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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지만 현실, 진실이지만 거짓인 세계 / 박완서

Joyfule 2015. 7. 25. 20:24

 

 

   꿈이지만 현실, 진실이지만 거짓인 세계 / 박완서 

 

[책] 내 식탁 위의 책들 - 정은지 저 | 앨리스

 

  나이 먹고 기억력이 희미해져 어제 일도 까먹는다 해도 잊지 못할 옛날이야기는

  누구에게 나 있다. 엄마한테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어린 시절은

  나의 일생 중 완벽하게 행복한 시절이었다.

  무서운 얘기도 많았지만 결국은 착한 사람이 이기고 못된 인간은

  멸하거나 개과천선하게 돼 있었고,

  동물이나 식물하고도 교감할 수 있는 조화롭고 아름다운 세계였다.

  그래서 엄마의 옛날이야기는 엄마처럼 안전했지만 언젠가는 벗어나야 할 ,

  아니 내쫓겨야 할 세계이기도 했다.

 

 『잃어버 것들의 책』(폴라북스)의 주인공 데이빗도 엄마가 해주는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엄마가 읽어주는 동화책을 들으며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내지만 엄마는 병들어 언제 죽을지 모른다. 소년은 엄마를 안 죽게 하려고 어린이다운 온갖 짓을 다 한다. 소년에게 엄마는 곧 이야기였다. 소년이 잃을까봐 전전긍긍해 한건 엄마가 아니라 이야기였고 이 세상의 의미였던 것이다. 병들기 전 엄마는 소년에게 말하곤 했다. 이야기는 누군가가 읽어줄 때 살아나는 특이한 생명체라고, 읽어주지 않으면 이야기 속 세상이 결코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건너올 수 없다고 속삭이던 엄마가 결국은 죽는다. 소년은 엄마와 공유하던 이야기 세계로부터 쫓겨나 추운 밤 담요를 뒤집어 쓰고 홀로 책을 읽는 고독한 독서의 세계로 넘어간다.

 

 그 책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고 그 오랜 세월을 살아남은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책이 사라져버린 뒤에도 이야기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오랫동안 이야기로 메아리로 울려 퍼진다. 그 이야기들은 현실도피이기도 하고 그 자체로 또 하나의 현실이기도 하다. 데이빗의 엄마가 말했던 것처럼 오래된 이야기의 세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분리되어 그 나름으로 존재해왔다. 그러나 그 두 개의 세계를 구분하는 벽은 너무도 얇고 약했고 언젠가부터 그 두 세계가 섞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부터 나쁜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부터 꼬부라진 남자가 데이빗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 꼬부라진 남자는 이름은 없지만 모든 동화 속에 나오는 악역 심술쟁이의 총칭이다. 그러나 그 남자를 거쳐 소년은 엄마를 잃은 후 새롭게 맞이한 의붓엄마, 의붓동생과의 화해에 이르고 동생에게 책임감을 느낄 줄도 아는 어른이 된다. 이 책 속에서 우리는 인생의 냉정한 리얼리즘과 따뜻한 해피엔딩을 함께 만날 수 있고 까마득하게 잊은 줄 안 옛날이야기, 아름답고 황홀한 온갖 동화의 세계로 초대받는 판타지도 맛볼 수 있다.

 

 요새 들리는 정치 경제 이야기가 하도 어렵고 답답해서였을까, 꽤 두꺼운 이 책을 단숨에 읽을 수밖에 없는 재미를 처음에는 현실도피적인 쾌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책을 덮은 후에도 살아나는 온갖 동화들의 메아리를 통해 이 난국을 극복할 해답은 아닐지라도 이 세상이 이다지도 답답한 까닭을 알아낸 것처럼 느꼈으니, 그건 이야기의 부재, 즉 상상력 결핍으로 인한 비전의 실종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 박완서 산문집『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