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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3년만에 자유·민주국가 첫걸음

Joyfule 2020. 7. 2. 01:04


  • 광복 3년만에 자유·민주국가 첫걸음
  • “건국으로서의 8·15는 아직 진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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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우 기자 hwlee@chosun.com
    입력 : 2007.08.14 00:30

    •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다음날부터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가 대표적인 정치 결사체로 부상했다. 초기에는 중도 우파의 안재홍도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좌우합작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통일된 정부가 들어설 것을 의심했던 국민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에 의한 분할 점령으로 점차 분단의 가능성이 드러나면서 ‘건국(建國)’이라는 말보다는 독립(獨立)이라는 말이 더욱 빈번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10월 16일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했고 김구는 ‘임시정부’를 기반으로 정치활동에 들어갔다.

      건국은 누구에게나 통일된 국가 건설을 의미했기 때문에 분단 고착화는 점차 건국이란 단어 사용을 꺼리게 만든 반면 미·소가 추진한 신탁통치안은 한국민들의 격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독립’을 향한 의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미 군정에 막혀 정부로 자처하기 어려워진 김구의 임정 세력도 한국독립당을 세웠다. 이후 이승만과 김구는 손을 잡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해 이승만이 의장, 김구가 부의장을 맡았다.

      서울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우익은 서울운동장, 좌익은 남산에서 집회를 벌이며 세를 결집했다. 장차 남한에 들어서게 될 정부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정치 투쟁이었다.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남북 분단은 기정사실화되고 있었다. 이때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 선언이 있었다. ‘정읍 발언’이 그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이승만으로서는 양보할 수 없는 건국 노선이었다. 북한은 김일성이 소련의 사주에 따라 사회주의국가 건설에 매진하고 있을 때였다.

      남한에서는 이승만 노선이 승리를 거둬 국제적 공인을 받는 유일한 국가가 들어서게 됐고 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식이 열렸다. 한반도에 자유와 민주를 지향하는 국가를 건설하는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자유주의연대 신지호 대표는 “그런 점에서 여전히 남북은 건국기에 있고 궁극적으로 남한이 주도적으로 통일하면 이승만 건국 노선이, 북한이 통일하면 김일성 건국 노선이 승리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 대표는 “광복으로서의 8월 15일은 이미 완료된 상황에 대한 기념이라면 건국으로서의 8월 15일은 진행형이기 때문에 더욱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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