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 영 (李柱郢, 건국대 사학과 교수)
위정척사파에 맞선 문명개화파
이승만(李承晩,1875-1965)의 생애는 그와 비슷한 연령대에 속했던 김구, 김규식, 안창호,이동휘와 같은 독립운동가들과 비교해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첫 번째 차이점은 그가 미국 최고 수준의 교육기관에서 정규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 안에서도 문필가로서 상당히 알려진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조지와싱톤(학사)과 하바드(석사)을 거처 프린스톤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는 데, 당시에 그것은 한국인으로서는 물론, 동아시아 인으로서도 최고의 학력이었다. 그리고 그의 사실상의 지도 교수는 얼마 후에 대통령이 된 우드로 윌슨 총장이었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은 프린스톤 대학출판부에서 출간될 정도로 수준을 인정받았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일어나기 몇 달전인 1941년 여름에 쓴 <일본내막기>는 미국에서 베스트셀러에 가까운 인기를 누렸다. 어떻든 그는 1904-1965년간에 <뉴욕타임즈>에만 1,256 건의 관련 기사가 실릴 정도로 국제적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이와 같은 수준높은 지적 배경 때문에 그는 언제나 시기와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그 때문에 오만하고 독선적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그 결과로 인간적인 고립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두 번째 차이점은 당대의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으로 생애를 마쳤던 것과는 달리 독립운동 생활을 끝마친 뒤에 통치자로서의 또 다른 생애를 살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평균수명이 짧던 당대의 인물로는 드믈게 90년이란 긴 삶을 살았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적어도 세 사람 몫의 삶을 산 셈이 되었다.
20대에 그는 언론인으로서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와 ‘제국신문’ 등을 중심으로 러시아의 이권 탈취에 반대하는 주권수호 운동을 벌이다가 6년간 감옥에서 생활하였는 데, 이것만으로도 역사에 남을 한 인물의 생애가 되기에 충분한 업적이었다. 또한 40대에서 60대까지는 미국과 유럽을 오가는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았는 데, 이것 역시 역사에 남을 한 인물의 생애가 되기에 충분한 업적이었다. 그리고 70대에서 80대까지는 대한민국을 세운 정치가와 그것을 통치한 위정자로서의 삶을 살았는 데, 이것 또한 역사에 남을 한 인물의 생애가 되기에 충분한 업적이었다.
이와 같은 여러 단계의 삶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복잡해지게 된다. 왜냐하면 통치자로서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독립운동가로서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에는 그의 독립운동을 낮게 평가하려는, 심지어는 독립운동가의 대열에서 아예 빼버리려는 움직임도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미묘한 상황에서 역사적 인물로서의 이승만을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문명사적(文明史的)인 관점에서 한국근현대사를 보는 새로운 자세를 가저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지난 130 여년간의 한 반도 역사는 근본적으로 한 민족이 중국의 대륙문명권으로부터 벗어나 미국의 해양문명권으로 옮겨 가는 ‘문명사적 전환’을 주제로 삼고 있는 데, 그와 같은 전환과정에서 이승만을 비롯한 그 시대의 역사적 인물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를 가려내는 것이 역사적 평가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륙문명권에서 해양문명권으로
그러한 ‘문명사적 전환’이 시작된 한말에 지식인들은 크게 두 파로 갈라져 있었다. 하나는 종전처럼 중국의 대륙문명권에 그대로 머물면서 전통적인 것을 지키자는 ‘위정척사파’였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벗어나 일본이나 미국의 해양문명권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자는 ‘문명개화파’였다. 청년 이승만은 후자에 속하였다.
이승만은 혈통적으로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로 왕족에 속했지만, 그 자신은 조선 왕조와 양반 사회를 거부하는 반항아였다. 그의 조상 양녕대군은 세자 책봉까지 받았으나 동생인 세종에게 자리를 내주었던 불운한 왕자였기 때문에, 그 자손들도 조선 시대에 빛을 보지 못하였다. 이승만도 어린 시절을 가난 속에서 보냈다. 그 과정에서 형성된 반체제적 성향 때문에 1899년에서 1904년까지 6년간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어느 정도로 조선왕조에 대해 반감을 가젔나 하는 것은 1904년에 민영환과 한규설의 주선으로 고종의 밀사로 미국의 시오도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러 갈 때, 고종 황제의 면담 제안을 거절한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한일합방 직후인 1910년에 미국 유학에서 서울로 돌아 왔을 때, “나라가 없어진 것은 슬프지만, 왕, 양반, 상투가 없어진 것은 시원하다”고 말했던 사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이승만과 그 부모는 과거 시험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그리하여 나이가 차지 않은 13세부터 나이를 속여가면서 과거 시험에 여러 차례 응시하였다. 물론 불합격이었다. 그러나 1895년의 갑오경장으로 과거제가 폐지되자, 이승만 가족에게는 절망만이 남았다. 그 때 나타난 것이 미국 선교사 아펜셀러가 세운 배재학당이었다.
그에게 배재학당은 뜻밖의 행운이었다. 우선 그것은 최악의 빈곤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 빠른 영어 습득 때문에 영어 시간 조수로 임명되고, 미국인 의료 선교사의 한국어 개인 교사로서 돈을 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미국과 그의 ‘해양문명권’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당시 조선은 열강의 각축 속에서 주권을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주된 관심은 독립이었다. 그것은 1897년에 그가 종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행한 영어 연설의 제목이 ‘조선의 독립’이었던 사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배재 졸업 후에 그는 <매일신문>과 <제국신문>을 발행하는 기자와 언론인으로서, 그리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행동대원으로서 열강의 이권 침탈과 조선 정부의 무능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태어난 선동가’로서 그는 항상 가두시위에서 앞장을 섰다.
과격한 행동으로 그는 6년에 가까운 기간을 한성 감옥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는 일본의 근대화에 흥미를 느낀 나머지 박영효를 따라다니는 친일성향의 청년들과 잠시 어울린 적이 있었는 데, 그것이 그로 하여금 반역죄에 걸리게 하였다. 즉, 박영효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고종을 몰아내고 아들인 의친왕을 황제로 세우려 음모를 꾸몄다는 죄목이었다. 꽃다운 20대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내면서, 죽음까지 생각할 정도로 절망적이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면서 새 삶을 알게 되었다. 그의 신앙은 이상재를 포함한 40여명의 동료 죄수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한성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미국 선교사들이 넣어 주는 책들을 통해 미국의 해양문명을 좀 더 깊이 알게 되었다. 특히 미국의 공화제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조선이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중국적인 생활방식’을 버리고 ‘미국적인 생활방식’을 배우는 길 밖에 없다고 믿게 되었다. 이 때의 생각은 <독립정신>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약소민족 지도자의 구비 조건
러일전쟁이 진행되던 1904년에 그는 감옥 문을 나왔고, 즉시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손에 쥔 것은 30 통에 가까운 미국인 선교사들의 소개장 뿐이었다.
그의 미국 유학은 시오도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기울어져 가는 조선국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호소하는 고종의 밀사를 겸한 것이었다. 1905년 여름에 어렵게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는 하였지만,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을 지지하기로 결정된 미국의 대외정책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로부터 1910년까지 그는 미국 대학에서 학업에 전념하였다. 조지와싱톤,하바드,프린스톤을 거치는 동안 대개는 등록금 면제 혜택은 받았지만, 생활비는 없었기 때문에 교회를 돌아 다니며 조선 사정에 대한 강연으로 돈을 벌었다.
그의 정규 교육은 30세에 늦게 시작된 것이었지만, 아주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져 시간 낭비가 없는 성공적인 학창 시절이 되었다. 미국 대학에서 공부하는 목표가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에 필요한 지식을 얻는 다는 뚜렷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목표에 모든 것을 집중하였다. 수강 과목 가운데 미국 역사와 유럽 역사가 많았던 것은 서양의 선진국들이 부강해진 이유를 알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프랑스 어, 유럽과 미국의 외교사, 국제법의 강의를 많이 선택한 것은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계획했기 때문이었다.
학업 과정에서 만난 최대의 축복 가운데 하나는 프린스톤 시절에 우드로 윌슨 총장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윌슨 교수는 이 약소민족의 청년을 자주 집으로 초대하여 격려하였다. 나중에 대통령이 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하여 피압박 민족들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정작 그가 주재한 1919년의 파리 평화회의는 조선의 독립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승만은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파리에 갈 미국 여권 조차 얻지 못하고 있었다.
1910년에 박사 학위를 받자 일단 그는 서울로 왔다. 그리고 1912년까지 머물면서 YMCA와 전국의 교회를 다니며 교육과 선교 사업에 열정을 바쳤다. 그의 쟁쟁한 학벌과 열정적인 애국계몽운동은 나라를 잃고 방황하던 당시의 청년들에게 탈출구를 열어 주었다. 그 결과로 임병직을 비롯한 많은 청년들이 그의 영향을 받아 미국 유학 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105인 사건의 발생으로 체포의 위협을 받게 되자, 이승만은 또 다시 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약소민족의 생존 전략
1913년부터 하와이에 정착한 그는 교육과 선교 사업에 종사하였다. 한인중앙학교와 한인기독학교회를 세워 한인들에게 우리 말과 민족혼을 가르쳤다. 그 결과로 양유찬 같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한인 노동자들에게 광복의 꿈을 북돋우어줌으로써 희망을 갖게 하였다.
1919년에 고국으로부터 3.1운동의 소식이 전달되자, 흥분한 이승만은 필라델피아로 달려 가서 서재필과 함께 제1차한인회의를 열고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그 모임에는 미국의 저명 인사들이 적지 않게 참가했기 때문에, 조선인들의 독립의지가 미국인들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부터 이승만은 한국인의 가장 뚜렷한 지도자로 떠 오를 만큼 그 중요성을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3.1운동 직후에 국,내외에서 6개의 임시 정부가 나타났는 데, 모두 이승만의 이름을 집정관총재나 국무경 같은 고위직에 올려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그는 서울의 기독교 계통 인사들이 세운 한성정부, 즉 대한공화국의 대통령 자리를 좋아하여 그 직함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그것이 다른 임시정부들과 통합하여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구성하게 되자, 그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는 활동 무대인 미국을 쉽사리 떠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취임 2년이 가까오는 1920년말이 되어서야 상해로 부임하였다. 그리고는 독립운동 노선의 충돌, 출신 지역 사이의 갈등, 이념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해의 정치판에 휩쓸리게 되었다.
상해에서의 가장 큰 문제는 독립운동 방법을 둘러 싼 충돌이었다. 당시 상해에서는 국무총리 이동휘와 신채호의 무력투쟁론이 우세하였다. 그것은 독립에는 즉각적인 군사 행동이 필요하므로 만주로부터 무장 부대를 국내에 투입하여 관공서를 폭파하고 관리를 암살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소련의 무기 지원이 필요하므로, 임시정부를 시베리아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항해 이승만은 외교독립 노선을 제시하였다. 사소한 개별 테러 행위는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보복만을 강화할 것이므로 힘이 없는 상태에서의 무장투쟁은 실현성이 없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조선의 독립은 일본이 어떤 강대국, 즉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할 경우에만 가능한 데, 그 때를 대비하여 미국과 세계 열강의 정부와 여론을 설득시킬 외교와 선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따라서 상해 임시정부는 정상적인 국가의 정부처럼 운영되기 보다는 여러 지역의 다양한 독립운동을 연결하고 조정하는 중앙 기구로서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해는 이승만의 이러한 주장이 먹혀 들어갈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 때문에 그는 6개월만에 쫓겨가듯 미국으로 돌아 갔다. 그리고 자신의 방식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국 1925년에 상해 임시정부의 의정원은 그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초강대국의 지원을 향한 외교독립론
그러므로 이승만은 임시정부와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독립 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구미위원부’의 전미국 조직망과 하와이의 ‘동지회’를 기반으로하여 <태평양잡지>와 <북미시보>를 발행하면서 백인 사회와 한인 사회에 대한 선전, 조직 활동을 해 나갔다.
그 결과로 미국인들로 구성된 ‘한미협회’를 조직하고, 1942년에는 미국 의회를 상대로하는 ‘로비스트’ 등록을 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승만의 미국인 지지자들 가운데는 기독교인들로 이루어진 변호사, 언론인, 대사, 상원 원목과 같은 유력 인사들이 많았다.
이와 같은 지지 기반을 토대로 이승만은 미국 정부를 상대로 독립 청원활동을 벌였다. 그리하여 이미 1919년말에는 상하양원에서 한국문제에 대한 결의안이 채택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미국 국회가 한국인들의 독립의지에 대해 관심과 동정심을 가진다는 것을 나타낸 문서였다.
그리고 1921년말부터 1922년초에는 와싱톤 군비축소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각국 대표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1933-34년에는 일본의 만주 침략을 규탄하고 있는 제네바의 국제연맹에 가서 일본의 조선 지배를 고발하기도 하였다.
1941년 12월에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이승만이 고대하던 미국과 일본의 전쟁이 일어났다. 그에 따라 한국의 독립 가능성도 커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승만과 상해 임시정부의 어색했던 관계도 다시 좋아졌다. 상해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하여 미국 정부를 상대로 외교 활동을 벌이도록 요청하였다.
이승만은 미국 정부에 대해 임시정부를 승인해 주고 무기대여법에 따른 무기 원조를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미국의 군사 원조로 육성된 광복군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미국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이 패망 뒤에 있을 소련의 한 반도 점령도 막는 데도 미국은 광복군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였다. 이와 같은 주장으로 미국 정부를 설득시키기 위해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 부부, 코델 헐 국무장관과 같은 고위층에게 청원서를 보내고, 국무부와 국방부의 실무자들을 만났다.
그러나 이승만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 미국 루즈벨트 행정부의 대외정책은 국무부 안의 알저 히스와 같은 친소적이고 친공적인 실무자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좌파 성향의 국무부 전문가들은 국제 문제를 좌우합작 노선에 따라 소련과 협의해 처리한다는 내부 방침을 세워 놓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이승만과 같은 반공주의자를 싫어하였다.
해양문명의 실험과 그 성과
그 때문에 이승만은 좌파 성향의 미국 민주당 행정부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1945년 8월에 일본이 항복했는 데도, 이승만은 미국 정부의 비협조로 두 달이 지난 다음에야 개인 자격으로 간신히 귀국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지 장군의 미군정이 내세운 좌우합작 노선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따돌림까지 당하였다.
그러나 뒤늦게나마 소련의 팽창주의 야심을 알게 된 트루먼 행정부가 공산주의와 소련에 대한 강경책으로 돌아 섬에 따라, 이승만은 기회를 맞게 되었다. 1948년에 이승만은 73세의 나이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그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12년 가까이 통치하는 동안 좌익의 반란, 6.25전쟁 등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신생국 대한민국을 살아 남게 하였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젊었을 때부터 이상으로 생각해 왔던 미국의 공화제와 ‘미국적 생활방식’을 한 반도 남쪽에 이식시킴으로써, 대한민국을 미국의 해양문명권에 들어 가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통치기간은 남한 지역의 ‘문명사적 전환’을 시도하는 실험기이기도 하였다. 한 가지 본보기로 그는 미국식의 자유민주주의 정치제도를 도입하였다. 물론 그 새로운 제도는 한국 땅에는 낯 설고 서툰 것이었다. 그 결과로 그것의 초기 정착 단계에서 ‘부산 정치 파동’, ‘사사오입 개헌’, ‘보안법 파동’, ‘3.15부정 선거’와 같은 불상사도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직선제, 선거, 헌법, 언론자유의 기본 틀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 씨앗은 살아 남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발전과 성숙의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이승만이 새로운 ‘해양문명’을 이 땅에 이식시키려는 ‘문명사적 전환’을 시도했다는 또 다른 좋은 본보기가 기독교 중시 정책이었다. 그는 통치기간에 모두 135명의 장관과 장관급 부서장을 임명하였는 데, 그 가운데서 기독교인은 절반에 가까운 47.7 퍼센트였다. 그리고 군대와 감옥에 기독교를 보급하기 위해 군목제도와 형목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는 ‘기독교적 생활방식’의 도입이 곧 ‘미국적 생활방식’의 도입을 의미하며, 그것이 대한민국을 ‘해양문명권’에 들어 가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문명사적 전환’ 의지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은 무어니 무어니 해도 1953년의 한미동맹, 즉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이었다. 그것은 또 다시 있을지 모르는 북한과 중국으로 부터의 침략에 대비해 미군을 한 반도 내부와 그 주변에 주둔케함으로써 대한민국을 미국의 ‘해양문명권’에 붙들어 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한 반도의 반쪽이 중국과의 전통적인 동맹관계를 끊고 새로운 동맹을 찾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 새로운 동맹의 튼튼한 방호벽 밑에서 대한민국은 놀라운 경제성장도 이룩하고 자유민주주의도 정착시킬 수 있었다.
그러한 획기적인 ‘문명사적 전환’의 결실은 이미 이승만의 통치기간에도 확인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교육 중시 정책은 의무교육과 성인교육을 통해 국민의 80 퍼센트를 넘던 문맹자를 20 퍼센트 이내로 줄임으로써 나중에 산업의 역군이 될 귀중한 인력을 키워 놓았다. 그리고 미국 유학을 부추김으로써 나중에 국가발전을 위한 엘리트로 봉사할 인재를 많이 양성하였다.
‘문명사적 전환’의 초기 단계에서 대한민국은 미국으로부터 그 국민을 먹여 살리는 데 도움이 될 경제원조를 받았다. 미국 원조액은, 1957년의 경우를 보면 한국 정부 예산의 53 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큰 것이었다. 그 때문에 6.25전쟁에 의한 파괴에도 불구하고, 남한 지역의 1인당 국민생산은 1945년의 30 달러 정도에서 이승만의 마지막 통치년인 1959년의 85 달러로 늘었다. 그것은 해방된지 겨우 50년만인 1995년에 1만 달러를 넘는 ‘놀라운 경제발전’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이 문명개화파로서의 이승만이 시도했던 ‘문명사적 전환’의 결과였다. 그러므로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대한민국이 중국의 대륙문명권에서 미국의 해양문명권으로 그 소속을 옮긴 사실이 잘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잘못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에 대해 분명히 대답을 한 다음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한 전환이 잘못이었다면 이승만은 역사의 죄인이다. 그러나 그것이 잘된 것이었다면 이승만은 역사의 영웅인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대한민국 국민의 대다수는 ‘문명사적 전환’이 잘 된 것이라고 대답할 것으로 믿는다
'━━ 보관 자료 ━━ > 추천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족집게' 이승만… 일본의 美 침략·패망 모두 예견 (0) | 2020.04.15 |
---|---|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은 왜 해양대통령이 되었나? (0) | 2020.04.15 |
스탈린과 공산당을 조롱한 李承晩의 대연설 (0) | 2020.04.15 |
평화선 '선포한 우남의 선견지명 (0) | 2020.04.15 |
“적화통일 막은 이승만, 좌파가 철저히 말살했다" (0) | 2020.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