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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기독교백년사 - 제3장 한국 기독교인의 발생과 예배집회

Joyfule 2006. 12. 20. 01:14

한국민족기독교백년사 - 제3장 한국 기독교인의 발생과 예배집회 1.백홍준,서상륜의 수세(受洗)와 전도활동 로쓰 목사를 따라 우장으로 간 한국 청년들은 백홍준,이응찬,이성하,김진기의 네사람이었다.24)네 청년은 각각 로쓰 목사와 매킨타이어 목사,또 그곳에 있는 세관장과 병원장의 어학 선생이 되었으며 성심껏 일하면서 또 신문화를 배웠다. 그러면서도 이 네 청년은 예수를 믿는 문제에 대하여는 매우 완강하였다. 이유는 그들이 이후에 고국에 돌아가드라도 기독교 신자만 되지 아니하였으면 사형은 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편,로쓰 목사와 매킨타이어 목사는 열심히 한국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였다. 1874년에는 '한영 회화'(A Korean English Primer)를 발간하였고 1879년에는 '한국지''그 역사.생활.습관'(Korea,It's History,Manners and Customs)를 간행하였으며 1875년에는 '예수성교문답','예수성교요령'의 두 책을 한글로 편찬하였다. 이는 참으로 그들의 한국 선교의 문호를 열기위한 노력이 얼마나 진지하였음을 알게 하고도 남는다. 백홍준을 비롯한 네 청년은 우장으로 들어간지 3년째인 1876년에 굳게 닫혔던 마음 문을 열고 드디어 세례를 받았다.25) 그들이야말로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가 도니 것이다.26) 신자가 된 네 청년은 곧 그때부터 로쓰 목사를 도와 한글 성서를 번역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이들의 번역사업은 꾸준히 계속되어 1879년에 먼저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을 번역하였고 1880년에는 4복음과 사도행전을 완역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다른 한 의주 청년 서상륜이 우장으로 찾아와 성경번역 사업에 가담하였으며,그는 출판을 위한 목활자를 파는 일에 힘을 더 기울였다. 서간도에 살고 있은 김청송이가 인쇄 작업에 경험이 있다 하여 그를 식자공으로 채용하였는데 그는 뒤에 로쓰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1882년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간행되었고 1884년에는 마가 복음과 마태복음이,1887년에 가서는 완전한 신약의 전부가 '예수셩교전서'란 이름으로 출판되어 그 기쁨이야말로 하늘에 닿은 듯 하였다.27) 이제는 로쓰 목사가 뜻한 바 간접 선교의 방식으로 처음 믿기 시작한 한국인들에게 성경 책을 주어 국내에 들어가 선교케 하여야 했다. 1883년 이성하가 성경을 등에 지고 봉천을 떠났다. 그는 압록강 건너편까지 이르렀으나 성경 책을 그대로 가지고 무사히 들어설 것 같지 아니하여 잠시 밖으로 나가 주위의 사정을 살피기 시작하였다. 이성하의 거동을 수항히 여긴 주막집 주인이 방안에 놓아 둔 짐짝을 풀어보니 그 소에 국금의 책이 있어 너무나 겁에 질린 집 주인은 일부는 불에 태워 없이하고 나머지는 전부 압록강 물에 내던지었다. 뒤에 이 소식을 들은 로쓰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던져진 그 강물을 마시는 한국 사람들은 생명수를 얻게 될 것이고, 불에 탄 성경은 한국교회를 자락데 하는 거름이 될 것이다" 라고 예언하였다. 뒤를 이어 백홍준이 다시 성경 책을 등에 지고 우장을 출발하였다. 그는 10일 만에 의주 거넌편에 있는 씨하지라는 마을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사정을 살펴 보는대로 역시 성경책을 그냥 가지고 들어가기란 매우 어려움을알았다. 백홍준은 가지고 온 책을 한장씩 한장씩 종이로 풀었고, 그 종이를 말아가지고 노끈을 꼬았다. 다음은 낡은 종이를 많이 사다가 그 속에 책을 감추고 끈으로 묶어 마치 종이를 사오는 것처럼 가장하여 국경을 넘었다. 집에 도착한 그는 성경으로 된 노끈을 종이로 펼쳐 다시 책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 책을 가지고 의주를 중심하여 위원과 강계 등지를 다니면서 전도하였다. 반년도 못되어 10여명의 신자가 생겨,이들은 주일마다 백홍준의 집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말하자면 이것이 곧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이다. 물론 이는 정식의 교회라기보다 일종의 기도처소이었다. 최초 프로테스탄트의 한 사람인 서상륜은 입국할 때 고려문에서 한국 관리에게 체포되었다. 다행하게도 그곳에는 그의 친척되는 김효순과 김천련의 두 사람이 심부름꾼으로 있었다. 그래서 겨우 그들에게 구출되어 그날 밤으로 국경을 넘어섰다. 서상륜도 고향인 의주를 중심하여 열심으로 전도한 결과 그의 가족을 비롯하여 10여명의 친지들이 신자가 되었다. 그의 전도한다는 소문은 점차로 퍼지어 관가에까지 알려졌다. 신변의 위험을 느낀 서상륜과 동생 경조는 삼촌이 살고 있는 황해도 솔내로 비밀리에 몸을 피해갔다. 그러나 두 형제는 이곳에서 더욱 쉬지 않고 열심히 전도하였다. 얼마 안가서 솔내 마을 58세대 가운데 50세대를 믿게 할 정도로 전도는 크게 성공하였다.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마을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전도에 나섰으며,1885년에는 순전히 자기들의 힘으로 여덜칸되는 한국의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이곳이야 말로,한국 프로테스탄의 요람지'(Cradle of Protestant Christianity in Korea)로서 영원히 기념할만한 고장이며 또한 한국교회의 발상지로서 세계교회의 이목을 크게 집중시켰다. 최초의 미국인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가 한국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어 이곳을 찾아와 세례를 베풀게 되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미 신자가 되어있는 사람들의 신앙심을 확인한 것 뿐으로,한국인에 의하여 이루어진 교회에 와서 공식적인 의식을 집행한 데 불과하였다. 이와 같이 선교사가 피선교지에 입국하기에 앞서 그 나라 사람들이 국외에 나아가 먼저 신앙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이 국내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이룩한 사실은 너무나 기특한 내용이다. 또한 성경이 이미 피선교지의 나라 말로 번역되어 선교사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 같은 것은 세계기독교 역사에 유례가 드문 일로서 우리 민족이 그 얼마나 복음을 접수하기에 열중하였는가를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는 한국교회 역사상 영원히 남길만한 가치있는 내용 중의 뚜렷한 것으로 크게 자랑할만 하다. 2. 이수정의 개정과 기독교 사업 하나님께서 한국에 복음의 문을 여시기 위하여 북쪽 중국에서만 준비하신 것이 아니라 동쪽 일본에서도 역사하신 것은 실로 오묘하기 그지없다. 1882년 한국 정부의 고관인 이수정이가 일본에 건너가게 되었다. 그는 곧 개화 일본을 위한 선각자요 교계의 인물로 유명한 쯔다박사를 만날 기회를 가졌다. 이수정이가 쯔다 박사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에 벽에 걸린 마태복음 5장의 산상보훈을 기록한 족자를 읽고 큰 감동을 받게 되었음은 그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쯔다 박사는 이수정을 야스가와 목사에게 소개하였고 믿음이 자란 그는 1883년 4월 29일 자진하여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 소식을 듣고 가장 기뻐한 사람은 일본 주재 성서공회 총무인 헬리 루미스(Henry Loomis)목사였다. 루미스 목사는 곧 이수정을 찾아가 성경을 한글로 번역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리하여 1883년 4복음과 사도행전의 번역이 나왔고 다음 해에는 마가복음을 출간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수정은 그때 일본에 와 있는 미국 장로회 선교사 녹스(George W.Knox)목사와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매클레이(Robert S.Maclay)목사와 친숙해져 그들을 통하여 한국에도 조속히 선교가 시작되야 한다고 미국 교회에 호소하였다. 한국 주재 최초의 목사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셀라의 두 사람은 한국으로 오는 도상에,일본 도오꾜에 들렸을 때 마침 이수정이가 역간한 한국어 성경을 보고 말할 수 없이 큰 감며에 휩싸이었다. 선교사들이 새로이 개척되는 선교지에 들어가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또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닌 것인데, 한국인에게는 그 나라 말로 성경이 번역되어 있었으며 오히려 선교사를 기다리고 있는 사정이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 아니었으랴! 그런고로 우리 땅에서는 복음의 씨가 속히 자라 열매를 거두기가 아주 손쉬었다. 두 사람의 미국인 선교사들은 희망이 넘치고 기쁨이 가득찬 가슴에 한국말 성경을 부등켜 안고 힘찬 발걸음으로 이 나라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