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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ther, Martin(1483-1546)

Joyfule 2008. 11. 26. 08:31

 Luther, Martin(1483-1546)  

(1483-1546)
1. 초기 생애(1483-1505년)
2. 수도생활(1505-1517년)
3. 대사논쟁과 루터 단죄(1517-1521년)
4. 개혁운동(1521-1530년)
5. 후기생애(1530-1546년)
(1483-1505년)
  • 루터는 1483년 10월 10일에 독일 신성로마제국의 튀링켄 지역의 작센 공령에 위치한 아이슬레벤에서 빈농 출생인 한스 뤼데르와 마르가레테린데만의 아들로 태어났고 다음날 성 베드로 사도 성당에서 이날의 기념성인인 투르의 마르티노를 세례 주보로 세례받았다.
    그는 부모로부터 엄격한 종교교육을 받으면서 교회의 전례와 음악에 대한 애착심과 굳은 신앙심을 이어받았고 구원에 대한 깊은 관심, 죄의식, 사죄 획득에 대한 노력 등의 진정한 종교적 자세와 함께 마녀. 망상. 악마의 존재에 대한 강조, 미신과 혼합된 성인 공경과 광적인 성해 공경 신앙에서 벗어난 성지순례, 죄와 벌과 신의 심판 및 지옥 벌에 대한 두려움 등의 오도된 대중 신심을 물려받았다.

  • 루터의 부친은 1484년에 만스펠트의 광산지역으로 옮겨와 상당한 재산을 모은 동광기업의 경영주가 되어 아들의 입신 출세를 위해 교육시킬 수 있었다.

  • 1489년에 루터는 만스펠트 시립학교에서 라틴어, 전례음악, 교리를 배웠고, 1495년에는 '공동생활의 형제회'가 운영하던 마그데부르크의 대성당 부속학교에서 수사학과 윤리학을 공부하면서 당시에 그리스도 중심의 내적 신심을 강조, 실천하는 '새로운 신심'이라는 신앙 부흥운동을 일으킨 스승들에게 영웅적 신심과 조용한 기도생활의 방법을 체득하였다.
    1년 후에 13세의 소년 루터는 아이제나하의 성 게오르그 성당 부속 라틴어 학교에서 고급 라틴어 문법, 수사학, 시를 배웠고 성 마리아 성당의 요하네스 브라운 본당신부를 통해서 신앙심을 더욱 증진시켰다.

  • 루터는 15세이던 여름학기에 에르푸르트대학에 입학하여 열심히 강의를 들으면서 노래와 악기(류트) 연주에 재능을 보였고, 친구들과 진지한 토론에 열중하여 철학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 그는 대학시절의 새로운 학문사조로 등장한 윌리엄 오캄의 유명론(唯名論)을 접촉하였다.
    1502년에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3년 후에는 석사학위를 획득하였다.
    곧이어 부친의 간절한 원의를 따라 1505년 5월에 에르푸르트대학의 법학과에 등록하였으나 2개월 후에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함으로써 법률 공부를 포기하였다.
(1505-1517년)
  • 1505년 7월초에 루터는 만스펠트에서 에르푸르트로 가는 도중에 스토테른하임이라는 마을 근처에서 뇌우(雷雨) 속에 번쩍이는 번갯불에 놀라 마지막 고해성사도 받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혀 성부(聖婦) 안나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수도자가 되기로 서원하였다.
    이 서원은 돌발적 결심이기보다는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준비되었던 강렬한 종교심에서 나온 결과였다.

  • 루터는 중세의 일반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자기구원을 갈망하였고 수도자생활이 구원에 이르는 최선의 길이라고 믿고 있었으며, 이러한 종교적 자세가 수도원 입회의 동기가 되었고 갑작스러운 죽음의 위험과 신의 심판 및 지옥 벌에 대한 두려운 감정이 수도 서원을 가속시켰을 뿐이다.

  • 1505년 7월 17일에 부친의 격한 노여움과 친구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탁발수도회인 성 아우구스티노 은수자회의 에르푸르트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는 약 2개월 동안 청원자로 지낸 후에 수련기에 들어서면서 수도회 규칙대로 성서를 정독, 연구, 묵상하다가 수도원 신학교 교수인 나틴의 권유로 성서를 멀리하고 유명론 신학에 관심을 갖고 탐구하기에 이르렀다.

  • 1506년 9월에 루터는 수도서원을 하고 정식 수도자가 되었으며 1507년 4월에 사제서품을 받고 본격적 신학 연구에 들어갔다.
    그는 1508년 10월에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윤리철학을 강의하면서 성서와 신학, 특히 유명론 신학을 연구하였고 1509년에 성서와 베드로 롬바르도의 신학 명제론 4집을 강의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였다.

  • 1510년 말에 루터는 자기 수도회의 개혁을 둘러싼 분쟁 때문에 로마에 갔다가 5개월 후에 귀국하여 비텐베르크 수도원의 부원장과 신학연수원 원장을 겸임하면서 수도회의 설교가로서 사목활동에도 종사하였다.
    그는 1511년에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 명제론 4집 을 강의하기 시작하였고, 1513년 10월 19일에 신학박사 학위를 획득하고 성서교수로서 활동하였다.

  • 1515년에 루터는 비텐베르크 본당의 설교가로 임명되어 강론 대에서 교회 개혁을 제창하기 시작하였고 성 아우구스티노 은수자회의 11개 수도원을 관장하는 지부장에 선임되었다.
    수사신부인 루터의 최대 관심사는 '나의 구원'이었고 이러한 구원에 대한 관심과 갈망은 그를 소심한 수도자로 만들었다.

  • 루터는 구원에 있어서 신의 은총보다 인간의 공로를 과대평가하는 유명론적 윤리관의 영향을 받아 수도자로서 거의 완벽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항상 자신이 생각하기에 불가항력적 육욕의 감정이 일어나 인간의 행위인 수도생활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고 믿고 영신적 번뇌에 빠졌다.

  • 아울러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에 나타난 성구, "신의 정의는 복음에서 드러났다"는 바울로 사도의 말씀에서 신을 사랑이 없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간을 엄벌하는 존재로 간주함으로써 신학적 고민을 겪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적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비텐베르크 수도원의 탑실에서 이러한 성구를 계속 연구, 묵상 중에 그 다음에 나오는 "의인은 신앙에 산다."는 말씀에서 신의 수동적 정의를 발견하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탑실 체험).

  • 이제 그는 '신앙에 의한 의화'의 교리를 주창하면서 인간 구원에 있어서 교회, 성사, 사제직 등의 필요성을 거부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탑실 체험의 돌발적 소산이기보다는 루터의 장상이며 개인 지도신부였던 요한 스타우피츠의 훈화, 성 아우구스티노의 반(反) 펠라지오적 저서, 독일의 신비주의(요한 타울러), 오캄의 사상, 성서 등의 영향에서 나왔다.
(1517-1521년)
  • 교황 레오 10세(재위: 1513-1521)는 전임 교황이 성 베드로 대성전의 재건을 위해서 반포한 대사를 다시 공포하고 대사부(大赦符) 판매 촉진을 목적으로 대사 설교를 지시하였다.
    이 때에 루터는 신자들이 대사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를 망각하고 대사부를 면죄부(免罪符)로 착각하여 남용하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1517년 10월 31일에 교회 관습대로 그의 교구장과 대주교에게 대사 남용에 대해 항의하는 편지에 '95개항의 신학 명제'를 작성, 동봉하여 보냈다.

  • 신학 명제는 가설적 논점으로서 대사 자체에 대한 부인이 아니라 성서와 신학에 입각하여 대사의 올바른 의미와 실천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여 신학대학에서 논의되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그래서 약 2주일 후에 루터는 그의 동료 대학교수들에게도 신학 명제를 발송하였고 이는 출판업자들의 손에 들어가 1518년 초에 인쇄되어 널리 전파되고 인문주의자들과 교회 개혁을 열망하는 이들의 환영을 받았다.

  • 그러나 곧 성 도미니코 수도회 신학자들의 공격을 받아 반론 명제들이 발표되었고 4월에 루터는 독일 성 아우구스티노 은수자회의 하이델베르크 참사회에 소환되어 그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종용받았으나 오히려 그는 '십자가의 신학'을 제시하였고 6월에는 95개항의 신학명제에 대한 해설서를 내놓았다.

  • 결과적으로 1518년 10월에 카예파노 추기경이 심문관으로 독일의 아우그스부르크에 파견되어 루터의 가르침, 즉 대사, 신앙과 성사 은총의 관계, 공로의 의미에 대한 견해를 경청하고 그에게 무조건 이단적 교리를 취소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자기의 주장이 성서에 의해서 잘못되었다고 증명되지 않는 한 승복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고, 그가 체포되어 로마에 압송된다는 소문이 나돌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빠져나왔다.

  • 같은 해 11월 9일에 대사에 대한 교황 교서가 반포되어 루터에게 더 이상 교회의 교도권에 항의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카예타노 추기경은 작센의 프리드리히 선제후에게 루터를 추방하거나 교회에 인도하도록 요구하였으나 루터가 아직 이단자로 단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 1519년 6월 27일에 작센공 게오르크의 주선으로 라이프치히에서 루터는 저명한 신학자 요한 에크와 신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 교황과 공의회에 대해 토론하면서 교황권의 신수설(神授說)과 공의회의 무류성(無謬性)을 거부하였다.

  • 1520년 2월에 로마에서는 루터의 가르침에 대한 조사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6월 15일에는 교황 교서 'Exsurge Domine'가 반포되어 루터의 이단교리 41개항을 나열하여 단죄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교황과 교황청을 비난하는 소책자들을 내놓았고 개혁 선언문이라고 일컬어지는 [독일 국가의 그리스도교 귀족들에게 고함], [교회의 바빌론 유수생활], [그리스도 교인의 자유]를 발표하여 독일인의 로마 교황청에 대한 민족적 반감을 야기 시키면서 교회의 전통적 교리와 관습을 반박하였고, 12월 10일에는 비텐베르크의 엘스터 성문에서 교황 교서를 공개적으로 소각시켰다.

  • 결국 루터는 1521년 1월 3일에 공포된 교황 교서 ‘로마 교황 선언(Decet Romanum Pontificem)'에 의해서 공식으로 파문되었다.
(1521-1530년)
  • 1521년 1월 27일부터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칼 5세(재위: 1519-1556)는 파문 받은 루터의 국외 추방령을 선포하려고 하였으나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요청으로 루터의 보름스 국회 출두령을 내렸다.
    루터는 4월 18일에 국회에서 그의 교리에 대해서 변론한 후, 그것이 성서에 입각하여 오류라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 한 자신의 양심을 거슬려 진리를 취소할 수 없다고 열변을 토하였다.

  • 그러나 다음날 황제는 루터의 오류에 대해서 국가가 아직도 어떠한 조처도 취하지 않은 사실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면서 이제 루터를 이단자로 공인할 것을 촉구하였다.
    칼 5세는 5월 8일에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추방을 명하는 칙령에 서명하여 5월 25일에 의회에 제출하였으나 많은 의원들이 귀가하였고 황제는 전쟁으로 독일을 떠나 루터 단죄에 대한 공식 입장 추방령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 루터는 이미 1521년 4월 26일에 보름스를 떠나 프리드리히의 주선으로 바르트부르크성에 은신하여 미사성제, 성직자의 독신생활, 수도허원을 비난하는 저서들을 내놓았고 신약성서를 그리스어 원본에서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루터의 과격한 설교와 저서는 독일 교회를 혼란 속에 빠뜨렸고, 성직자들은 사제직을 포기하고 수도자는 수도원을 떠나기 시작하였다.

  • 한편, 비텐베르크에서는 1521년 말부터 루터의 영향을 받은 과격한 종교 개혁가들이 등장하여 사회적 혼란이 심각해지자 루터는 1522년 3월에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 수도자로서 강론대에 서서 폭력의 사용을 배척하는 보수적 입장에서 평화로운 교회 쇄신을 부르짖었다.

  • 1524년 여름에 농민반란이 일어났을 때에 지도자들은 루터의 그리스도 교인의 자유를 내세워 농민의 이익을 정부에 요구하고 나섰다.
    루터는 처음에 농민 편에 서서 인내와 평화를 호소하면서 영주들에게 농민의 요구를 들어줄 것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일부 농민 지도자들이 방화와 살육으로 사회질서를 파괴하여 정치적 공백의 위험이 닥치자 그는 과격한 행동을 싫어하고(비록 그는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였지만) 권위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잔인하고 악의에 가득 찬 광고 '강도이며 살인마인 농민도당을 반박함'에서 제후들에게 사회 무질서를 방지하기 위해 무력 진압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루터의 국가 영웅이라는 이미지를 상실케 하였다.

  • 이러한 인기하락은 그의 결혼으로 가속화되었다.
    42세의 루터는 시토 수녀회에서 환속한 16세 연하의 카타리나 본 보라와 결혼하였다. 이 행동은 그의 가까운 동료들에게도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그를 멀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 더욱이 루터는 1529년 10월에 마르부르크에서 성체현존문제를 두고 츠빙글리(1484-1531)와 의견을 달리함으로써 그와 결별함으로써 지지자를 잃었다.
(1530-1546년)
  • 칼 5세는 독일지방의 구교(가톨릭)과 신교(루터파)의 심각한 대립으로 국가질서의 혼란을 해소하기 위하여 1530년에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국의회를 개최하여 양측이 화해하도록 촉구하였다.
    우선 루터 측에서 필립 멜란히톤(1497-1560)이 신조문('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을 의회에 제출하였다.
    이어서 가톨릭 측에서는 요한 에크를 중심으로 한 대표들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에 대한 반론'을 작성하여 협상에 나섰다.
    양측 협상위원들은 최대 절충과 최소 요구의 양보 자세로 임하여 재합일을 위한 화해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 그러나 통합의 시도는 루터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루터는 제국의 법의 방치자로서 국회에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코부르크성에서 그의 추종자들과의 서신 연락을 통해서 협상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멜란히톤의 양보에 대해 엄중하게 힐책하였으며 그의 영주 프리드리히에게 어떠한 담판도 거부한다는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 1536년에 다시 칼 5세의 요구로 교황 바오로 3세(재위: 1534-1549)는 만투아에서 교회쇄신 공의회를 개최하겠다고 공고하였을 때에 루터는 슈말칼덴동맹의 신교 군주들을 위해서 '슈만칼덴 신앙조문'을 작성하였다.

  • 1537년에 루터는 담석증에 걸려 허약해졌고 그의 둘째 달 막달레나의 사망으로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1546년초에 루터는 만스펠트의 백작 가문의 영토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의 고향 아이슬레벤에 가서 중재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는 노쇠하였기 때문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
    2월 18일 밤에 루터는 그의 두 아들, 마르티노와 바오로, 만스펠트의 알브레트 백작 부부, 옛 학우인 유스토 요나스, 본당목사, 의사 등이 둘러선 가운데에서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 그는 "당신이 설교한 가르침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고 숨을 거두었다.
    루터의 장례식은 2월 22일에 멜란히톤의 주례로 거행되었고 그의 유해는 비텐베르크성의 중앙 성당에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