종교적 관습등 - 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교회 건물과 그것의 신비로운 분위기며 예배, 음악, 설교 그리고 어느 해의 며칠 동안, 때로 몇 주 동안의 읍내 생활을 장식했던 그리스도교의 큰 축제들에 대한 나의 사랑은 교회적이고 예전적(禮典的)인 것에 대한 잊을 수 없는 감명을 내 마음에 심어 주었다. 또 이런 것들 위에 그리스도교 교리의 신비라든가 그것이 어린아이의 맘속에 끼친 영향, 또 성경에 나오는 말이며 거룩함, 죄, 용서 따위에 대한 가슴 설레던 경험 등이 보태져야 하리라. 이 모든 것은 내가 신학자가 되어 그 길을 걷고자 마음먹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내가 성직을 받고, 목사로서 활동하고, 대학이란 환경에 들어가서까지도 오랫동안 설교와 예배에 대한 관심을 이어온 것은 모두 내가 교회에 속해 있다는 깨달음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나는 경계선 위에 있었다. 일종의 소외감이 교회의 교리와 제도에 대한 나의 커가는 비판을 대동하고 나왔다. 교회 밖의 지식인과 무산계급을 만난 것이 이 점에 있어서는 결정적인 것이었다. 나는 신학 공부를 끝마친 훨씬 뒤에야 비로소 교회 밖의 지식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 만남에 있어서 나의 태도는 그 때의 접경적 입장에 따라 호교적이었다. 호교적이 된다는 것은 견해에 있어서 통속적 척도를 가진 상대편의 앞에서 스스로를 방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대 교회의 호교론자들이 공격해 오는 이교주의 앞에서 스스로를 옹호하고 있었을 때, 공통된 척도는 이론적이고도 실천적인 이치인 로고스(Logos)였다. 호교론자들이 그리스도를 로고스와 같이 여기고 신의 명령을 자연의 합리적 법칙과 같이 여겼기 때문에 그들은 이교적인 반대자들 앞에서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실천에 대한 까닭을 변론할 수 있었다. 우리들의 시대에서 그리스도교 옹호론은 현존하는 지적, 도덕적 입장들에 반대하면서 새로운 원리들을 내세우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의 임무는 고개를 드는 상반된 입장들에 맞서서 그리스도교의 원리를 감싸는 일이다. 옛날의 호교론자들에게나 오늘날의 호교론자들에게나 마찬가지로 결정적인 문제는 공통된 척도, 곧 논쟁이 가라앉을 수 있는 재판정의 문제이다.
그 일반적인 척도를 찾는 가운데에서 나는 계몽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오늘날의 사상적 경향은 비록 그것이 교회중심적 그리스도교에 비판적 태도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리스도교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현대의 사상적 경향은 가끔 그렇게 불리듯이 이교적인 것은 아니다. 이교주의 - 특히 국가주의적 치레를 한 - 는 1차 대전 후에 그리스도교적 인본주의가 여지없이 붕괴된 것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런 류의 이교주의 앞에서도 호교론 같은 것은 없었다. 유일한 문제는 죽어갈 것인가, 살아남을 것인가였다. 이 문제는 악마적 다신주의에 대항해 싸우던 예언자들의 일신주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대에 있어서 호교론이 가능했던 것은 단지 다신주의가 인본주의로 채워져 있었고 그 인본주의 안에서 그리스도교와 고대가 그들 마음대로 공통척도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대 호교론이 근본적으로 이교적인 인본주의에 부닥쳤던 반면 오늘날의 호교론의 남다른 점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적인 인본주의에 부닥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문제를 나의 글 "렛싱과 인류 육성의 이념(Lessing und die Idee der Erziehung des Menschengeschlechts)"에서 다루었다. 마음속으로 그런 관점을 품고 나는 여러 가지 사적인 일로 베를린에 머무르면서 호교론에 관한 강좌와 토론회를 꾸려나갔다. 이런 모임들의 결과는 복음주의 교회의 지도부에 제출한 보고서로 간추려졌다. 이런 활동은 후에 국내(미국) 전도단에 호교론위원회를 세우는 데로 이어졌다.
전쟁 후에야 비로소 그리스도교적 인본주의의 실제와 성격이 내게 아주 친숙해졌다. 노동운동이라든가 소위 반그리스도교적 민중들과의 만남은 나에게 거기에도 역시 그 인본주의적 성격이 비록 예술과 과학에 의해 오랫동안 불신되어온 유물론적 철학인 것처럼 보여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적 바탕이 인본주의의 안에 감추어져 있음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민중들에 대한 호교적 메시지는 지식인들에게보다 훨씬 더 아쉽고도 어려웠는데 그것은 민중들의 반종교성이 계급적 반목에 의해 드높아졌기 때문이었다. 계급갈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교회가 호교적 메시지를 초잡으려 한 것은 애초부터 실패가 예정된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에서 그리스도교를 방어한다는 것은 계급 갈등 속으로 적극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오직 종교사회주의만이 무산대중에게 호교적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다. "뛰어든 전도(inner mission)"가 아닌 종교사회주의는 노동계급 가운데에서의 그리스도교적 활동과 호교의 필연적인 형식이다. 종교사회주의의 호교적 요소는 자주 그 정치적 모습에 의해 가리어져 왔던 탓으로 교회는 그 자신의 활동에 있어서 종교사회주의의 간접적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 점은 사회주의자들 자신이 더 잘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가끔 내게 종교사회주의가 대중을 교회의 그늘 아래에 데리고 가서는 사회주의 정부를 이룩하려는 투쟁으로부터 그들을 떼어놓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비치곤 했다.
교회마저도 종교사회주의를 거절했는데 이는 그런 움직임이 전통적 상징들과 교회적 사고 및 실천의 개념을 버리고 말거나 혹은 그런 것들을 어느 정도의 바닥 다지기를 한 뒤에서야 쓰지 않을 수 없었던 때문이었다. 또 그런 것들을 대중없이 함부로 썼다면 무산계급은 자동적으로 그것을 배척했을 것이다. 종교사회주의의 임무는 노동운동의 그리스도교적 인본주의 속에 함축된 것과 교회의 아주 다른 예전적 형태 속에 함축된 것이 같은 본질임을 내보이는 일이었다. 많은 젊은 신학자들이 그리스도교적 인본주의에 대한 이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교회 성직자들이 도저히 손잡을 수 없는 자들에게 종교적 감화를 주겠다는 뚜렷한 목적으로 성직이 아닌 자리를, 특히 사회봉사의 영역에 있어서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깝게도 그런 기회들은 몇몇에게만 이용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교회와 인본주의 사회의 문제와 교회와 무산계급의 문제는 바르트 학파의 젊은 신학자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그 틈은 결코 교회에 의해서 해결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분열된 인본주의 사회는 새로운 이교적 경향 아래에 무더기로 희생되고 말았다. 교회는 그같은 경향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더욱 더 반(反)인본주의적인 것처럼 보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무산계급은 종교적 소극성의 등뒤로 가라앉았다. 비록 지식인들이 국가주의적 이교주의에 대항해서 교회의 존립을 지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교회 쪽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교회가 수호하는 교의는 그들에게 먹혀들지도 않았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없었다. 이런 부류들에게 손을 뻗치기 위해서 교회는 교회적이 아닌 인본주의가 알기 쉬운 언어로 복음을 선포해야만 했다. 교회는 지성인들에게도 대중에게도 복음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확신시켰어야 했었다. 그러나 그런 확신은 고백교회의 실랄한 반인본주의적 역설 때문에 주어질 수 없었다. 그같은 역설을 일으키게 한 현실이 먼저 검토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브룬너(Brunner)라든지 고가르텐(Gogarten) 같은 신학자들은 그런 검토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그들은 오히려 인본주의에 얹혀 살았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선포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그들의 표현은 그들이 반대하고 있던 것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부인하는 식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노이베르크라이스(Neuwerkkreis)나 나의 오랜 친구이자 이런 노력에 있어서의 동료인 헤르만 샤프트(Hermann Schafft)가 편집한 같은 이름의 잡지에서도 다루었듯이 그리스도교 복음의 언어 문제가 진지하게 거론될 때마다 심각한 문제들이 떠올랐다. 전래적인 종교적 성서용어나 옛 교회의 예배가 다시 들어설 수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언젠가 내게 말했듯이 인류가 종교적인 원형적(原型的) 언어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원형적 언어들은 모든 것을 객체화(客體化)해버리는 우리들 사고의 틀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과학적 파악방식에 의해 그 전래적인 힘을 빼앗기고 말았다. 합리적 비판주의는 원형적 언어인 "신"의 의미 앞에서는 아무 힘이 없다. 그러나 무신론은 "객체적으로" 존재하는 신이라는 앞 뒤 막힌 생각에게는 지당한 대답이 된다. 말하는 사람은 그 말을 전래적인 상징적 의미에서 쓰지만 듣는 사람은 그 말을 그 시대의 과학적 의미에서 듣는다면 실로 진풍경이 벌어지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왜 언젠가 자극시킬 목적으로 교회는 일체의 원형적 언어에 대해 30년 동안의 사용금지령을 내려야 한다는 말을 꺼냈던가 하는 이유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만 한다면 몇몇 경우에서 그러했듯이 교회는 새로운 용어를 개발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고전적인 예배언어와 성경말을 오늘날의 말투로 너무 심하게 옮기려 하던 노력은 비참한 실패를 하고 말았다. 그러한 시도는 새로운 창조를 가져오지 않고 의미의 손상을 가져왔다. 신비적 용어의 사용마저도, 특히 내가 가끔 시도했던 바와 같이 설교에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용어들은 그리스도교 복음의 모든 본질을 다 담기는 거의 불가능한 그 어떤 다른 내용을 전한다. 유일한 해결책은 그 원형적 종교용어를 그대로 쓰면서 동시에 그것의 그릇된 사용을 거부함으로써 그 전래적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우리는 전래적인 원형적 언어를 그 경계선 위에서 되찾기 위해 고전용어와 현대용어의 사이에 서야 한다. 사회의 현존하는 위난은 많은 것들을 종교언어가 다시 그 고유한 의미로 들릴 수 있는 이 경계선으로 몰아왔다. 만약 눈멀고도 오만한 정통파가 이들 용어를 독점함으로써 종교적 실제에 민감한 자들을 놀라게 해서 쫓아버리거나 또는 그들을 몇몇 현대적 이교주의에로 몰아 넣어서 결과적으로 그들을 교회에서 몰아내는 일이 있게 된다면 그것은 통탄할 일일 것이다.
교회와 사회의 문제는 나로 하여금 "교회와 인본주의 사회(Kirche und humanistische Gesellschaft)"라고 이름한 글에서 "드러난(manifest)" 교회와 "숨은(latent)" 교회 사이에 구별을 짓게 했다. 이것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낡은 프로테스탄트적 구별이 아니라 보이는 교회 안에서의 이중성을 다룬 것이었다. 그 글에서 내가 보여준 것과 같은 식의 구별은 교회의 바깥에 존재하는 그리스도교적 인본주의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조직화된 교파들과 전통적인 신조(creeds)로부터 소외된 자들을 비교회적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한 평생의 반 동안을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오면서 나는 그들 안에 얼마나 많은 숨은 교회가 있는 지를 배웠다. 나는 거기에서 인간실존의 유한성에 대한 체험이며 영원하고 조건 없는 것에 대한 물음이며 정의와 사랑에 대한 절대적 이바지며 이상향의 배후에 놓인 소망이며 그리스도교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며 그리고 국가와 교회의 상호침투 속에서 그리스도교가 이념적으로 잘못 쓰여지는 것을 아주 예리하게 인식하는 모습 등을 만날 수 있었다. 때때로 내게는 그 "숨은 교회" -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찾아낸 것을 이름지은 것 - 가 조직화된 교파 교회보다 더 참다운 교회인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 구성원들이 진리를 가지고 있는 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조건에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몇 해는 조직화된 교회만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교적 침략에 맞선 싸움을 끌고 갈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숨은 교회는 이 싸움에 필요한 종교적 무기도 조직의 무기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드러난 교회에서 이 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교회와 사회 사이의 틈을 더 크게 벌일 우려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숨은 교회의 개념은 우리들 시대의 수없이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운명적으로 걸어야 할 경계선의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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