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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기독교백년사 - 제2장 선교 개탁자(開拓者)들의 한국인 接近

Joyfule 2006. 12. 19. 01:35


제2장 선교 개탁자(開拓者)들의 한국인 接近 
1. 꾸쯔라프목사의 서해안 전도
한국을 최초로 방문한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는 칼.꾸쯔라프(Karl F.A.Guzl-aff)목사이었다. 그는 1827년 네덜란드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쟈바(Java)와 스마트라(Smartra)섬을 위한 선교사로 부임하였다. 
그후에 그는 타일랜드(Thailand)로 갔다가 1831년 마카오로 선교지를 옮겨 자신의 소원인 중국인 상대로의 선교를 본격적으로 진행하였다. 
꾸쯔라프 목사는 배를 타고 해안을 순회하는 선교여행을 좋아하였다. 그는 1831년에 중국 동해안 전역을 항행하면서 복음의 씨를 뿌린 일이 있었거니와 1832년에는 그 방향을 한국 서해안으로 돌려 7월 17일에 황해도 백령도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남하하여 21일에는 군산만에 도달하였다. 그는 배가 군산만 북편의 창선도에 정박하자 곧 상륙하여 무릎꿇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이리하여 로마 카톨릭교회의 선교사인 모방(Piere Philibert Maubant,)신부보다 4년 앞서 꾸쯔라프 목사는 한국에 들어왔다. 배는 25일에는 홍주 고대도 안항으로 항행하였다. 
꾸쯔라프 목사는 처음 만나는 한국인들에게 의약품을 나눠주고 병을 고쳐줌으로써 전도에 착수하였고,또한 홍주목사 이민회와 수군우후,김영수를 통하여 국왕 순조에게 성경과 교리서를 헌상하였다. 
꾸쯔라프 목사는 홍주목사의 서생으로 있은 양씨(Yang Chich)의 도움을 얻어 주기도문을 우리 말로 번역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는 한글 성경 번역의 최초의 사실로서 실로 한국 성서 번역사 상 특필할만한 가치가 있다. 꾸쯔라프 목사는 주민들에게 감자 종자를 주고 그 재배됨을 가르쳐 줌으로 호감을 샀거니와, 복음 전달하는 사명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꾸쯔라프 목사는 귀로에 올라 한국 땅이 안계에서 사라질 그때까지,'예수 기독교'라고 쓴 깃발이 휘날리는 로드 암헐스트(Lord Amherst)호의 돛대 아래 갑판 위에 꿇어 앉아 하나님께 기도를 계속하였다. 
"나의 전한 복음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반드시 열매 맺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나는 이것을 믿었는 고로 영광에 찬 십자가의 도를 한국인에게 전달하였습니다. 한국 국왕이 성경을 받아보게 될런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 주민들은 이미 성경을 받고 있으니 저들을 통하여 복음이 한국 온 땅에 펴짐으로 광명의 아침이 찾아 오도록 하나님이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할 따름입니다." 
꾸쯔라프 목사의 한국 방문은 극히 짧은 기간이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성과를 얻기란 매우 어려웠던 것이고,그의 한국 선교를 위한 개척적인 열의에 만강의 찬사를 아낌없이 보내어 마땅하다 하겠다. 
2. 토마스목사의 대동강 순교
꾸쯔라프 목사가 최후의 기도를 남기고 한국을 다녀간지 33년이 지나 다른 한 프로테스탄트 선교사가 한국 땅에 와서 순교의 피를 흘림으로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새로운 기초를 설정하였다. 그는 1866년 평양을 방문하였다가 대동강 상에서 자기의 목을 칼로 치는 한국인 병사에게 성경 책을 주면서 목숨을 바친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순교자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목사이다. 
그는 영국 런던선교의 파송으로 1863년 중국 상하이에 부임하였다가 1865년부터는 산뚱성 치푸로 자리를 옮겨 자급전도를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우연히 만난 한국인 천주교 신자 김자평과 최선일과의 대화는 토마스 목사로 하여금 새로운 열의를 일으켜 주었고 한국 선교를 결행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866년 6월,토마스 목사는 미국의 상선'제너럴 셔면'(General Sherman)호가 한국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배에 타고 동행하기를 간청하였다. 제너럴 셔면 호의 방한은 목적은 서울에 들어가서 국왕을 만나뵙고 통상의 허락을 얻으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지리에 서투른 선원들은 대동강을 한강으로 오인하여 내륙으로 소상하다가,불행하게도 군사들의 화공을 만나 대동강 위에서 불타기 시작하였다. 선원들은 저마다 목숨을 구하려고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러나 토마스 목사는 혼자 배 안에 남아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오,하나님이시여! 아직까지 복음을 듣지못한 저 불쌍한 백성들에게 은헤를 내려 주시옵소서" 
그 다음,그는 아주 침착한 태도로 큰 상자를 갑판 위로 끌어 올렸다. 그 속에는 한국인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가지고 온 성경책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성경책을 불에 타지않게 갑판 위로 끌어올려 가지고 한권 한권 언덕을 향하여 힘껏 내던졌다. "복음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는 애타는 마음에서 그는 던지고 또 던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책은 언덕에까지 닿지 못하고 물속에 떨어졌다. 이제 불길은 배를 완전히 에워쌌다. 토마스 목사의 옷에도 불이 붙고 그의 머리칼도 타기 시작했다. 견디다 못한 토마스 목사는 물 속으로 넘어져 떨어졌다. 견디다 못한 토마스 목사는 물 속으로 넘어져 떨어졌다. 그는 헤엄쳐 언덕에 기어 올랐으나 군중들에게 체포되어 평양감사 박규수앞에 끌려 갔다가 다시 대동강 하류에 있는 양각도로 호송되어 참수 되었다. 
이때에 칼을 들어 토마스 목사의 목을 친 박춘권은 후일 회개하여 1899년 세례를 받으므로 평양에서의 초대 교인이 되었다. 평양은 그 뒤에 한국의 예루살렘이 되었고 전국교회의 중심이 되었다. 토마스 목사의 순교의 피가 흐른 대동강 수를 마시는 많은 사람들이 그후 오래지 아니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결코 우연만이 아닌 것이다. 
3. 로쓰.매킨타이어 목사의 고려문(高麗門) 전도
중국 만주의 우장과 봉천 등지는 한국교회 수립을 위한 최초 기지가 되었다. 우장은 한국교회 최초의 신자를 낳은 곳이요 최초의 한글성경을 번역한 곳이며, 봉천은 최초의 한글 성경을 출판한 곳이며 한국인 전도자를 선택하여 파송한 곳이다. 
이곳에는 스코틀랜드 일치자유교회(United Free Church of Scotland)의 죤 로쓰(John Ross,)목사와 죤 매킨타이어(J.McIntyre)목사가 1872년 이래 주재하여 선교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들이 만주 선교를 희망한 이유 중의 하나가 같은 영국인으로서 한국 선교를 하다가 순교한 토마스 목사의 유지를 계승하기 위함이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로쓰 목사가 한국에 가까운 우장과 봉천을 택한 이유가 바로 그러한 데 있었다. 그의 선교 계획은 병인양요 이후로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강화되어 한국 입국이란 도저히 불가능함을 알았는 고로 우선 만주 땅에 있는 한국인을 만나 그들을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국내 전도에 종사케 하여 선교의 성과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1873년 가을에 로쓰목사는 만주 일대를 순회하는 전도여행을 떠났다. 그는 우장을 출발하여 봉천,흥경을 지나 압록강 상류 임강에까지 이르렀을 때 한국인들이 거주하는 한 마을에 들어갔다. 그곳은 바로 고구려의 고도인 즙안현의 이양자이었으며 약 3천호에 달하는 한국인 가구가 주거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한국인들을 반가히 만났으며, 한국 입국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한국 입국을 위한 길 안내를 수락치 않는 것을 보아 기독교를 금하는 국법의 준엄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으로 로쓰 목사에 대하여 국가의 기밀을 살피러 온 정탐군으로 의심하기까지 하였다. 로쓰 목사는 이곳에서 압록강 건너의 한국 강산을 바라다 보는것 뿐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던 로쓰 목사가 귀로에 고려문(Korean-Gate 에 들렸을 때 더 많은 한국인을 만나게 되자 한없는 기쁨을 느끼면서 꼭 한국 선교는 하고야 말겠다고 다시 한번 결심을 다짐하였다. 
고려문은 책문이라고도 하며 국경 도시인 의주로부터 약 120리 지점에 위치하며, 말하자면 한국인이 중국에 들어가는 관문과 같았다. 이곳에서는 봄과 가을 두 절기에 걸쳐서 정기적으로 교역 시장이 열리면서 많은 한국인들이 모여들곤 하였다. 
다음해, 봄에 로쓰 목사는 중국인 서기를 동반하고 한국인 전도를 목적하여 고려문에 도달하였다. 그의 느낌은 한국인들은 국법이 금하는 어려운 사정으로 인하여 사람의 눈에 뜨이는 곳에서는 서양인을 피한다는 사정이었다. 로쓰 목사는 중국인 서기를 시켜서 자기들이 유숙하고 있는 주막집으로 한국인들을 데려 오도록 일을 진행시켰다. 중국인 서기는 여러날 동안 시장에 나가 한국인을 데려 오려고 힘써 보았으나 대부분이 사람이 응하지 아니하여 헛 수고를 되풀이 하였다. 
그러던 중, 드디어 한국인 청년 몇 사람을 포착할 기회가 도달하였다. 그들은 평안북도 의주 사람으로 상사를 핑계하여 선진 과학을 배우려고 청운의 뜻을 품고 이역을 헤매고 있었다. 그들은 서양인을 만나고 싶은 호기심이 가득차 있으면서도 국금을 어기는 두려움 때문에 쉽게 만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중국인 서기의 뒤를 따라 로쓰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로쓰 목사는 열심히 저들을 설득하였다. 한국 말과 한국 역사를 가르쳐 주면 그 대가로 청년들에게 후한 월급을 주고 또 서양 과학을 가르쳐 주겠다고 그는 제의하였다. 
마침내, 한국인 네 청년은 로쓰 목사를 따라 우장으로 갔다. 로쓰 목사와 매킨타이어 목사는 한국인을 동행한 그 기쁨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러나 두 목사는 서두르지 않고 반드시 생명의 말씀이 뿌리 박힌 날이 이를 것을 기대하면서 꾸준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음 밭을 경작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