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교회의 분열과 여성
1) 과정
6.25동란 중에 속개된 부산의 총회는 결국 총회 산하에 오직 하나의 직영 신학교인 "총회신학교"를 둔다고 가결함으로써 조선신학교의 합법성을 자연스럽게 부인해 버리고 말았다.32) 이에 김재준 목사를 지지하는 노회나 교히 등은 1953년 6월 10일, 7노회, 80명 대표가 서울 중구 동자동 한국신학대학 대강당에서 제38회 호헌총회로 모여, 대한예수교장로회 36,37,38회 총회에서 결의한 아래의 조항들을 불법 결의라고 비난하면서 취소결의를 하였다. 그들이 불법 결의라고 취소한 조항들은
1.제36회 총회결의-노회 수의도 없이 한국 신학대학 직용을 취소한 결의.
2.제37회 총회결의-김재준 목사(또 카나다 선교사 서고도-Scott목사)의 제명,교수 파면과 그들을 옹호 지지하는 이들과 한국신학대학 졸업자는 모조리 목사 파면을 시키고 안수도 못하게 하는 결의
3.제38회 총회결의-이상의 36,37회의 불법 결의를 시정하려고 모인 호헌대회 참석자와 불법결의를 반대하는 노회에 대하여 총대권을 박탈하는 결의33)
또 1954년 6월 10일에 모인 총회에서는 명칭을 "대한기독교장로회"로 변경하고 아래와 같은 결의를 담은 선언서를 발표했다.
1.온갖 형태의 바리새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은 복음의 자유를 확보한다.
2.전세계 장로교회 테두리 안에서 건전한 교리를 수립함과 동시에 신앙양심의 자유를 확보한다.
3.노예적인 의존사상을 배격하고 자립자주의 정신을 함양한다.
4.그러나 편협한 고립주의를 경계하고 전 세계 성도들과 협력 병진 하려는 세계교회 정신에 철저하려 한다.34)
즉 사도신경과 장로회의 공동신조의 준수와 국내의 장로교와의 협조를 천명하면서 새로운 교단으로 출발할 것을 선언했다.
이러한 분열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당시의 여성들은 주체적인 태도를 취할 수가 없었다. 주재숙 장로의 증언에 의하면 그 당시 여신도회 회원들은 왜 갈라졌는지도 몰랐고, 갈라지려 하지도 않았는데 남자들이 분쟁으로 갈라지고 나니 자연적으로 교회,집안,고향을 중심으로 해서 갈라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35)
1954년 한국신학대학교에서 김재준 목사를 지지하는 여성들이 따로 모임을 가지고 강정애 씨를 회장으로 뽑았다.
강정애 씨의 회고에 의하면 이때 자신은 "김재준 목사를 이렇게 나쁘게 만드는 교단에 있을 수가 없다고 교히에 반기를 들고 나왔고 그래서 기독교 장로회에 소속되었다." 고 한다. 그러나 그후 자신이 참석치 않은 가운데 서울 초오히에서 자신이 여전도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음을 알았으며 회장이 된 후 몇 달 후에 제2차 총회에 참석하고 회장으로 사회도 하였으나 다른 일이 많아서 별로 열심히 하지 못했다고 한다.36) 이렇게 분열 당시 여성들은 비주체적으로 임했으며 분열에 대한 자신들의 소신을 밝히는 공식적인 성명서 한장 없이,남자 목사,장로들이 갈라놓은 총회에 남편 따라,혹은 연고지 따라, 자기들이 나가는 교회의 목사 따라 갈리게 되었다. 그때까지 장로교 여전도회는 회원간에 신학적인 논쟁이나 정치적인 분열 같은 것이 없이 단합하여 잘하고 있었는데 단지 남자들이 총회를 둘로 가르니 그들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수동적인 자세였다.
이에 비해 1959년의 장로교 분열에 있어서 여성들은 비교적 주체적으로 대응하였다. 즉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용공적이라고 공격하는 일부 목사들이 한국교회의 보수와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한다는 기치 아래 WCC에서 탈퇴할 것을 주장해 왔다. 그러나 1959년의 제44회 대전총회에서 일이 여의치 않게 전개되자 그 파의 총대들을 서울로 상경시켜 11월 24일 승동교회에서 합동총회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이 총회는 당장에 WCC에서 영국 탈퇴하고 이와 관련된 어떠한 형태의 에큐메니칼 운동도 절대 반대하며 미국의 교회연합회아도 인연을 끊어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그러나 WCC의 노선을 지지하는 총대들은 통합총회를 1960년 2월 27일 서울 연동교회에서 개최하고 이 비극의 분열을 아물게 하고자 WCC에서 잠정적인 탈퇴까지 감행하면서 재일치를 모색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37)
이 사태에 직면하여 그 당시 예장 여전도의 전국연합회는 어디까지나 중립적 입장에서 화해의 작업을 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이 연합회는 한국 교회를 위해 처음부터 선교사를 파송하여 도와주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와 남장로교 선교부,그리고 호주선교부에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이름으로 호소문을 보내어 어느 편에고 치우치지 않고 화해의 역할을 맡아 줄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혹시라도 회원들이 분쟁에 말려 들 것을 염려하여 개교회마다 평화를 위한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게 하여 계속 기도할 것을 지시하는 공문과 호소문을 보냈다.
주로 신학교 문제와 WCC 가입건으로 결국 결렬된 통합운동은 NAE(Nation- 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는 합동으로 에큐메니칼은 통합이라는 이름으로써 분열된 원상태로 돌아갔다.
이러한 상황 중에도 여전도회 연합회는 다음 총회시까지 중립을 유지할 것을 제시하였지만 결국 어쩔 수 없이 분열해야 했다. 이에 여전도회는 서로의 협조로 극히 평화스러운 분위기에서 회록을 양보하고 눈물의 기도로 나뉘었다고 한다.38)
물론 감리교에도 분열의 역사는 있었다. 즉 해방 후 1946년 1월 이후로 부흥파와 재건파로 분열되어 교권투쟁을 계속하였느데 이 1차 분열은 1949년 3월에 가서 수습되었다. 그후 감리교는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유형기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여 교단 재정비 작업을 하였다.
그러다가 1955년 3월 대전총회에서 헌법을 개정하여 유 감독을 재선시켰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다음해에 일부 총회원들에 의한 이차 분열이 일어나게되었다. 개헌파와 개헌에 반대하는 호헌파로 분열된 감리교는 1958년 유 감독이 은퇴하면서 다시 통합되었다.
그러나 1970년 10월의 제11회 총회에서 제1차 투표에서 감독이 선출되자 교권에서 소외된 사라들이 따로 경기연회를 조직하여 분리함으로써 15년만에 제3차 교단분열이 다시 생기게 되고 4년 후인 1974년 10월의 제12차 총회에서 3차 분열은 수습되었으나 교단 내의 심각한 파벌에 반발하여 교회갱신을 부르짖는 인사들에 의한 제4차 분열인 갱신과 분열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4차 분열도 4년 후인 1978년 10월의 제13차 총회에서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감리교 분열은 다른 교단과 달리 4년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는 전통을 고수하는데 성공하였다."고 한다.39)
이런 분열이 계속되는 동안 특히 제 4차 분열 때는 분열된 파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여선교회는 끝내 하나로 남아 있기를 고수하여 성공하였다. 그 당시의 회장 김옥라씨는 "교단 지도자들이 하는 일이라고 무조건 다 따를 수는 없다. 여자들도 주체성을 가지고 결단하고 행동하여야 한다"고 필자에게 피력했다. 1953년에 예수교장로회와 기독교장로회가 갈라질 때 또 통합측과 합동측이 갈라질 때 여전도회는 아무런 이의도 없이 교단 지도자들의 결정에 순종한다는 자세로 여전도회를 나눈 태도와는 퍽 대조적이다. 이는 여성들의 주체성 회복이라는 점에서 교회 여성운동의 중요한 한 장을 차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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