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니 (고전 6:19)
리더란 무릇 목표를 갖기 마련입니다. 그 목표를 바라보며 사람들과 조직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옳지 않은 목표 세 가지와 참된 리더들이 지향하고 나아가야 할 목표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옳지 않은 목표를 언급합니다. 그가 리더의 목표를 언급하면서 옳지 않은 목표를 먼저 밝힌 것은 그것이 옳지 않은 목표임에도 일반적으로 교회나 조직에서 목표로 삼는 경우가 많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가치 없는 목표
첫째, “결과 지향주의”가 있습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리더를 새로 뽑을 때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보다 결과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E-MART 지점장이 있다고 합시다. 그에게 목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분명 ‘많은 매출’일 것입니다.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서 목표를 설정한 후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일 것입니다. 응암동 지점의 경우, 일 년 365일 내내 영업을 하는 것은 물론 저녁 11시까지 영업을 하면서 고객을 끌어 모으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결과 지향주의”입니다. 그러나 가치 없는 목표일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결과 지향주의”가 사람들의 눈에 당연시 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영적 리더들이 추구해야할 목표가 아님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리더들의 목표에 높은 가치를 둡니다. 더 큰 문제는 교회 리더들도 여과 없이 “결과 지향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교회의 목표를 외부적인 모습으로 설정하는 일들이 있게 되었습니다. 성공의 기준을 외부적인 모양에 두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배당의 좌석 수나 헌금의 액수, 프로그램의 숫자 등으로 성공의 기준을 삼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목회자들 세계에서는 이런 요인들이 성공의 척도가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공한 사람을 훌륭한 리더로 봅니다. “결과 지향주의”가 교회 내에 들어온 결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결과 지향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리더가 훌륭한 리더는 아닙니다. 참다운 영적 리더가 추구해야할 목표가 아닙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이에 “우리의 목표는 사람 중심적이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중심적인 목표”야 말로 성경적인 가치관입니다. 물론 사람의 비위를 맞추거나 사람의 평가를 받으려는 가치관을 말하지 않습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또 “목표 달성이 곧 하나님의 주신 복의 결과는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 리더의 목표를 달성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우선순위를 아는 영적 리더들은 목표달성을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 자체가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시아에서 가장 큰 예배당을 지었다고 할지라도 전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사상 최대의 매출액을 기록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할 수 있습니다.
둘째, “완벽주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높은 곳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목표이며, 높은 곳에 있는 목표입니다. 사실 이 목표를 앞에 두는 순간 우리들의 말과 행동은 너무나도 “거룩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준 앞에 우리 자신들이 너무나 거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숙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라시면서 영육 간에 성숙하셨고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해서 영적으로 성숙해 가셨습니다. 바울은 성숙해 가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성숙했을 때를 목표 삼고 자라나라고 말한 것입니다. 말라기 6장 1절부터 6절부터 14절입니다. 위 구절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되 완전한 것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 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이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이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 도다 [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 이니라 [14]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 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 이니라
물론, 완전하라고 하는 의미는 세상적인 의미에서의 완전함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탁월함을 추구하는 완벽주의가 아닙니다. 결코 세상적인 안목에서 바라보는 완벽주의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이 언급하는 완벽주의는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설명 드리겠습니다. 어느 교회에 A라는 찬양리더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B라는 사람이 새로 입교했는데 A보다 훨씬 더 노래를 잘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A라는 리더를 그만 두게 하고 B라는 사람을 리더로 세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적인 탁월함입니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올바른 목표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람이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노래를 더 잘하고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받으시는 분이기에 그렇습니다. 상한 심령의 제사를 받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 1:28-29)
바울의 목표가 잘 나와 있는 구절입니다. 바울의 목표는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즉 성숙한 사람으로 세우는 일이 바울의 사명이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능력으로 권하고 가르치고 성령의 힘을 따라 섬겼습니다. 자기 인생을 투자했습니다. 이것이 사람중심적인 목표입니다. 바울은 ‘실적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숫자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이길수 목사님의 경우, 주일낮예배 시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성도들 숫자를 헤아리고 있을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너 무엇하고 있느냐?”라고 하신다고 합니다. 반복적으로 숫자에서 눈을 떼게 하시는 겁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완벽주의적인 목표는 옳지 않은 목표입니다.
셋째, “더 크게 더 빨리 더 많이式 주의”가 있습니다. 사실 이 구호는 지극히 미국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지극히 한국적인 구호가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문명은 사이즈로 정당화되곤 합니다. 크면 좋은 것이고 작은 것은 좋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어져 버렸습니다. 사실 작은 교회가 찬양과 경배로 예배하면 이단 소리를 듣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큰 규모의 교회가 찬양과 경배로 예배하면 시대를 앞서 가는 교회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것이 한국 교계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풍토가 있게 된 걸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리더가 조직을 큰 규모로 키워놓으면 그것은 곧 하나님이 축복하신 결과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이 역사하신 증표로 “큰 것”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조직이 키워질 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커진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신임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신 증표가 반드시 ‘큼’에 있지 않습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의 말입니다.
종교계에서도 대형 교회를 키울 수 있는 리더는 영적 영웅으로 통한다. 그들은 성공담을 책으로 펴내라는 권유를 받고, 교회 성장 세미나에도 단골로 등장한다. 그들이 부도덕한 삶에 빠져도 교회는 웬만해서 그들을 해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복 주시는 손길이 아직도 그들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목사님이 한 일이 그렇게 잘못이라면 하나님이 왜 목사님한테 복을 주시겠습니까?”라고 반문한다. 물론 이것은 양적 성장과 하나님의 복을 동등시한 결과다. 과연 그럴까?
성장은 건강한 교회의 불가피한 현상이기는 하다. 사도행전에 분명히 예가 나와 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복 주심 없이도 수적으로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다. 즉 사람을 끌어 모으는 것과 교회를 세우는 데는 큰 차이가 있다. 예컨대 마케팅 담당자는 사람을 끌어 모을 수는 있지만 교회를 키울 수는 없다. 숫자의 성장이 하나님이 주신 복의 확실한 징표라면 다수의 이단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엄청난 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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