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성을 위한 ━━/역사와인물

한국민족기독교백년사 - 한국 민족기독교의 출발

Joyfule 2006. 12. 18. 01:06

한국민족기독교백년사 - 한국 민족기독교의 출발 제1장 유럽 기독교인의 전래 1.벨트브레와 하멜 일행의 표착(漂着) 한국인이 프레테스탄트와 최초로 접촉하기는 1627년 네덜란드 사람인 벨트브레(Jan Janse Weltevree,朴) 일행 세 사람이 한국 동해안에 상륙한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당시 한국의 사정은 서양인과 교제가 일체 두절되어 있어,그러한 시기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경주앞 바다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신기하기만 하였다. 그 세사람은 벨트브레 외에 디렉 게이스베르즈(Direk Geijsbertz)와 얀 피이터(Jean Pieterz)이었다. 벨트브레1)는 1626년 동양에서의 무역을 위해 배를 타고 본국을 출발하였고 그 이듬해에 일본을 향해 항해하는 도중 난파하여 경주 앞 바다에 표착한 것이다. 그들은 선내에 결핍한 음료수를 얻기 위하여 한국 땅에 상륙하였다가,일단 나라 안에 발을 들여 놓으면 좀처럼 돌려 보내주지 않는 당시의 법속으로 인하여 억류되었다.2) 동료 두사람은 1636년 병자호란에 출전하였다가 전사하였고 벨트브레 혼자만 살아 남았다.그에게는 전공에 의하여 신안이식지하는 생활에 여자를 취하게 하는 행상이 따르게 되었으며, 구인후 대장 휘하에서 한왜군의 통솔자가3) 되는 출세를 하였다.그 자손들에게도 훈련도감에 편속되는 특전이 부여되어 군인일가를 이루었다. 벨트브레가 기독교 신자인지 여부에 관하여는 한국 문헌에도 몇가지의 기사가 있다. 즉 그는 탁월한 인격의 소유자인 동시에 생각이 깊고 교양을 갖춘 인물4)이라 하였고 생사화복과 천보의 이치5)를 설하였으며 또한 가히 그의 말이나 행위가 도를 가진 사람에 유하다6)는 표현으로 그의 신앙심을 표시하였다. 하물며 그의 국적이 당시 프로테스탄트 국가로서 흥융 도상에 있는 네덜란드인 임을 감안할 때 벨트브레의 기독교인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분명하다. 물론 벨트브레의 신분은 상인이었고 선교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신앙인으로서의 언어와 행동으로 기독교적 감화를 끼쳤음은 존경과 추대를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1627년 한국에 상륙한 벨트브레가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였음이 틀림없다고 한다면, 이는 한국교회사 상에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음에 상당한 주목을 기울여야 한다. 벨트브레의 표도 이후 26년이 지난 1653년 제주도에 표착한 네덜란드인들이 또 있었다. 그들 하멜(Hendrick Hamel,)일행도 역시 프로테스탄트이었다. 이들도 극동 교역의 임무를 띠고 일본으로 가는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8월 15일 제주도 화순포 앞 바다에서 파선되어 일행 64명 중 많은 사람이 익사하고 36명만이 살아남았다. 그들은 한국 땅에서 억류생활 14년이 지나 그 중 15인이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멜 일행도 벨트브레와 같은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네덜란드의 국민이었으므로 프로테스탄트라고 하는데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들의 신앙에 관하여는 당시의 한국의 문헌과 일본 문헌과 그리고 하멜이 직접 손 그의 표류기8)속에 많이 나타나 있다.한국인 관리가 그들을 향하여 "기독교인(Christian)이냐"고 물으니 모두가"야야(耶耶)하면서 시인하였다는 내용이 있다.9) 일본 문헌에는 대마도주의 글에서 한국에 구류되어 있다가 일본으로 도망 온 네덜란드인들이 모두 기독교인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언급하였다.10) 하멜표류기에는 하멜 자신이 기독교 신자임을 글의 내용 여러 곳에서 선언하고 있다. 11) 그는 난파에서부터 일본으로 도망하여 귀국할때까지,14년 동안 어려움과 기쁨을 당할 때마다 시종일관 하나님께 간구와 감사를 아울러 드려,훌륭한 신앙의 소유자였음을 여실히 표현하고 있다. 특히 하멜 일행이 소선에 몸을 싣고 한국 해안을 탈출하면서 "온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전부를 의탁하였다"는 귀절에 이르러는 감격어린 바도 없지 않아 있다.12) 실로 그들의 생활이야말로 하나님을 완전히 믿었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기도로 생활했다고 해서 결코 잘못이 아니다. 1832년 네덜란드 선교회 파송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 꾸쯔라프가 한국 서해안을 방문하였다. 그의 내한 동기가 하멜표류기로부터 영향받은 것이 전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이 하멜표류기는 한국 사회의 제반 사정과 생활의 면모를 최초로 유럽인에게 소개하였다는 점에서 한동안 유럽의 독서계를 풍미하였다. 꾸쯔라프 목사가 한국에 내항하기에 앞서 하멜표류기와 접촉한 일이 있었다고 한단면, 그러한 점에서 그의 교회사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가해져야 할 것으로 안다. (* 주 = 벨트브레가 표류한지 이십몇년이 지나 1653년에 하멜 일행이 본국을 떠나 일본으로 오다가 또 표류해 제주도로 오게 되었다. 일행 64명중 36명만이 살아 남 았고 제주도에서 14년간 억류되 살다가 15명이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 하멜의 기사에서 보면 그들이 프로테스탄트 였음을 알수있다. 라고 기술되어 있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기술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멜을 포함한 36명은 제주에 표착한 후 그 다음해에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서울에서 잠시 머무른후 다시 전라도 지역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리고 탈출한자는 일행중 하멜을 포함한 8명이며, 이 8명의 탈출후, 일본이 네덜란드인의 조선표착을 알게 되어 잔류 네덜란드인의 송환을 요구한 후, 나머지 생존자 7명도 일본으로 송환되었던 것입니다. 하멜의 기사에는 이 내용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하멜일행, 즉 네덜란드와 조선과의 관계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의 조선에 대한 야소종문금제의 요구도 관심을 가지고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만,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인가요? 참고로 저의 홈페이지에는 이와 관련된 논문과 사료, 선행연구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소개하고 있는데 참고로 방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본 내용은 1998.10.15 신동규님이 알려주신 내용입니다. 좀더 자세한 사항을 알고싶은 분은 http://my.netian.com/~cyindong/shin.html http://cyin.cjb.net/ E-Mail : shindong@rikkyo.ac.jp 2.바실 홀과 맥스웰의 來航 1816년,영국 정부가 중국에 파견하는 암헐스트(J.William Amherst)사절을 태운 알세스트(Alcest)호와 리라(Lyra)호의 함장은 맥스웰(Murry Maxwell)과 바실 홀(Basil Hall)의 두 해군대령이었다. 이들은 중국에 도착하여 사절단을 내리우고 광뚱에 정박하고 있는 기간에,본국 정보로부터 한국 서해안 일대를 탐사하라는 훈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두 함장은 각기 자기의 군함을 통솔하여 1816년 9월에 한국에 내항하여 서해안 일대를 시찰하고 해도를 작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특히 비인만 마량진 앞 갈곳에 들렸을 때에,문정을 위한 임무를 띠고서 접촉한 첨사 조대복에게 성경을 전달하였다. 바실 훌은 본국에 귀환하여 1818년 '한국 서해안 항해기'(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and the Great Loochoo Island)를 출간하였으며 그 내용에서 첨사에게 전달한 책은 킹 제임스(King James)역본의 대형의 성경(The Holy Bible)이었다고 언급하였다. " 첨사에 맥스웰 함장이 주는 성경을 정중히 받아가지고 마치 공식 문서를 다루는 모양으로 신중히 해안으로 옮겼다."13) 물론 그것이 성경 인줄은 알지 못하고 받았을 것이다. 이 성경은 외인에게서 받았다는 중대성에 비추어 곧 조정에 상송되었으며 그리고 관부혹은 규장각에 보관되었을 것이다. 이는 실로 한국에 성경이 전달된 최초의 사실로서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나 일반 문화사에 있어서도 특필해야할 중대한 사건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