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 닥터 홀의 조선회상
셔우드 홀 지음
평양에서의 수난
홀 부부의 아기, 셔우드 홀은 1893년 11월 1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셔우드가 태어난 지 3주가 되었을 때 닥터 홀은 다시 평양으로 떠나야 했고, 1894년 5월에는 온 가족이 배편으로 평양에 도착했다. 현지 기독교인들 몇 명이 그들을 마중나와 있었다. 그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 마을로 들어서자 백인 여자와 백인 아이를 처음 본 주민들은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다. 홀 부인은 평양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 많은 구경 인파에게는 담이나 대문도 소용없었다. 몇 사람씩 방으로 들어와 우리를 구경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평양 감사 밑에 있는 젊은 관리는 남편이 있는 자리에서 “그의 아내를 이곳에 머물게 한다면 외국인들이 하나씩 계속 평양에 들어오게 되어 결국에는 평양은 외국인들이 다 차지하게 될 것이오”라고 말했다.
하루는 저녁 기도를 한 다음 평화스런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 2시경 기독교 신자들인 오씨와 이씨가 찾아와서 우리를 깨웠다. 그들은 믿음이 강한 김창식이가 감옥으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 창식이는 닥터 홀이 서울로 돌아가고 없을 때도 이곳에 남아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창식이는 매를 맞고 칼을 쓴 채 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고 했다. 관리들은 “닥터 홀에게는 감히 매질을 할 수 없으므로 대신 창식이를 가두고 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닥터 홀은 평양감사와의 면회를 신청했으나 만나주지 않았다. 그는 그 사이에 감옥에 있는 창식이를 보고 왔다. 창식이는 수갑(칼)을 너무나 조여놔서 매우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닥터 스크랜턴에게 급히 전보를 띄워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총영사와 외무대신을 통해 서신을 보내도 조선 왕비의 친척인 평양감사는 전보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마침내 여러 차례의 압력으로 석방된 창식이가 비틀거리며 집으로 들어와 마루에 쓰러졌다. 오는 도중에 사람들로부터 줄곧 돌맹이를 맞으면서 왔다는 것이다. 사법관이 계속 예수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라고 명령했으나 창식이는 못 하겠다고 거절했고, 그 때문에 더욱 심한 고통을 당한 것이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이다. 닥터 홀은 창식이의 발 아래 꿇어 엎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조선에서 예수를 위해 고난 받은 신앙인을 볼 수 있었다”는 이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귀한 은혜라고 말했다.
노블 목사도 그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 선교 역사상 처음으로 업무를 다 제쳐두고 모든 선교사들이 서울에 모여 기도를 했다. 각자 이 위기가 자신들과 깊이 관련된 일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이 두 사람을 위해 많은 기도를 했다.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있을 때 닥터 홀로부터 “모두 석방됐음. 창식. 심한 상처를 입었음”이라는 전보가 도착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선교사들은 신앙인 닥터 홀 내외가 새 시대의 문을 열었다는 깊고도 엄숙한 사실을 실감했다. 이제 새로운 장이 펼쳐진 것이다. 오랜 시련은 비로소 막을 내렸다.
평양에서 닥터 홀의 첫 신자가 된 사람은 오석형이었다. 그는 이번 사건 중 감옥에 갇혔다가 석방된 사람들 중 하나로 앞을 못 보는 어린 딸이 있었다. 홀 부인의 환자로는 장님, 벙어리, 귀머거리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당시 매우 처참한 상태에 있었다. 홀 부인은 오씨의 딸 봉래를 가르치기 위해 조선 기름종이에 바늘로 점을 찍어 일종의 점자를 고안했다. 그녀는 이 분야에 대해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장님들은 이 세상에서 쓸모없다는 세간의 그릇된 관념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맹인 교육이 시급했다.
평양의 상황은 차츰 안정되어 갔으나 셔우드와 홀 부인은 동양에서 외국인들이 흔히 걸리는 장질환을 앓기 시작했다. 닥터 홀도 작년 겨울 평양에 왔을 때부터 계속 기침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그 즈음 스크랜턴 부인이 영국 총영사 가드너 씨의 강경한 지시를 받고 닥터 홀 가족을 서울로 데려가기 위해 평양에 도착했다. 이들은 남쪽에서 봉기한 농민군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평양의 군대를 수송하고자 보낸 배 편으로 제물포 항으로 떠났다. 동학 반란군들은 농민들의 지원을 받아 서울을 향해 진군하면서 “학정을 없애라. 서양인과 일본인들을 몰아내라”고 외쳐대며 정부의 진압군들을 패주시켰다. 조선 국왕은 청국에 원조를 간청했고, 이에 청국이 일본과 맺은 조약을 무시하고 일본에 아무 통고도 없이 조선에 파병하자 일본도 조선 정부를 돕는다는 구실로 역시 군대를 파견했다. 홀 가족과 일행은 한강 입구에서 강을 따라 배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감리교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병원은 어느새 군대병원같이 되어버렸다. 전투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이 밀려왔다. 전쟁의 처참함이 현실로 나타났다. 닥터 스크랜턴은 그해 여름에 닥터 홀의 노력을 이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지금 닥터 홀은 의사, 간호사, 약제사, 안내역까지 혼자 다 맡고 있다. 진찰실이 가득 차 정신이 없던 어느 날 그가 했던 말은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이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한평생을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도우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닥터 홀은 환자들을 치료할 때 사랑과 동정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친절함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무기임을 터득한 사람이다. 그는 이 비결로 현실에서 기적을 낳듯 치료 효과를 낳는다.”
동학군들은 북쪽에서 청국군, 남쪽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결국 분쇄되었다. 이 난리는 청국과 일본이 서로 전쟁을 할 수 있는 구실이 되었다. 두 나라는 벌써부터 이런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서로 조선을 통치하려고 노려왔던 것이다. 1894년 9월 15일, 평양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고 이것은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일본은 전승국으로 부상했으며 청국군들은 평양에서 패주하여 물러갔다. 시모노세키 조약은 조선이 청국의 속국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게 한 대신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권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급변은 조선 사람들에게 오히려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그해 10월 1일, 닥터 홀은 처자를 서울에 남기고 장로교 목사들과 함께 서울을 떠나 평양에 도착했다. 이 여행을 통해 전쟁의 상처를 생생히 볼 수 있었다. 닥터 홀은 평양에서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환자들과 부상자들을 돌봤다. 그의 기독교인 동료들은 들것 나르는 일을 맡아주었다. 그는 학교(학생 13명으로 시작한 광성학교)를 다시 열고 조선인 기독교인들과 함께 매일 밤 예배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계속된 강행군으로 닥터 홀의 건강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당시 닥터 홀과 함께 있었던 모페트 목사는 그의 건강이 악화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지난해 여러 번 평양을 왕래하면서 너무 심한 혹사를 당해 그의 건강은 많이 약해져 있었다. 우리들은 말라리아를 앓았다. 닥터 홀의 병세가 더욱 심해져 우리는 관리들의 도움을 받아 서울까지 가도록 조처되었다. 우리는 대동강을 따라 65킬로미터 쯤 내려가서 약 6백 명의 병든 군인들을 실은 배를 탔다. 군인들은 이질이나 각종 열병을 앓고 있었다. 닥터 홀은 열이 내린 것 같다가 다시 발진티푸스에 걸렸다. 어두워질 무렵 강화도 건너편 지점에 도착했으나 거기서 배가 암초에 걸려 거의 다 뒤집히게 되었다. 우리는 닥터 홀을 해안으로 옮겨놓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조선집 오막살이에 그를 눕혀두고 돛단배를 찾았다.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배를 구해 느린 항진 끝에 서울에 닿은 것은 그 다음날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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