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의예지 (仁義禮智) - 효의 근본정신
2. 효의 유래
일찍이 중국에서도 '효는 생활의 본질을 학습하는 교육의 바탕인 까닭에
실행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의 눌지왕은
‘나라가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만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불쌍한 백성들을 돌봐야겠다고 마음먹고,
해마다 전국 각지의 무의탁 노인들을 불러 모아 남당 뜰에서 거대한 양로연을 베풀고
왕도 친히 노인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를 하고 잔치가 끝날 무렵 노인들에게
곡물과 비단을 나이에 따라 분량을 달리하여 나누어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증보문헌비고’에 보면 신라 경덕왕은 효행이 두드러진 사람에게 조곡 3백 석을 내리고,
집과 전답을 하사하여 사회적으로 크게 표창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1),
고구려의 유리왕도 늙은 홀아비와 과부, 자식 없는 노인,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는 노인들에게 필요로 하는 물자를 내려 주었다.
또한 고려의 태조도 늙은 홀아비와 과부,
자식과 경제력이 없는 노인에게 의식을 지급하였다.
백제의 비류왕도 불우한 노인들을 도와주는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가족 제도는 중국의 가족 제도와 다르고,
전통적인 조상 숭배 신앙으로부터 발전한 가족 윤리가 존재했기 때문에
유교적 효 사상에 대한 지식이 곧 유교적 효 윤리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려시대까지의 가족 윤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불교였다.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은
고구려 여인인 어머니에 의하여 일찍이 출가하였다.
아직 고구려에 불교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당시에 신라로 넘어와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신라 불교의 터를 열어 놓았다.
그는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여
어려운 구도의 길을 수행했으니 진정한 효자라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효자에 의하여 비로소 신라에 불교가 전해졌으니
결국 신라의 불교는 효로써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2)
그 뒤 진평왕 대의 고승 원광은 평생을 지킬 가르침을 구하는
두 젊은이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주었다.
사군이충, 사친이효, 교우이신, 임전무퇴, 살생유택이 그것인데
여기서도 어버이에게 효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지극한 효성으로 다리 살을 베어서 노모를 봉양하였던 효자 신효거사가
그 어머니 사후에 출가하고 그 집을 ‘효가원’으로 삼았다.
진정법사의 어머니는 늙은 자신으로 인하여 아들이 출가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는
‘불법은 만나기 어려운데 인생은 너무나 빠르다.
내가 죽은 뒤에 출가하면 늦어지니 머뭇거리지 말고 가거라.
내가 너의 출가에 방해가 된다면 나는 필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네가 내 곁에서 아무리 잘 봉양한다 해도 어찌 그것을 효라고 하겠느냐.
네가 참으로 효도하려거든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떠나도록 하라.’ 라고 하여
아들을 재촉하여 끝내 수도의 길로 나서게 했다.
설총은 아버지 원효가 거주하던 절 곁에 살면서 가까이 모셨는데,
그 아버지가 입적하자 그 유골을 분황사에 모시고 정성을 다하였다.
그의 정성이 지극하였으므로 아버지의 상이 아들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고 한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