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의 비폭력철학
김성수 선생(「함석헌 평전」저자)
예수 : “칼을 쓰는 사람은 다 칼로 망한다.” 「마태」 26:52
함석헌이 간디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존경한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의 비폭력저항 운동 때문이었던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일이다. 그의 사상에 제도를 거부하는 경향과 무정부주의 적인 면이 많았음에도 그가 무정부주의자가 되지 않은 것은,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폭력이나 테러도 불사하겠다는 과격파 무정부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혁명적이었지만 혁명은 안 했다" 라고 함석헌은 표현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은 그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혁명적 생각을 혁명적 현실로 실현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잘 짜여진 조직력과 명령체계다.
함석헌은 남에게 "이것을 하시오"라고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사상적 게릴라전"은 벌였지만 체 게바라나 호지민 처럼 "유혈 게릴라전" 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퀘이커 평화사상과 간디 비폭력사상에 매료되었지만 비폭력을 할 용기가 없다면 차라리 칼을 들라고 했다. 그 말은 비폭력이 그저 가만히 있는 비겁자의 길이 아니라 "원수도 사랑하는" 그래서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는" 길의 의미로 해석 될 수 있을 것이다. 비폭력을 실천하기 위해선 더 큰 용기가 필요하고 고도의 자기 조절, 억제 능력이 필요하다. 함석헌의 취미중의 하나가 난초 가꾸기였는데 아마도 그것은 그가 비폭력을 그대로 "사는" 난초에 매료되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과 1943년에 걸쳐 일제의 한국민족 탄압정책은 점점 가혹해져 갔다. 이때 함석헌은 무력을 바탕으로 한 제국주의는 국제관계의 ‘약육강식’ 논리를 정당화 해주며 세계를 국가주의로 몰아간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국가주의의 의미를 정의해보면 다음과 같다: 현대 국가는 본질적으로 강한 군사력 위주의 전투적인 국가이다.
경제적 의미에서 이건 군사적 의미에서 이건 각 국가는 서로 긴장 대치 되어있다. 이 긴장 대치 상황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현대 국가는 끊임없이 거대하고 강력한 국가체계를 추구하고 있다.1) 결정적으로, 강한 국가주의의 사회에서는 전체 민족과 국가가 철저한 중앙정부의 통제하에 놓이게 된다. 이런 면에서, 국가주의의 근본은 이타주의라기보다는 강한 집단이기주의를 그 근본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집단이기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국가주의에 대해 함석헌은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국가주의는 또한 그 체제의 유지를 위해 폭력의 사용을 필수적 요소로 하기 대문에, 함석헌의 근본사상인 비폭력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었다. 이런 면에서 함석헌은 국가주의를 반대했고 노장의 초월주의를 좋아했다. 그는 민족과 국가간의 평화는 하느님과 역사의 ‘절대명령’ 이라고 믿었다: “평화는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말 문제가 아니다. 가능해도 가고 불가능해도 가야 하는 길이다. 이것은 역사의 절대명령이다. 평화 아니면 생명의 멸망이 있을 뿐이다.”2)
이러한 평화에 대한 애착 때문에 함석헌은 노자의 평화사상에 매료되었고, 급기야는 노자를 최초의 평화주의자라고 선포했다: “노자는 전쟁의 무익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폭력이 국가의 정책으로 쓰여서는 안되고, 국가간에 평화적인 해결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노자의 평화적인 태도는 ꡔ도덕경ꡕ을 통해 많이 나타나는데 그 중에 한 예를 살펴보자:
“큰 나라는 겸손함으로써 세계를 통일 할 수 있다. 큰 나라는 겸손함으로써 작은 나라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작은 나라는 겸손함으로써 큰 나라의 좋은 영향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럼으로써 큰 나라와 작은 나라는 서로가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큰 나라가 먼저 겸손해야 한다.3) 최고의 성취는 성취욕구로부터 해방되는 것 그럼으로써 항상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것. 최저의 욕구는 성취욕구에 집착 해있는 것 그럼으로써 결코 성취감을 느낄 수 없는 것.”4)
함석헌은 서구 기독교나 제국주의에 무조건 대항한 전사(戰士)도 아니었고, 동아시아적인 것 혹은 한국적인 것만을 주장한 광신적 민족주의자도 아니었다. 함석헌은 제국주의국가들과 식민지 국가들 사이의 가치관적 충돌을 사상적으로 해소시키고자 했다. 함석헌이 노장사상에 매료 된 것은 그가 살아야 했던 제국주의 시대 아래서 국가간의 무력주의 만이 횡행하던 세상에서, 동아시아의 기독교인으로서 그의 사상적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였다. 동양사상과 서구이념의 융합은 그의 삶의 큰 과제 중에 하나였던 것 같다. 함석헌은 또한 그가 속했던 역사적 시대의 정치적 통제와 사회적 불의 그리고 구조적인 악에 대항해, 인간의 자유와 평화주의를 부르짖었다. 그는 노자와 장자가 주장한 가치들이 보다 나은 인류전체의 질적인 삶을 위해, 물질주의나 폭력주의를 앞세운 제국주의의 이념이 옹호한 가치들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간디는 정치적 문제를 종교적 방법을 동원해서 해결하려고 했는데, 함석헌은 이러한 간디의 방법을 또한 한국현실에 적용시키고자 하였다. 함석헌은 간디가 사회의 불의에 대해 비폭력을 통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저항했기에 그런 간디를 존경했다. 이런 맥락에서 1963년 독일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함석헌은 곧 안병무에게 이런 글을 쓴다: “일은 드디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나는 이제 결심했습니다. 극한 투쟁을 하기로. 비폭력의 국민운동을 일으켜 민정(民政)을 수립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나야 정치가는 아니지만 여론을 일으키도록 하렵니다. 지방순회도 생각하고....1963년 7월 24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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