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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로 끝난 리승만 제거 음모

Joyfule 2020. 7. 2. 01:16




4 ·19로 끝난 리승만 제거 음모

 

 

박일영 ㅣ 자유기고가

 

1960년의 4월은 잔인하였다. 3 · 15 정 ˙ 부통령 부정 선거를 백지화하고 선거를 다시 하라는 학생들의 시위는 마침내 리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정권 타도의 투쟁으로 이어졌다. 남한의 여러 도시를 휩쓴 학생 시위의 열기는 요원의 불길처럼 동남아의 여러 나라로까지 번졌다.

 

서울에서 세계로 번진 스튜던트 파워

한국의 학생 시위가 기폭제가 되어 서쪽으로 옮아가는 가운데 터키의 멘데레스 정권이 무너지고 프랑스의 그 위세 당당한 드골 대통령도 손을 들었다. 일제 강점의 35년의 세월고 맞먹는 한 세대를 지낸 지금의 50대들은 그 회오리와 같았던 60년대를 되돌아 보면서 오늘의 젊은 세대를 생각할 것이다.

 

한 나라의 정권이 학생들의 시위로 쉽게 무릎을 끓은 선례를 남기 사실을 회고하며 오늘의 학생 시위를 생각할 것이다. "부정과 부패를 좌시하고 일어설 줄 모르는 학생이 있다면 그 나라의 장래는 희망이 없다"고 한 리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결심하고 즉시 실천에 옮긴 용단이 없었다면 1960년의 봄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할 것이다. 그 잔인한 달의 열기를 마침내 대서양을 건너 자유 민주체제를 구가하고 자랑하는 미국으로까지 파급되었다.

 

켄트 대학의 학생 시위는 주 정부의 국민 방위군의 출동으로 학교 구내까지 군대가 진입하여 사상자를 내는 지경에 이르럿던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이것이 60년대의 세계적인 이른바 "스튜던트 파워"의 실상이었다.

 

학생들의 폭력 시위로 한 나라의 정권이 위헙을 받은 일본은 한때나마 최고 학부인 동경대학의 문을 닫은 일이 있었다. 4 · 19는 자연 발생적인 의거였는가? 4 ˙ 19는 배후 세력에 의한 혁명이었는가?

 

프랑스 혁명이나 볼쉐비키 혁명은 누적된 왕정의 부패와 루소나 마르크스와 같은 사상가들의 자각이 작용한 역사의 과정이었다면 1960년대의 우리는 과연 어떠한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되었던 것인가?

 

4 ·19 세대는 '오늘'을 어떻게 보는가

지금 국가 사회의 중견으로, 주체로 활동하고 있는 4 ·19 세대들이 오늘의 젊은 세대들을 바라보며 무엇으로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설명하며 기성 세대의 본보기를 앞으로도 보여 줄 것인가?

 

서구적인 틀에 우리를 맞추어 설명이 가능한가? 4 ·19의 역사적 교휸은 한 세대를 넘긴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올바른 평가를 해 봄직한 시점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기름진 음식 잘 먹고 흔들어대며 태평 성대를 구가하는가 하면 아직도 '모로토프 칵테일'을 던지며 나라의 에너지를 상쇄하며 정부가 쉽게 굴복하리라는 생각에 날뛰는 무리들을 보면서 이 나라의 뜻있는 지식인들은 그래도 나 몰라라하고 수수 방관하고 있어야 하는가?

 

일세기 전이나 21세기를 눈앞에 둔 오늘이나 우리는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환경 속에 갇힌 사람들이고 반세기를 분단 상황 속에 살아가고 있다.

 

정유년(1957년) 설날 당시의 리승만 대통령은 새해의 감회를 국부병강國富兵强이면 영세자유永世自由라고 적었다.

 

1948년 8월 15일 현대 국가의 형태와 체제를 갖춘 대한민국을 출범시켰으나 국제 공산주의 세력의 남침으로 국토가 초토화된 3년간의 전화에서 기사회생한 이 나라가 전쟁 복구와 경제 건설이 궤도에 오르고 있음을 보는 이대통령의 감회는 남다른 바가 있었을 것이다.

 

리승만 박사의 청년 시절의 저서 '독립정신'과 1941년의 '일본의 내막을 벗긴다'(Japan Inside Out)의 내용 속에 일관되게 흐르는 민족의 자주 독립을 염원하는 정신은 국부병강 영세자유로 그 구체적인 방안이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한평생을 오로지 나라의 부강과 독립을 위하여 애쓴 그에게 일본과 구 소련은 첫째가는 위협적인 존재였기에 반일 반공을 표방하였고 미국은 도움을 주는 존재로 알았기 때문에 미국을 알려고 하였고, 미국을 우방으로 동맹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리승만의 예언자적 예지

어떠한 형태로든 공산주의자들과의 합작을 강요하거나 압력을 가하는 자들은 모두가 자유 세계의 공적公敵일 뿐 아니라 자신에게  맞서는 적수였다. 표면상 그의 맹방이었던 모든 서구 열강 국가들의 주장이라 할지라도 국제 공산주의자들과 타협하기를 완강히 거부함으로써 그는 '아무와도 타협할 수 없는 완고하고 늙은 폭군'이라는 세평을 듣게 되었다.

 

훗날의 모든 역사는 그러나 그가 예견한 바와 대부분이 옳았고 정당하였음을 입증하였다.

 

오늘의 현실을 바라볼 때 그는 "내가 이미 그렇게 되리라고 말하지 않았소?"라고 말할 것이다.

 

진주만의 기습을 예언한 것도 그렇고 북한을 비롯한 과거의 공산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그는 1941년의 '일본의 내막을 벗긴다'와 마찬가지로 정치 고문이었던 올리버 박사에게 보낸 1949년의 서한에서 6 · 25의 남침을 밝히고 있다.

 

1949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1년전에 올리버 박사에게 한국의 정치 정세를 설명하는 글에서 오늘의 우리들이 다시 새겨야 할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정세의 변동은 예측하기 어려운 점도 있겠으나 변치 않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후진인 우리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다음은 그의 서한 내용이다.

 

오늘의 한국 1949년 (올리버의 이승만 비록 발췌)

"최근 중국의 정치적 변동 (중공의 대륙 석권과 장개석의 대만행 = 필자 주)은 한국에 광범위하고 심각한 불안과 우려를 자아내게 하고 있다. 중국에서 국민당 정부의 몰락과 이에 따른 적색 분자들의 상승 추세는 반드시 한국에 불리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우려의 주요 원인을 이러한 공산측의 승리보다 차원 높은 곳에 있다. 중대한 관심사는 아시아의 공산당 문제를 해결하고저 미국이 쓰고 있는 그 방법이다.

 

다음은 그 하나의 예를 설명하는 것이다.

 

미국 극동 정책의 의도는 중국을 하나의 통일된 민주 국가가 되도록 돕는데 있었다. 이와 같은 정책 아래 미국은 소련과 협조하는 공산 분자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국민당 정부를 보호 방위하기 위하여 여러 번의 시차를 두고 막대한 자금, 물자, 그리고 무기를 제공하였다. 미국이 손을 떼는 이 마당에 과거 다년간의 모든 도움과 원조가 허사였음이 입증되었다.

 

한국 운명 점쳐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 그 해답은 간단하다. 미국의 정책 수립자들은 민주주의 원칙 그대로 한 사람이 아니다. 모두가 자기 의견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관철시키려 한다. 만일에 정책 수립자 가운데 한 사람의 견해와 일치되는 어떤 사건이 세계의 어느 한 곳에서 발생한다면 그 자는 남에게 자기 견해를 지지하도록 하는데 성공할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그 부처의 정책이 된다.

 

뒤에 가서 같은 문제에 관해서 또 다른 사람의 견해에 맞는 듯 싶은 어떤 사건이 어떤 곳에 발생했다면 그 다른 견해를 따르기 위해 그 이전의 정책은 폐기된다.

 

이것이 어떤 일정 기간 동안 불변의 정책이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정책이 자꾸 바뀌는 까닭이다. 이것이 지난 10년간을 두고 미국이 중국의 사정을 처리해온 방법이었다.

 

어떤 일정한 사정에 대해서 10년 또는 그 이상으로 뚜렷한 정책을 유지하는 구 소련과의 경쟁에서 이러한 입장이 무슨 수로 겨룰 수 있겠는가? 과거 10년 동안 우리는 아무도 미국 사람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것이며 또 어떤 방향으로 전환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미국 정책이 때로는 반공이고 어떤 때는 친연안파(친중공파)가 되는가 하면 때로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었다. 그 결과 국민당은 기대할 만한 꾸준한 지지 세력을 얻지 못한 반면 중국의 공산 분자들은 폭넓은 지지 세력을 확보하는데 필요한 모든 고무적인 자극과 시간을 벌었다.

 

일반 인민 대중은 미국 정책이 믿을 수 없을 때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으며 희망을 포기하고 자중지난을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미국은 철수 결정을 내렸다. 이와 같은 상황이 왜 한국인들에게 근심을 안겨 주는가? 1945년 11월과 12월 38도선 이남의 뛰어난 공산주의자 3명 가운데 한 사람인 박헌영은 남한의 공산주의자 수가 2천명에 달한다고 자랑하였다.

 

이 사람들은 거의 전부가 북으로부터 침투한 자들이다. 이 숫자가 정확하다고 하자. 2천만 이상의 인구 중에서 2천명은 대야 속의 물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대로 이러한 실태를 처리하도록 우리를 내버려 두었던들 우리들은 어렵지 않게 이들을 진압시키고 북으로부터 남으로 오는 자들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며 적어도 남한 만이라도 지금 쯤 공산당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미군정 허가 받은 빨갱이 반란 일으켜

우리가 조직한 어떤 정치 조직에서나 공산 지도자들과 협조해야 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끌어 들이지 않는 한 우리는 정부도 국회도 가질 수 없다는 말을 미국 친구들이 하였다. 우리는 공산당을 비난하지도 마며 그들의 근거없는 반미 반한의 허위 선전을 막아서도 안된다고 하였다.

 

우리들의 보관 문서철을 보면 내용잉 공산당에게 너무 가혹하다는 이유로 검열에서 삭제된 라디오 방송 연설문 귀절이 많이 보인다.

 

최근 여수 · 순천 반란은 국방 경비대 내부에 어떤 종류의 인간들이 들어 있는지를 알고 있던 인사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예언했던 일이다. 경비대 조직을 위해 하지 사령관이 임명한 프라이스 대령은 상당수의 빨갱이들이 경비대에 입대하도록 허용하였다.

 

몇 번이고 여기에 대해서 주의를 환기시켰으나 그는 이 자들이 선량하며 아무도 말썽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반란은 조만간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었다.

 

결국은 경비대 내부의 공산 분자들에 의하,여 충성스러운 한국인들이 불태워지고 살상되었다. 부상자와

불구자들을 제외하고도 사망자가 5천명을 넘었다.

 

지난 2년간 공산당을 다루는 방법이 불확실하고 무정견했기 때문에 거의 황무지에서 남한에 공산당 조직을 일으키게 했고 그로 인하여 남한에 공산당 문제를 낳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과거로부터 진행되어 온 일들을 논하였지만 지금 현재는 어떠한가? 미국인들은 확고한 정책이나 명확학 계획없이 똑같은 무정견한 방법을 답습하였다. 독립 정부의 탄생이 세계 대다수 민주 국가의 승인을 얻어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국인들 스스로가 자기 나라와 국경선을 지키도록 허용되어야 한다고 우리들은 확신한다.

 

이 사람들은 어째서 북으로 올라가 자기들의 집안을 정돈하도록 허용되지 않는 것인가? 소련은 자기들이 이미 한국에서 철수하였다고 주장했고 또 현재에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나라를 회복하고 유지하며 방방곡곡을 스스로의 법치하에 두기 위해 합당한 군대를 설치하는 것은 한국 정부에 달린 책무이다.

 

남의 나라 영역을 잠식하지 않는 한 그것은 그들의 국내 문제이며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가 자기의 영토 내에서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해 책임이 없다.

 

구 소련이나 어떤 외국에 의한 한국 침략이나 내정 간섭을 방지하는 일은 미국과 세계의 영예로운 모든 국가의 책임이며 국제연합 총회의 공식 결정을 이행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능력을 다하는 것은 국제연합의 책임이다.

 

적에게 대항 않고 어찌 우리 지키나

그러나 우리는 위도선의 경계를 넘지말 것과 만일 공산 분자가 38도선을 넘어 오더라도 그 선을 넘어 상대편까지 따라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받고 있다.

 

적에게 대항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자기 생명과 가정을 지킬 수 있단 말인가?" 만일 허용되기만 한다면 우리는 당장 넘어가서 파괴분자들을 벌하고 즉시에 질서와 평화를 확립시킬 수 있다. 우리가 최소한의 유혈과 살상으로 신속하게 이러한 과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가장 현대적이고 효과적인 무기를 우리들에게 공급해 줄 것을 요구한다.

 

우리 남한 군대가 구식 보병과 포병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한 북한의 소수 공산군 만으로도 그들이 중국와 희랍에서 본받았던 유격 전술을 특별히 채택하여 장기적이고 소모적인 전쟁을 필요로 하게 만들는지 모른다.

 

우리는 미국 원조에만 의존해서는 안되며 더욱이 무장과 훈련으로 스스로 대비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다.

 

북한의 우리 국민들은 매국노들을 응징하기 위해서 붉은 군대 내에 있는 우익 충성 분자들의 협력으로 일치 단결하여 총권기할 때에 자기들을 도와 달라고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다.

 

일제 기간 동안 한미 관계 메운 리승만

그러나 미국 친구들이 국제 전쟁으로 번질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우리는 북한 동포들을 도울 수가 없다. 우리들은 미국 정부의 정책을 무시하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의 변하기 쉬운 정견없는 정책을 따른다면 한국은 조만간 또 하나의 중국처럼 밀어 붙여질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이 명하는 바에 따라 미국 친구들이 무엇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이 우리 자신의 계획을 가지고 앞으로 나갈 결심이다. 우리들 자신이 서서히 재갈과 쇠사슬에 매이도록 내맡겨 대항도 이미 때가 늦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는 우리가 차라리 싸우다가 부서지는 편이 낫다고 하는 국민 감정이 지금 한국을 지배하고 있다.

 

1982년 한미 수교 백주년이 되는 해이다. 19세기 말엽의 한반도는 주변국들의 쇠잔해진 왕국, '은자의 나라'를 차지하려고 각축하는 가운데 나라의 꼴이 풍전 등화 같은 형편이었고 친일, 친청, 친아라사로 갈라진 지도층들이 갈팡질팡하던 때이다.

 

나라의 꼴이 얼마나 형편이 어렵게 되었기에 1905년의 우리 나라 실정을 미국 '아우트룩'지에 보도한 미국의 조지 케난의 기사가 빌미가 되었던지 그의 친구인 미국 대통령 시어더 루즈벨트는 '태프트 · 가쯔라 협정을 통해 일본의 한국 강점을 묵인하게 되었을까 싶다.

 

다음은 미국 외교 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진 조지 케난의 기사 내용이다.

"현존하는 한국 정부의 실태는 간닪게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국민으로부터 그들이 간신히 생계를 위하여 벌어들이는 모든 것을 간접 또는 직접으로 수탈하며 실제로 되돌려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생명 재산에 대한 아무런 적절한 보호책도 제공하지 않는다. 눈에 띌만한 아무런 교육 시설도 제공하고 있지 않다. 도로 건설도 안하고 항만 개량도 안한다. 전염병의 예방아니 단속 방안도 취하고 있지 않다. 무역과 산업을 장려하는 노력도 없다. 가장 저속한 미신을 장려하고 있다.

 

현대에 있어 거의 유례가 없을 정도로 인권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거짓과 부정과 배신과 잔인성과 세상을 비웃는 만행을 일삼는 본보기를 국민에게 보임으로써 그들을 타락시키고 풍속을 문란시키고 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 정책은 가속화 되었고, 드디어 1910년의 경술 국치를 맞게 되었다. 그로부터 1945년 해방의 날까지 한미 관계는 중단이 된 것이고 그 35년의 공백을 메운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리승만 박사임은 수교 백년의 기록에 남아 있는 바와 같다.

 

해방이 된 1945년 8월 15일로부터 대한민국이 독립 정부로 출범하는 1948년 8월 15일까지의 3년간은 미국 육군의 점령하에 군정이 실시된 시기이다.

 

군정 실시 기간을 짧게 하고 하루 속히 남한이나마 독립된 정부를 수립하려는 리승만 박사의 노심초사가 없었던들 대한민국의 건국이 과연 가능하였을까 하는 점에 대하서 다시 자세하고 정돈된 평가가 필요한 시점에 우리는 서 있는 것이다.

 

리승만 제거 음모 4 ·19로 끝나다

식민 통치 35년의 모든 유산과 해외로부터 밀려드는 귀환 동포와 특히 볼쉐비키적 혁명과 토지 개혁으로 피해입은 이북 동포들이 쏟아져 들어 온 38선 이남의 국토에서 신생 대한민국이 탄생된 것인데, 속되게 "단추가 잘못 끼워진 채" 오늘의 잘못이 있다고 하느 ㄴ인간들이 아직도 큰 소리 치는 오늘의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한 것이다.

 

한 시대를 이끌어 가는데 있어 지도자의 사람됨과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는 오늘이다. 역사의 주역은 역할이 끝나면 물러가게 마련이지만 유독 리승만 박사를 끝까지 헐뜯고 역사에서그를 과소 평가하려는 것은 김일성 사망 후에도 아직까지 끄떡없이 대남 적화 통일 전략이 살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극동 정책을 비판하고 충고하며 그들의 눈에는 비타협적이고 비협조적이었다고 해서 그를 제거하려는 미국의 '에버레디 작전'은 4 ·19로써 끝이 난 것이다.

 

리승만 박사만큼 이른바 사면초가의 처지를 겪은 인물은 아마도 동서 고금에 없을 것이다. 애국 애족의 모범을 평생 동안 우리에게 보였고 부창부수의 수범을 한 부인의 한 평생을 우리는 금년 8월 15일을 맞으며 다시 되새겨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야당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하나 같이 리승만 박사에 의해 발탁되고 인정받았던 인사들이 대부분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니, 이 또한 그 분의 팔자가 기구함을 보여 주는 하나의 역사이다.

 

일본은 한사코 이박사 타도에 나섰고, 그 촉수가 여기저시거 번득였음을 우리는 또한 간과 해서느 아니될 것이다.

 

8 ˙ 15 건국 48주년을 맞이하는 우리가 4 ·19조차 역사 속에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한국논단 1996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